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부키, 2008)가 거의 20년만에 다시 나왔다. 첫 번역본 <레이스 뜨는 여자>(예하, 1989)의 역자인 이재형씨가 손을 더 보아서 냈는데, 덕분에 잠깐 2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했다(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과 함께 이 책을 읽던 부대 관사의 당번병 방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1989년이었다). 젊은 독자들에겐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책은 "콩쿠르 수상작이자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레이스 뜨는 여자>(1977)의 원작 소설"이다. "얀 베르메르의 동명의 그림(하지만 '레이스 짜는 여인'으로 표기된다)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은 문학이 씨줄로, 철학과 사회학, 심리학이 날줄로 엮혀 있는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개인적으론 이자벨 위페르와 관련한 페이퍼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http://blog.aladin.co.kr/mramor/1548659 참조). 반가운 마음에 자료를 찾으니 바로 얼마전에 장석주씨가 쓴 '독서일기'가 있어 스크랩해놓는다.  

 

뉴스메이커(08. 08. 20) 뽐므는 정말로 ‘흔해 빠진 여자’일까?

프랑스 낭테르 대학에서 남학생의 여학생 기숙사 출입을 막는 데 따른 불만에서 촉발한 시위는 5월 한 달 동안 프랑스 전역에서 대학생 시위와 1000만 노동자의 대규모 파업으로 번진다. 불이 산소를 만나 타오르듯 냉전과 베트남전과 같은 시대의 화두를 끌어안으며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타오르게 했다. 그러나 ‘68혁명’은 하나의 이념과 기획으로 묶을 수 없다. 모든 금지에 대한 저항, 구속 없이 즐기는 삶에 대한 열망이 그 이념과 기획을 대체했다. 궁극적으로 낡은 정치체제와 신체에 가하는 낡은 도덕 관습들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

‘68혁명’의 거센 불길이 지나간 뒤에 남은 것은 마리화나와 히피, 마오주의(Maoism), 그리고 성의 해방이다. 그 중에서 마오주의는 최악의 유산으로 꼽혔다. 젊은이들 사이에 번진 파시즘 독재자에 대한 이상한 열광은 이해할 수 없었다. ‘68혁명’에 대한 평가는 낡은 도덕과 정치체제를 새것으로 바꾸려는 ‘혁명’이거나, 혹은 무질서와 파괴로 얼룩진 재앙이라고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68혁명’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대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점이다. 그 움직임은 국가와 권위에서 오는 일체의 통제와 억압에 대한 저항이고, 혹은 하나로 묶일 수 없는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만든 사건의 연속체였다. ‘68혁명’은 저렇게 다른 목소리들이다. 다양한 차이 안에서 그 목소리는 변화하려는 열망과 그 극단을 드러낸다. 그 목소리는 조직되지 않고, 기성 조직에 기대지도 않는다. 그 목소리는 신체를 포획하는 그 무엇을 스스로 바꾸고자 하였을 뿐이다.



파스칼 레네는 ‘68혁명’의 중심을 가로질러 나온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이자 소설가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레이스 뜨는 여자’는 ‘68혁명’의 여진(餘震) 속에서 씌어진, ‘68혁명’이 지핀 변화를 향한 열망이 스민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68혁명’이 젊은이들의 의식과 행동에 어떻게 스며들고 변화의 무늬를 남겼는지를 찾아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들은 확실히 ‘68혁명’ 이전 세대와는 무언가 다를 것이다. ‘금지만이 금지된다’ 혹은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라는 ‘68혁명’의 강령을 간접적이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체화해낸 세대는 성에 대한 낡은 도덕적 관습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녀는 매일 밤 그렇게 하기라도 했듯이, 서두르지 않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녀는 바지의 주름을 잡아서 의자 등받이에 놓아두었다. 청년은 그런 식의 침착함에 얼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계속되어온, 육체를 향한 그의 육체의 동작의 탐색은 그토록 단순하고 말없는 침착성과 비교할 때 정말 우스꽝스러운 노력이었고 어려움이었던 것처럼 그에게는 보였다. 하지만 그는 뽐므가 평소에는 덜 세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 앞에서 자발적으로 옷을 벗는다. 스스로 옷을 벗음은 하나의 비밀의식이다.



한 존재란 그 자체로 얼마나 충만한 존재인가. 파스칼 레네가 묘사하는 여주인공 뽐므는 다음과 같다. “충만이란 그 나이(열네 살이라고 해두자)의 여자 아이에게는 적합한 말이 아니지만, 이 아이는 꽉 차 있다는 인상을 즉시 풍겼다. 바삐 움직이거나 앉아 있거나 길게 드러누운 채 꼼짝 않고 꿈을 꾸거나,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거나, 그녀의 정신이 그녀에게서 벗어나 잠시 꾸벅꾸벅 졸거나 간에 그녀의 육체의 존재는 온 방 안에 군림했다. 뽐므, 그녀는 이제 막, 그러나 완전한 동질성과 놀랄 만한 밀도를 갖추고 완성된 것이다. 그녀의 영혼 또한 틀림없이 단단하고 두툼할 것이다. 그것은 그 존재가 추상화한 눈길이나 말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었다. 정말 하찮아 보이는 그녀의 움직임과 활동조차도 그녀를 매 순간의 영원성 속에 구현시켰다.”

가난이 진부한 재앙이라면 “완전한 동질성과 놀랄 만한 밀도를 갖추고 완성된” 뽐므의 삶은 진부한 재앙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셈이다. 그러나 가난이나 천직(賤職) 따위는 한 사람의 심오한 본성을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관습의 독재에 빠진 시선은 한 사람을 심오한 본성을 가진 충만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내의를 책임 맡은 하녀’ ‘물 배달하는 여인’ '레이스 뜨는 여자’로 보게 한다. 남자의 시선은 그 여자의 존재로 스미지 못하고 그 여자가 수행하는 직분 위로 미끄러진다. 그럴 때 몸은 소통하지 않고 다만 소비된다.

처녀와 청년은 우연히 만나 성교를 하고, 함께 식사를 한다. 두 존재의 다름은 이내 드러난다. “그들은 제비콩 샐러드를 먹었는데, 청년은 처녀의 의도를 해독할 수 없었고, 처녀는 그런 건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청년과 함께 있는 데,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데 만족해했으며, 그래서 그녀는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해서 주눅이 들어 있는 그 청년의 침묵을 불안해하지 않았다.” 처녀는 청년의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마찬가지로 청년 역시 처녀의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요컨대 그들은 동일한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이었다. 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은 상대방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똑같은 즐거움을 나누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서 태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뭘 기대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감은 몰이해와 혐오감으로 나타난다.

청년은 처녀가 이빨 닦을 때 내는 소리, 침대에서 처녀의 발이 제 몸에 닿는 것, 잠든 처녀의 숨소리조차 견디기 힘들어한다. 처녀의 현전 자체가 욕구를 휘발시키고 실망과 유감 속으로 빠뜨린다. “그에게는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뽐므가 일을 끝내고 돌아와 방으로 들어오면, 충만감도, 기쁨도 사라져버렸다. 반대로 그녀의 현전은 그녀에 대한 욕구를 그에게서 앗아갔다. 그것은 매번 변함없이 가볍고 겨우 느껴지면서도 진정한 실망이었으며 똑같은 유감이었다.” 미래의 박물관장인 청년은 어디에나 있는 흔한 처녀를 만나 성교까지 나누지만 처녀 존재 자체에서 오는 실망과 환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약하자면 이 처녀는 그 ‘68혁명’에 대한 하나의 은유는 아닐까. 그리고 청년은 실패한 혁명에서 오는 실망과 환멸에 빠진 그 숱한 자율주의자들, 작가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 계급의 표상은 아닐까.

“그런데 그로 말하자면 자아를 기증하려고 하는 그 처녀를 만류할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잠자기 전에 끄는 것을 잊어버린 전등만큼도 그 촛불에 대해 염려하지 않은 채로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그 작은 촛불이 자기 앞에서 타도록 내버려두었다.” 정욕의 시선들은 어디서나 ‘덮칠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떠돈다. 타자에게 제 자아를 기증하려는 ‘흔해 빠진 여자'는 잠자기 전에 불 끄기를 잊는 남자의 수만큼이나 희귀하다. 흔한 것은 그 여자를 ‘흔해 빠진 여자’라고 믿는 일방적 해석의 오류에 빠지는 남자들이다.

우연히 만난 처녀를 남자가 ‘흔해 빠진 여자’로 묶을 때 여자는 영원히 남자의 이방(異邦), 바깥에 머문다. 여자를 제 생의 가치 영역에서 배제할 때 남자 역시 여자의 이방으로 전락하는 결과에 이른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날리는, 아주 조금은 비극적인 꽃가루로 비유했던 이 인물을 포착하면서, 작가는 이 인물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연약한 존재에 어울릴 만큼 섬세하고 정밀한 글쓰기는 존재할 수 없으리라. ‘레이스 뜨는 여자’는 그녀가 짠 세공품의 투명함 그 자체 속에서 나타나게 해야 할 것이다.”



태생적 배경이 다른 두 남녀의 만남, 동거와 헤어짐, 여자의 거식증과 정신병원행 따위는 흔한 연애소설의 외관을 취하지만 이 소설은 흔한 연애소설은 아니다. 이 섬세하게 연애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시대에 대한 중의적 사유를 덧씌운 ‘레이스 뜨는 여자’는 선택과 배제의 오류에 대한 관찰을 보여준다. 더 또렷하게 말하자면 선택과 배제에 대한 심리적 고찰과 철학적 탐색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정교하게 짠 레이스와 같이 아름다운 세공품 그 자체인 여자가 가난이나 천직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의 폭력에 의해 비참한 자아로 떨어지는지, 해석의 폭력이 어떻게 여자의 현전이 감춘 감수성, 아름다움, 평온함 따위를 지워버리는지를 묘사한다. 파스칼 레네는 그 묘사를 실패한 혁명이 만든 실망과 환멸 위에 덧씌운다.(장석주)

08.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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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8-09-13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읽어보네요. 극한 디테일이 주는 각성의 시선과 의식의 깨어남 같은 것. 그러면서 그 눈을 통해 머리속이 환해지는 경험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접속되네요. 로쟈님 잘 지내시죠?

로쟈 2008-09-13 08:53   좋아요 0 | URL
바쁜 일은 끝내셨나요?^^

2008-09-13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5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9-15 09:57   좋아요 0 | URL
축하합니다.^^ 이사도 하셨으니 제2의 인생이시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