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의 현실과 번역의 길'(http://blog.aladin.co.kr/mramor/2246155)에 덧붙였던 글인데, 분량이 길어져서 따로 제목을 붙인다. <권력과 지성인>(창, 1996)과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의 몇몇 오역에 대한 코멘트이다.



먼저, <권력과 지성인>의 오역 한 대목만 지적한다(제목의 '지성인'도 '지식인'이라고 옮겨져야 한다). 영국 BBC의 리스(Reith) 강좌(1993년)를 책으로 묶은 것인데, 내가 관심을 갖는 대목은 4장 '전문직업인과 아마추어'이다('전문가와 아마추어'라고 옮기고 싶다). 책에 대한 요약은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 2003)의 1부 3장을 참조.

 

 

 

 

사이드는 서두에서 국내에도 많이 소개돼 있는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 레지(스) 드브레(번역본은 '레기 드브레이 Regis Debray'라고 옮겼다)의 <교사, 작가, 명사: 프랑스의 지식인들>(1979)의 내용을 따라가는데, 드브레에 따르면 20세기 프랑스 지성사는 지식인들의 주 활동무대를 기준으로 몇 단계로 나뉜다. 1880-1930년까지는 소르본느대학이 활동거점이었고 대부분의 지식인이 대학교수였다. 그리고 1930년 이후 대략 1960년까지는 '신프랑스평론' 같은 출판사/잡지가 활동의 주무대가 된다. 이에 대한 서술이다.



"대락 1960년까지 사르트르, 드 보바르, 까뮈, 모리악, 지드, 말로와 같은 저술가들은 제한 없는 영역에 걸치는 저술활동, 자유에 대한 신조, 그리고 1960년대 이전에 있었던 성직자적 엄숙성이라는 것과, 그러한 것과 대조적인 1960년대 이후에 등장한 요란스러운 광고의 중간쯤 성격을 지닌 그들의 담론으로 인해 사실상 교수직을 박탈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118-9쪽)

사르트르 등의 저술가들이 "사실상 교수직을 박탈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원문은 이렇다: "Until roughly 1960, such writers as Sartre, de Beauvoir  ... were in effect the intelligentsia who had superseded the professorate because of ..." 즉 대학 바깥의 지식인이었던 이들이 1930년까지 대세를 이루던 교수들, 곧 강단 지식인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걸 번역본처럼 엉뚱하게 옮겨놓으면 "잘못된 번역서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 엉터리로 아느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번역서'란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특히나 저작료까지 지불한 번역서일 경우엔 오히려 수용에 '걸림돌'이 된다(오늘도 조금 보다가 한숨을 내쉰 지젝의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같은 경우가 유감스럽게도 드물지 않다). 사이드의 지식인론을 집약하고 있는, 때문에 분량에 비해서 상당히 유익한 <지식인의 표상>이 제대로 다시 번역되기를 바란다...



말이 나온 김에, 사이드가 생각하는 인문학과 인문주의에 대한 성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에서도 몇몇 오역들은 교정되면 좋겠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본문 첫 페이지의 이런 대목: "세 번째로는, 비서구 문화권에서 성장한 경계인이자, 사이문화인bicultural인 제가 보통의 토박이 미국인이나 '서구인'으로 불리는 이들에 비해 관점이나 전통 같은 것에 특히 민감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17쪽) 원문은 "Thirdly, I grew up in a non-Western culture, and, as someone who is amphibious or bicultural, I am especially aware, I think, of perspectives and traditions other than those commonly thought of as uniquely American or 'Western'."

이 책 역시 미국의 문화와 인문주의 등을 주제로 한 2000년과 2003년의 연중 강연들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인문주의의 영역'을 테마로 한 첫 강연문에서 사이드는 자신이 '미국의 인문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를 몇 가지 든다. 인용문은 그 세번째 이유인데, '에드워드 사이드'란 특이한 이름이 암시해주듯이('에드워드'는 영국의 황태자 '에드워드'를 딴 것이고 그의 아랍인 성이 '사이드'이다) 그가 영국 지배하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아랍인(팔레스타인인)이면서 예루살렘과 카이로(이집트)의 영어 학교를 다니고 미국대학에서 영문학 교수가 된 자신의 성장배경이 그것이다. 자신이 '경계인'이고 '바이컬추럴'('2개 국어 사용자'를 뜻하는 '바이링구얼'을 떠올려보라)이기 때문에 미국이나 서구 외에 다른 전통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

번역문은 "'those commonly thought of as uniquely American or 'Western'" 다음에 'perspectives and traditions'가 생략돼 있다는 걸 놓침으로써 '독특하게 미국적이거나 서구적이라고 간주되는 관점이나 전통"을 "보통의 토박이 미국인이나 '서구인'으로 불리는 이들에 비해"라고 오역했다. 사이드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관점이나 전통 이외의(other than) 관점이나 전통에 대해서도 자신이 특별히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예컨대, 그는 '아랍문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미국인'이다!). 때문에 그의 관심은 "미국 인문주의의 유럽적 선조들 그리고 서구의 시야 '바깥'으로 여겨지는 것이나 그 바깥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오역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이 신뢰를 잠식한다(사실 사이드를 번역하는 일은 어렵다. 그의 문장들은 나도 별로 즐기는 편이 못된다). 또 다른 사례로 동료교수이자 비평가 라이오넬 트릴링(1905-1975)에 대한 언급('리오넬 트릴링 Lionel Trilling'이라고 옮긴 것에서 역자가 '초면'이란 걸 알 수 있다). 저명한 문학비평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트릴링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거의 없다. 찾아보니 아주 옛날에 <문학과 사회>(을유문화사, 1960)가 번역된 정도('라이오넬 트리링'으로 표기됐고, 역자는 양병탁). <자유로운 상상력(The Liberal Imagination)>의 번역이다(두산백과사전을 따른 제목인데, '진보적 상상력'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제 말년의 동료인 리오넬 트릴링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컬럼비아의 인문학 수업은 학생들에게 독해의 상식적 기초를 제공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으며, 후에 학생들이 읽은 책들을 잊어버린다 하더라도(많은 학생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적어도 같은 책을 잊어버리는 셈 아니겠냐고 말입니다."(20쪽)

여기서 "제 말년의 동료 리오넬 트릴링"은 "my late colleague Lionel Trilling"을 옮긴 것인데, 'late'는 '고(故)'란 뜻이다. 나라면, "제 동료였던 고(故) 트릴링 선생님"이라고 옮기고 싶다. 그리고 '상식적 기초'라고 옮긴 건 '공통의 기초(common basis)'를 잘못 옮긴 것이다. 트릴링이 말하기를, 대학의 인문학 강좌가 학생들에게 공통의 독서목록을 제시하므로 나중에 학생들이 읽은 책을 다 잊어먹더라도 '똑같은 책'을 잊어먹은 것이 아니겠는가?(이게 교양교육의 의의다!).

"이 말이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사회과학이나 과학 분야의 기술적인 글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읽지 말자는 주장에 반하는 말이었으므로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었습니다."(20쪽) 원문은 "This did not strike me as an overpowering argument, but, as opposed to not reading anything except technical literature in the social sciences and sciences, it was compelling nevertheless."(4쪽)

이 대목에서 'overpowering'을 그냥 '인상적' 정도로 옮긴 것은 인상적이지 않다. '반대주장을 압도할 만한'이란 뜻이다. 어떤 반대주장인가? 인문학 무용론 내지는 교양교육 무용론이겠다. 중간의 삽입구를 제거하면, 이 문장은 This did not strike me as an overpowering argument, but it was compelling nevertheless."로 요약된다. 트릴링의 주장은 overpowering 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compelling 하기는 했다는 것. 번역문에는 이런 대구가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다시 옮기면, "그것은 제가 보기에 인문학을 옹호하는 압도할 만한 주장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전문서만 읽으면 된다는 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런 주장을 내세웠던 트릴링은 어떤 인문주의를 실천했나? "그들 가운데 몇몇 -특히 트릴링- 은 자주 자유주의적 인문주의에 비판적이었으며, 때로는 불온하게, 물론 세간의 이목이나 그들의 학계 동료와 학생들의 의견이 그랬었다는 것이지만, 전문용어나 과도한 전문가주의 없이 인문주의적 삶이 닿을 수 있는 가장 풍요롭고 가장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21쪽) 원문은 "Some of them -Trilling in particular- frequently spoke critically about liberal humanism, sometimes even disquietingly, although in the public eye and in the opinion of their academic colleagues and students, they represented the humanistic life, without jargon or undue professionalism, at its richest and most intense."

컬럼비아대학출판부 주최의 강좌였던 만큼 컬럼비아대학의 인문학 전통에 대한 '자화자찬'이 좀 들어간 대목인데, 트릴링을 필두로 컬럼비아'학파'의 경향을 지목하고 있다. 말의 좋은 의미에서 '보수적'이고 '고지식했다'고 이해된다. '자유주의적 인문주의(liberal humanism)'는 자유분방하면서 관용적인 인문주의겠다. 가령 청바지를 입고 인문학을 강의한다든가, 교양 독서목록에 최신 문학작품을 집어넣는다든가 하는. 트릴링 등은 그런 태도에 대해서 자주 비판적이었다는 것. 그런 보수적 태도와 '불온하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disquietingly'는 내가 읽기엔 '걱정스러울 정도로'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disquietingly'는 앞에 나오는 'spoke'에 걸린다(로카드님이 지적해주셨다). 

다시 옮기면, "특히 트릴링 선생님을 비롯하여 몇 분은 자주, 심지어 걱정스러울 정도로 자유주의적 인문주의에 대해 비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또 대학 동료나 학생들이 생각하기에는 전문용어 들먹이기나 같잖은 전문가주의와는 거리가 먼, 가장 풍요로우면서도 가장 강렬한 인문주의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흠, 이젠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인문주의적 삶'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드문 것 아닌가 싶다(전문용어나 들먹이면서 같잖은 전문가 행세를 하는 이들은 드물지 않지만)... 

08. 0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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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8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8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ose가 perspectives and traditions를 받는 대명사고 그 뒤의 thought는 분사인가요?

로쟈 2008-08-18 23:23   좋아요 0 | URL
네, 명사라면 복수형이 와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