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 출간됐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산책자, 2008). 중량급 학자들의 대담이어서 눈길을 끈다. 주제도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가 아니라 '민족-국가(네이션-스테이트)'다. 내주에 개최되는 세계철학대회에 버틀러가 못 오게 된 걸로 아는데, 이 대담집이라도 출간되어 다행스럽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07. 26) 국가, 극복할 것인가 지켜낼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사진 위)와 가야트리 스피박(아래)은 페미니즘 이론 영역에서 가장 왕성한 지적 생산력을 보여주는 여성 학자들이다. 버틀러가 동성애자로서 퀴어이론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면, 스피박은 인도 출신으로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모로 통한다. 두 사람의 학문활동을 관찰하면, 페미니즘 이론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론적 지반에 다소 차이가 있는 이 두 사람은 페미니즘 담론 내부의 경합적 관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는 이 출중한 학자들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열다섯 살 아래인 후배 버틀러가 먼저 발제 성격의 문제제기를 한 뒤 두 사람이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대담은 2006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어바인 캠퍼스의 비교문학과에서 ‘전지구적 국가, 전지구적 상태’를 주제로 삼아 연 학회에서 이루어졌다. 제목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이 대담의 내용은 페미니즘 이론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지구화 시대의 국가’라는 인류적 차원의 문제를 페미니스트적 감성으로 포착하고 있다. 특히 이 대담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흔히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로 번역되는 네이션 스테이트(nation-state) 문제다. 여기서 네이션(국민·민족)이 문제인 것은 어떤 기준에 따라 특정 집단을 네이션으로 포섭하고 그 기준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이 네이션 체제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대담의 주제가 된 것은 그 시점에서 벌어진 사태와 관련이 있다. 2006년 4월 미국 전역에서 ‘미등록 이민자’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돕거나 고용하는 사람들까지 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이 법안을 규탄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캘리포니아에서는 수십만명의 라틴계 이민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이민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 더 중요하게는 이들이 미국 국가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불렀다는 사실에 버틀러는 주목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자신들에게 추방·배제·박탈을 안겨준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통상적인 좌파적 관념이라면, 이런 상황을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자발적으로 말려들어간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버틀러는 그런 통념과는 다른 적극적 이해를 모색한다. 네이션 스테이트의 틀에 균열을 냄으로써 그 틀을 극복할 전망을 언뜻 보여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수행적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힙니다.” 버틀러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빌려, 자유는 자유의 요구, 자유의 수행 자체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자신들을 추방하는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말로 부름으로써 그 국가의 의미를 바꿔버리는 이 모순적 사태야말로 어떤 전망을 보여준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그 노래는 언어적 다수집단에 대한 비판이고, 언어적 다수집단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이며, 민족을 단일한 개념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다문화주의의 한 방식입니다.”

이때 버틀러가 국가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대담 내내 버틀러는 국가를 곧 ‘네이션 스테이트’로 인식한다. 국가란 근본적으로 국민/비국민을 나누는 배제와 분리를 존재 방식으로 삼고 있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 국가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가 버틀러의 고민이자 질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피박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낸다. 스피박이 보기에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발호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하는 장치로 국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시민주의는 어찌 보면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어울리는 이념일 수 있다. “국가는 우리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최소한의 추상적 구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재분배의 도구가 돼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착취·수탈·불평등을 막아내고 교정하는 기능을 국가가 수행할 수 있으며, 그런 기능을 수행하도록 국가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가 국가의 박탈·추방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면, 스피박은 국가의 저항 거점 성격을 강조하는 셈이다. 대담 말미에 버틀러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력으로서 자기창조”에 관해, 다시 말해 혁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만약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고통받았기 때문이고, 비판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서로 뭉쳤기 때문이며, 역사와 분석에 기반해 연대를 구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피박도 이 설명에 동의할 것이다.(고명섭기자)

08. 07. 26.

P.S.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란 주제와 관련하여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와 니시카와 나가오의 <국경을 넘는 방법>(일조각, 2006)이다. 두 사람 모두 '네이션' 문제에 골몰해온 일본의 비평가이고 학자이다. 안 그래도 <세계공화국으로>는 다시 손에 들었는데, 니시카와의 책도 조만간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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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26 23:14   좋아요 0 | URL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무시하면 바보취급하지말라! 우리도 천황폐하의 신민이다. 이렇게 무시해도 되느냐!하고 한마디 하면 상대가 조용해졌다는데,스페인어로 미국국가를 부르는 것도 그와 비슷한 것 같네요.억압하는 사람들의 논리로 오히려 공격하는 지혜...다소 서글프기는 하지요.

로쟈 2008-07-27 16:30   좋아요 0 | URL
다소 서글프면서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