러시아의 FSB(연방보안국) 간부가 2차대전 패전을 앞둔 일본군이 철군에 앞서 사할린 지역에서 저지른 한인 민간인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소설을 펴냈다고 한다(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9/23/0902000000AKR20080923057300096.HTML). 기사를 읽다보니 책상맡에 놓여있는 신문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제 때 스크랩을 해놓지 못하고 미뤄놓은 것인데, 호주국립대의 개번 매코맥 명예교수가 정부수립 60주년의 '슬픈 진실'을 밝히고 있는 칼럼이다. 한국전쟁시 죄수와 양민 학살이라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칼럼에 대한 별다른 반향을 접하지 못했다(다 아는 내용이란 말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 교과서 개편논의가 다시 일고 있는 듯한데, 엉뚱한 거 건드리지 말고 이런 '슬픈 진실'이나 후손들에게 똑바로 교육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경향신문(08. 09. 02) [개번 매코맥 칼럼]정부수립 60주년의 ‘슬픈 진실’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정부가 수립된 지 60주년이 됐다. 생일은 미래를 계획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기다. 하지만 슬픈 진실은 1948년에 출범한 공화국(Republic)이 6개의 공화국 중 첫번째 공화국에 불과하고, 그 역사에는 축하할 것보다 한탄할 것이 많다는 점이다.

우선 이 공화국은 유엔(본질상 미국)의 창조물이다. 한국인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쳤다. 미국은 1947년 한국 문제를 유엔에 위임했고, 명목상 독립적이고 단일한 정부수립을 감독할 기구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준비했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이 관리하고 있는 한반도 남쪽에서 별도의 선거를 치르도록 강요했다. 임시위원단의 주요 회원국이었던 캐나다와 호주, 의장국이었던 인도는 이에 저항했다. 국토의 반쪽에서만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그들의 사명이 아니었다. 테러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민주적인 선거는 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美에 의해 창조된 ‘反共 공화국’
임시위원단이 1948년 3월11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치러진다는 것을 조건으로’ 선거 여부를 표결에 부쳤을 때 캐나다와 호주는 반대표를 던졌다. ‘자유로운 분위기’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한의 단독 선거가 국가의 분열을 강화할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결국 임시위원단은 투표를 실시했다. 의장인 인도 외교관 KPS 메논이 이상하게도 입장을 바꿨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시인 모윤숙)을 향한 그의 사랑이 그의 더 나은 판단을 압도했다. 그가 회고록에 썼듯이 그것은 “외교관으로 봉직하는 동안 내 심장이 내 머리를 이기도록 허락했던 유일한 경우”였다. 사적이고 경솔한 행동에서 더 나은 결과가 도출되는 일은 거의 없다.



단기적으로 남북의 단독 선거는 제주에서 소요를 야기해 수만 명이 살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20세기 아시아에서 벌어진 대규모 잔학행위 중 하나였다. 장기적으로는 두 개의 한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2년 후 전쟁이 터질 무대가 준비된 것이다. 12월 유엔 결의는 이승만 정부에 대해 ‘한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정통성을 부여했다. 제1공화국이 수립된 지 2년 후, 유엔은 공화국을 방어하기 위해 전례 없는 참전 조치를 취했다. 그 전쟁이 끝난 후 6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방어에 수반됐던 끔찍한 사실의 세부 내용들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다.

조선인민군이 남쪽으로 진격하자 이승만 정부는 감옥에 수감돼 있던 북한 협력자를 제거하고, 감옥을 빠져나간 정적을 추적해 가능한 한 많이 살해하기 위한 단계를 밟았다. 한국 암흑세계의 중심은 대전이었다. 유엔과 남한군의 연락장교로 복무하던 호주 육군장교 2명은 7월9일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 죄수들을 태우고 남쪽으로 향하는 트럭 호위대를 목격했다. 장교들 중 하나인 스튜어트 피치 대령은 1982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바로 내 눈 앞에서 2~3명이 사망하는 것을 봤다. 그들의 머리는 라이플총의 개머리판에 맞아 계란처럼 부서졌다.” 후일 공주에서 그는 죄수들이 총살당했다고 들었다.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사진잡지 ‘픽처 포스트’에 실린 사진 한 장은 트럭 한 대 분량의 죄수들을 보여준다. 사진 설명은 “금강 둔치에서 남한의 반역 혐의자들이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히고 있고, 유엔이 이 문제에 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며칠 후인 7월13일 북한군은 금강을 건넜고 7월20일 대전을 포위했다. 그들과 함께 공산주의 성향의 신문 ‘데일리 워커’의 특파원인 영국인 기자 앨런 위닝턴이 도착했다. 위닝턴은 대전 근처 ‘낭월’이라 불리는 마을에서 대규모 무덤을 보았다. 마을 주민들과 논의한 끝에 그는 대전 지역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7000여 명에 대한 집단 학살이 일어난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런던에서 위닝턴의 기사가 보도된 시점에 북한의 ‘조선 인민보’도 희생자가 7000여 명이라며 이 학살 소식을 전했다. 미군 무관 또한 이것을 백악관에 보고했다. 이 보고는 남한군에 책임이 있으며 죄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이 (이승만 대통령을 의미하는) ‘최고위급 당국’에서 내려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조사도 실시되지 않았다. 대신 (아마도 워싱턴에 있는) 누군가가 이 사건을 전쟁 중에 있었던 특이하면서도 단일한 북측의 학살로 뒤바꾸기로 결심했다. 사건은 (미군이 묘사한 대로) “ ‘난징의 강간’ ‘바르샤바 게토’와 함께 역사적 사료로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꾸며졌다. 사건의 이 같은 각색본이 1953년 10월 전세계에 출판되면서 대전 학살은 북한이 유난히 잔인하게 행동했던 주요 사례가 됐고, 북한이 ‘악의 축’으로 지명되는 데 일부 기여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40년 이상이 흘러 한국의 월간지 ‘말’이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 1992년의 일이다. 한국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5년 설립)가 조사 결과물을 발표하기까지는 그로부터 16년이 더 걸렸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처음 한 달간, 즉 제1공화국이 수립되고 3년이 흐른 시점에, 적어도 10만명의 양민이 바로 그 공화국이 세우고 통제하는 군대의 손에 학살됐다. 대전 학살은 수많은 참사 중에서 최악의 사례다. 대량 학살은 남한 땅의 남북과 동서에 걸쳐 일어났고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얕게 판 무덤에 던져지거나 광산 혹은 바다 속에 버려졌다. 진실·화해위는 수백건의 다른 사례들을 조사하고 있다. 이 사례에서 미군은 대부분 공중에서 ‘흰 옷을 입은 사람들’(한국 양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을 소사하고 네이팜탄으로 공격한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

‘10만 양민 학살’ 이승만은 전범
이 참사들에 대한 폭로는 2008년 들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반응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공화국의 고위급 정치 지도자들이나 미국, 유엔은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다. 어떤 신문도 관련 사설을 쓰거나 칼럼을 게재하지 않았다. 한국 바깥의 보도도 균일하지 않았다. AP통신이 공들여 작성한 기사를 일부 미국 신문과 영국 BBC 방송이 다시 보도했지만 미국과 유엔의 책임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우리는 세르비아나 다르푸르의 잔혹 행위, 티베트와 그루지야, 때로는 북한의 인권 침해를 비난하지만, 우리에게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은 너무 고통스러워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결과 두 가지의 불명예가 정부수립 기념일을 장막으로 가린다. 첫째, 한국이라는 국가는 유엔과 한국인들에게 강요된 미국의 창조물이다. 이 국가의 존재 이유는 민족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反공산주의다. 둘째, 공화국의 첫번째 대통령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것은 오늘날 비난받고 있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가 저지른 전쟁 범죄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 책임은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에게 있다. 진실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알았어야 했던, 하지만 한국전쟁이 우리의 이름으로 치러진 방식에 눈감아버렸던 모든 나라의 정부와 시민들도 그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정리 최희진기자)

Korea at 60
 
 The Republic of Korea has turned 60. Birthdays are a time for looking back over the past as well as for planning the future. The sad truth, however, is that the Republic that was born in 1948 was only the first of six, and that its record contains little to celebrate and much to lament. It is unlikely that many Koreans today remember it with pride or pleasure.
 
 In the first place, this Republic was uniquely a United Nations (which at that time meant essentially a US) creation. Koreans played a minimal role. The United States entrusted the Korean problem to the UN in 1947 and saw to the establishment of UNTCOK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as a body nominally to oversee the creation of a unified, independent Korea, but then pressed for separate elections in its southern controlled zone. Three key members of the committee - Canada, Australia, and India (its chair) - resisted. To conduct elections in half a country was not their mission, and there could be no democratic elections under the then prevailing conditions of police state terror.1) When the Commission voted on 11 March 1948 to observe elections "provided they were held in a free atmosphere," Canada and Australia both voted against, because there plainly was no "free atmosphere," and they deplored what they saw as a step towards entrenching the division of the country But the vote was carried in the Commission because its chair, the Indian diplomat KPS Menon, did a bizarre volte-face. He switched his vote because his love for a Korean woman (the poet Marian Mo or Mo Yun-suk) prevailed over his better judgment. It was, he wrote in his Memoirs, "the only occasion in my service when I allowed my heart to prevail over my head."2) Rarely did greater consequence follow from personal indiscretion.
 
 In the short term, separate elections led to the uprising in Cheju where tens of thousands of people were killed (in one of the great atrocities of 20th century Asia) and in the longer term to the establishment of separate Korean regimes under conditions that that set the scene for war two years later. In December, a UN resolution conferred legitimacy on the Rhee government as "the only legal government in Korea." Australia proposed this resolution, thus abandoning its pursuit of autonomous middle power principle and adopting instead the principle of "Follow the United States," (what in Korean might be known as sadae) which it was to follow thereafter for much of the remainder of the 20th century.3)
 
 Two years after founding the Republic, the UN itself took the unprecedented step of going to war to defend it and now, nearly six decades after that war ended, horrendous details of what that defense entailed continue to come to light.
 
 As the Korean People's Army advanced south the Rhee regime took steps to clear its prisons of possible Northern collaborators and to track down and kill as many as it could of those opponents who were not already in prison. The heart of the Korean darkness was Daejeon.
 
 On July 9, two Australian army officers, liaising between the UN and South Korean forces, were on the road from Taejon to Konju when they saw a convoy of trucks loaded with prisoners going south. One of them, Colonel Stewart Peach, recalled in a 1982 interview with this author: "Before my very eyes I saw at least two or three killed, their heads broken like eggs with the butts of rifles."4) Later, in Konju, he was told that prisoners were being shot. A contemporary photograph in the London Picture Post shows a truckload of such prisoners, described as "South Korean suspected traitors," on the banks of the Kum River "on their way to execution," adding that the matter was under investigation by the UN.5) Days later, on 13 July, the North Korean forces crossed the Kum River, and on 20 July captured Daejeon. With them came the British journalist (correspondent for the communist Daily Worker) Alan Winnington. Winnington saw mass graves at a village called "Rangwul" near Daejeon, and from discussions with villagers, he too concluded that a major massacre had occurred, with approximately 7,000 prisoners from the jails of Daejeon and nearby summarily executed and buried in mass graves dug by locally press-ganged peasants.6) Around the same time that Winnington's report was published in London, the North Korean Choson Inminbo reported the massacre, giving the figure of 7,000 victims.7) The US military attache also reported it to Washington, making clear that South Korean forces were responsible and that the orders to execute the prisoners had come from "the highest authority" (which could only mean President Syngman Rhee).
 
 No investigation was conducted. Instead, somebody (presumably in Washington) decided to turn this into a Northern massacre, the characteristic, single atrocity of the entire war, one worthy (as the US Army described it) "of being recorded in the annals of history along with the Rape of Nanking, the Warsaw Ghetto."8) As that version of events was published around the world in October 1953,9) the Daejeon Massacre became the centrepiece of the case that North Korea was exceptionally brutal, an impression that remains alive today and accounts in part for the designation "Axis of Evil."
 
 It was 1992, more than 40 years after the events occurred, before the South Korean monthly Mal began to tell the true story,10) and it took another 16 years before the South Korean government's semi-official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established in 2005) began to publish its findings. According to the TRC, during the first months of the Korean War, Year Three of the Republic, at least 100,000 citizens were slaughtered by forces set up and controlled by that very republic.11) Daejeon was only the worst of a litany of horrors. Mass murder took place the length and breadth of the country, countless bodies being dumped in shallow graves or abandoned mines or into the sea. The TRC is also investigating hundreds of cases in which the US military is directly accused of indiscriminate bombing, strafing, or napalming of "people in white" (ie, Korean civilians) mostly from the air.
 
 Revelations about these horrors have flowed steadily during 2008. Yet they have met little response: no comment from senior political leaders of the Republic itself, or the United States, or the United Nations, nor (so far as I am aware) has there been a single newspaper editorial or significant "opinion" essay in Korea itself. Coverage outside Korea has been patchy. The story as painstakingly told by Associated Press has been carried by some US newspapers and by the BBC, but rarely with a focus on the American and UN responsibility.12) While we unequivocally denounce atrocities in Serbia or in Darfur, and human rights denials in Tibet or in Georgia, or for that matter North Korea, those for which we ourselves bear responsibility seem too painful to contemplate.
 
 Two grim reflections therefore cast their pall over the birthday celebrations: first, that the South Korean state was a US creation, imposed on the United Nations and on the Korean people, whose raison d'etre was neither nationalism nor democracy but simply anti-communism, and, second, that the first president of the republic was guilty of war crimes far exceeding those of which the Bosnian Serb leader Radovan Karazic is accused today. That responsibility is shared by General Macarthur, President Truman, UN Secretary-General Trygve Lie, and by the governments and citizens of all those countries that knew, or should have known, but turned a blind eye to the way the war of 1950-53 was fought in our names.

 <이하 주석>
 
 1) The Australian delegate on UNTCOK referred to the torture and murder of political opponents as “accepted and commonplace.” See my Cold War Hot War: An Australian Perspective on the Korean War, Sydney,, Hale and Iremonger, 1983, resumed in subsequent books, including Target North Korea: Pushing North Korea to the Brink of Nuclear Catastrophe, New York, Nation Books, 2004 (Korean edition from Icarus Media, Seoul, 2007).
 2) K.P.S. Menon, Many Worlds Revisited: An Autobiography, Bombay 1981, p. 259. Menon‘s waxed poetic and nostalgic in his memoirs, describing the accord he felt with Mo on “such elemental things as the sun and moon and stars, love and grief and joy.” Mo pinned all her hopes on him and wrote poems to him as “saviour of Korea.” He did not disappoint her.
 3) J.W. Burton, The Alternative, Sydney, 1954, p. 90. (Burton, Secretary of the Australian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between 1947 and June 1950, was the first to describe Australia’s foreign policy shift in these terms.)
 4) Interview with this author, Sydney, 14 August 1982.
 5) Stephen Simmons (journalist) and Haywood Magee (photographer), “War in Korea,” Picture Post, vo.l 48, No. 5, July 1950, p. 17. (The caption describes the incident as a matter “which has been investigated by a United Nations observer.”)
 6) Alan Winnington, “U.S. Belsen in Korea,” The Daily Worker, 9 August 1950. (The British government gave serious consideration to trying Winnington for treason over this report.)
 7) Park Myung-lim, [Pak Myong-nim], Han‘guk 1950: Ch?njaeng-gwa P’y?nghwa (Korea 1950: War and Peace), Seoul, Nanam, 2002, p. 324 (According to Park, these orders were issued “at the highest levels” and were not limited by geographical area.).
 8) “Korean Historical Report,” War Crimes Division, Judge Advocate Section, Korean Communications Zone, APO 234, Cumulative to 30 June 1953, Copy in Australian Archives, Victorian division, MP 729/8, Department of the Army, Classified Correspondence Files, 1945-1957, File 66/431/25.
 9) See, for example, Daily Telegraph(Sydney), 30 October 1953.
 10) No Ka-Won, “Taejon hyongmuso sachon sanbaek myong haksal sakon” (The massacre of 4,300 men from the Taejon prison), Mal, February 1992, pp. 122-31.
 11)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Republic of Korea, “Alleged communists massacred under the eyes of American soldiers,” Seoul, 16 June 2008, (with photographs released on 5 May 2008 by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http://www.jinsil.go.kr/English/Information/notice/read.asp?num=193&pageno=&stype=&sval=&data_years=&data_month=
 Associated Press has made great efforts to investigate and publish this story. See especially Charles Hanley, “Fear, secrecy kept 1950 Korea mass killings hidden,” May 18, 2008, http://news.yahoo.com/s/ap/20080518/ap_on_re_as/korea_mass_executions_covered_up,
 And Charles J Hanley and Jae-Soon Chang, “Impact: Thousands killed by US‘s Korean ally” Associated Press, 18 May 2008,
 http://ap.google.com/article/ALeqM5h2rT2wzhviymfyfyRdmdKw6tciagD90O9DJ80.
 and the remarkable “Inter active” file, with its video testimony of one of those involved in the mass killings:
 http://hosted.ap.org/specials/interactives/_international/korea_masskillings/index.html?SITE=AP.
 Gregory Henderson, then employed in the US embassy in Seoul and later prominent historian and author of a classic study of Korean politics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Cambridge, Mass., Harvard UP, 1968, p. 167) also put the figure of “probably over 100,000” on those summarily executed at this time.
 12) Despite Australia’s involvement in the events surrounding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and in the War itself, the findings of the Commission are yet (as of late August 2008) to be reported there.

08. 09. 23.

P.S. 매코맥 교수의 책으론 <일본 허울뿐인 풍요>(창비, 1998)와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이카루스미디어, 2006)이 소개돼 있다. 후자는 "30년 넘게 남북한, 중국, 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에 대해 연구해 온 학자 개번 맥코맥 교수가 최근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전망과 조언을 담은 책이다." 이런 조언을 정작 들어야 할 사람들은 다 귀를 막고 있는 듯하여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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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3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3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6 18:10   좋아요 0 | URL
매논과 모윤숙의 로맨스는 찢겨진 산하를 통해서 유명해졌죠.모윤숙 씨는 자신이 대한민국 탄생에 공헌했다며 생전에 상당히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로쟈 2008-09-27 12:53   좋아요 0 | URL
영화화될 수도 있겠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6:00   좋아요 0 | URL
에로물이 될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