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중대신문에 게재한 기획서평을 옮겨놓는다.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에 대해서는 한겨레21에 실은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http://blog.aladin.co.kr/mramor/2293474)에서 이미 다룬 바 있지만 '과학적 보편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적 검토를 좀더 언급하고 싶어서 추가적으로 지면을 빌리게 됐다(사실 <유럽적 보편주의>에 대한 독후감은 중대신문의 서평으로 먼저 고려됐지만 한 주 연기되는 바람에 한겨레21의 연재가 먼저 나가게 됐다). 분량에 비해 거창한 제목이 돼버렸는데, 여하튼 이행기 지식구조의 변동과 대학의 변화는 지속적인 관심사로 두려고 한다(그런 이유에서 최근에 대출한 책이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와 사미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이다).

중대신문(08. 09. 16) 유럽의 보편주의를 넘어 근대 대학이 나아갈 길은

가을이다. 이 결실과 조락의 계절에 사회과학서를 읽는 일이 분위기에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명한 세계체계 이론가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창비)는 예외라고 해야겠다. 우선은 강연문을 묶은 것이어서 읽기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 분량이 짧다. 그리고 수십 년간 세계체제이론을 가다듬어온 저자의 핵심적인 사상이 압축돼 있어서 월러스틴 입문서로 유익하다.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자면 이 또한 ‘가을의 책’이다.



 

 

 

 

 

저자는 이미 소비에트식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던 해 ‘자본주의 문명’이란 강연(1991)에서 “자본주의 문명은 그 존재의 가을에 다다랐다”고 진단한 바 있다.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사회체제가 바야흐로 막바지, 곧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따라서 현시대는 이행기라는 주장이었다. 월러스틴이 16세기(1450-1650)에 형성된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로 지목하고 있는 ‘유럽적 보편주의’ 또한 이 종말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해 보인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비록 구체적 상이 제시된 건 아니지만, ‘보편적 보편주의’이다. 월러스틴은 이 두 가지 보편주의 사이의 싸움이 향후 20년에서 50년 사이에 진입하게 될 미래의 세계체제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적 보편주의라는 편파성을 갖는 근대 보편주의의 두가지 양식으로 월러스틴은 오리엔탈리즘과 과학적 보편주의를 든다. 보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쪽은 과학적 보편주의이다. 실상 근대의 학문적 이념이기도 하기에 과학적 보편주의에 대한 회의는 현재의 지식구조와 대학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근대적 대학의 출현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며 세계전역에 대학제도가 완전한 융성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1945년 이후이다. 물론 이것은 1945년에서 1970년까지 세계경제의 거대한 팽창과 연동돼 있었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제도적인 분화가 이루어졌고 1945년 이후에는 근대세계체제 운용에 새로운 기술개발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자연과학이 인문학을 크게 앞지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세계경제가 장기침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세계 대학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사회경제적 토대가 약화되었고 변화에 대한 다양한 압력이 생겨났다. 동시에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두 문화’의 분리도 자연과학에서의 복잡계 연구와 인문학에서의 문화연구 등에 의해 도전받게 되었다. 이 두 경향은 모두 사회과학적 성격을 지니면서 전통적인 분과학문의 경계를 지워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인식에 근거하여 월러스틴이 내놓는 전망은 세 가지이다. 근대적 대학이 더이상 지식 생산과 재생산의 거점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지식구조의 새로운 구심적 경향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인식론으로 재통합될 거라는 것, 그리고 이것은 ‘모든 지식의 사회과학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지식구조 전체가 근대세계체제와 똑같이 무질서와 새로운 분기의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진단에 공감한다면 월러스틴의 전망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곧 ‘겨울’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08. 09. 18.

P.S. 한겨레21과 중대신문에 보낸 원고에는 '장기 16세기'라고 적었는데, 모두 '16세기'로 교정됐다. 1450-1650년 간의 200년을 가리키기 때문에 '16세기' 앞에 '장기(長期)'란 표현이 붙는데, 기사로 나가기에는 번거로웠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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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09-18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적 보편주의> 읽어보고 싶네요.
사미르 아민의 책은 구하기가 영 힘들더군요.

로쟈 2008-09-18 19:15   좋아요 0 | URL
막상 읽어보면 소략합니다. 대신에 다른 책들을 더 읽게 해줍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1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미르 아민은 맑스의 자본주의 이행과는 다른 발전단계설을 제시했을 때부터 서구 자본주의 위주의 근대화론과는 다른 것을 생각했겠지요.그의 변경혁명론도 그런 성격이 강하구요.1985년에 서울대 방문했을 때 기념으로 쓴 논문을 <계급과 민족>뒤편에 실었던데 그때 이미 베버류의 자본주의론이나 맑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과는 결별할 준비를 한 것 같아요.

로쟈 2008-09-20 20:19   좋아요 0 | URL
방한까지 했었군요. <유럽중심주의>는 얇은 책이라 만만하게 생각하고는 있는데, 시간이 잘 안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무렵이 우리나라에서 아민이 슈퍼스타였죠.번역도 하고...90년 이후 갑자기 유행이 뚝!!! 모르는 사람은 우간다의 이디 아민의 동생인줄 알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죠.

로쟈 2008-09-21 09:41   좋아요 0 | URL
전설 같은 이야기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