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나온 주목할 만한 전기 두 권은 쿠바의 혁명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의 (구술)자서전 <피델 카스트로 - 마이라이프>(현대문학, 2008)와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위원 타리크 알리의 '60년대 좌파 실록' <60년대 자서전>(책과함께, 2008)이다. 두 권 모두 두툼해서 당장에 읽을 여유는 없고 리뷰만을 우선 챙겨놓도록 한다. 직장인이라면 5월 연휴 기간에 손에 들어볼 수도 있겠다.

한겨레(08. 04. 19) 반세기 혁명인생, 난 아직도 목마르다

“그는 언제나 혁명을 한다.” 100시간에 걸쳐 피델 카스트로(82) 전 쿠바 국가평의회장의 머릿속에 집약된 혁명의 기억을 함께 풀어낸 인터뷰어는 말한다. “그는 항상 생각하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한다. 그는 정신적으로 매우 과감하다. 그래서 거대하지 않은 생각들은 그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이렇게 그는 “언제나 혁명을 한다.”

<피델 카스트로-마이 라이프>는 프랑스의 권위 있는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이냐시오 라모네가 2003년 1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100시간 동안 피델 카스트로를 인터뷰한 기록이다. 인터뷰 질문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구석구석 훑어낸다. ‘말로 쓰인’ 자서전인 셈이다. 건강이 악화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지난 2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좌를 넘겨준 카스트로가 “자서전을 쓸 생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는 점, 그가 지난 50년 동안 긴 인터뷰를 네 번밖에 안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은 “국제정치의 마지막 ‘거룩한 괴물’”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듯싶다. 책은 15개국 언어로 번역됐다.

라모네가 가까이서 본 피델의 성품은 “매우 수줍고 교양이 있으며 신사적”이었지만 “본능적인 위반자”이며 “영원한 반항아”였다. 말의 영역에서는 “풍부한 논증을 바탕삼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놀라운 수사적인 말솜씨”를 휘두르는 “무섭고 유식한 논객”이기도 했다.

700여 쪽에 이르는 이 두툼한 책은 1868년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의 무장봉기에서 시작된 쿠바 독립투쟁의 원류로부터, 카스트로 이후의 쿠바까지를 카스트로의 생애와 단단히 엮어낸다.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8월13일 쿠바 동부 지방의 시골 농장에서 태어났다. 알려진 대로, 그는 스페인에서 건너와 자수성가해 제법 큰 땅을 소유한 농장주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부족한 것 없이 자랐을 그가 회고하는 어린 시절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대도시에서 교육받아야 한다는 부모의 신념에 따라 여섯 살 때 산티아고에 있는 어느 선생님 집에서 2년을 보내는데, 그곳에서 그는 뜻밖의 ‘착취’와 소극적 ‘학대’를 경험한다.

식구는 많고 돈 벌 길은 막막했던 선생님 집은 오직 카스트로의 부모가 보내오는 체제비로 살림을 꾸렸다. 선생님은 카스트로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 그는 부모와 똑 떨어져 덧셈·뺄셈 따위가 적힌 공책 표지를 혼자 들여다보며 배를 곯았다. “나는 부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착취의 희생자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모든 종류의 학대에 반발”하는 반항아 기질을 길렀다고 회상한다.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착취를 경험했던 인생의 아이러니가 가난하고 모욕당하는 자의 괴로움, 반항 정신과 투쟁의 필요성을 깊이 각인시켰다.

청년기에 카스트로는 쿠바의 독립전쟁에 관한 책과 훗날 그의 혁명적 영감의 원천이 되는 쿠바의 혁명가이자 시인·철학자인 호세 마르티의 책들을 탐독한다. 쿠바의 명문 아바나대학 법대에 다니던 시절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들을 읽었다. 1953년의 몬카다 병영 습격, 망명지 멕시코에서 이뤄진 체 게바라와의 만남,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악지대에 근거를 두고 벌인 게릴라 전투를 거쳐 1959년 혁명에 성공하기까지의 긴 여정에서, 호세 마르티는 혁명의 윤리가 됐고, 마르크스와 레닌은 혁명의 나침반이 됐다.

‘인류 해방의 염원을 이룩했다’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라모네의 질문은 좀더 날카롭게 혁명 뒤의 쿠바를 해부한다. 그는 혁명 쿠바에서 이뤄진 공개재판과 처형이 “과했다”는 지적을 파고들고, 혁명 초기 동성애자들에게 억압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했다는 비난을 들춰낸다. 이어 쿠바가 남성우월주의 국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국가 고위층에 아직도 흑인이 별로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종교를 박해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쉴 새 없이 질문한다.

 

 

 

 




 

 


여기에 카스트로는 “혁명이 승리했지만 인종차별 현상에 상당히 무지했다” “남성우월주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등 일부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혁명의 총체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방어한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가질 수 있었던 꿈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룩했다”고 말한다. “처음에 우리는 몽상가였는데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혁명과 함께한 80년 삶을 복기하고 난 그가 바라보는 쿠바의 미래는 근거 있는 낙관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근거는 ‘총체적이고 완전한’ 문화를 지니고, 끊임없이 지식과 경험을 축적해온 쿠바의 인적 자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낙관이 쿠바의 현실을 얼마나 냉정하게 들여다본 결과인지 가늠해 앞날을 꾸리는 것은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됐다. 다만, 그의 생을 바친 쿠바의 미래에 대한 낙관은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와 들어맞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하는 시대에 그는 여전히 ‘혁명의 무상 수출’을 꿈꾼다.

“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배고픔으로 내모는 체제입니다. 속임수와 거짓말 속에서 사는 것이고, 이기주의의 씨를 뿌리는 것이며, 소비주의를 만드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곱절로 증식될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작권이나 특허권을 바라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곳에서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만 있다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겁니다.” (김일주 기자)

한겨레(08. 04. 18) '68혁명’의 시대에 누가 못질을 하랴

“1967년 10월12일, 상쾌하고 맑은 런던의 가을날이었다. 우리는 최초의 대규모 베트남 관련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두 번의 집회에서 발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가디언>은 볼리비아에서 체(게바라)가 죽었다는 뉴스를 리처드 고트 특파원의 기사 및 시신 사진과 함께 실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울었다. 상실감과 슬픔이 너무 커서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고 반응했다.”

파키스탄 출신으로 영국에 망명한 뒤 1960~70년대 ‘68혁명’의 주요 현장들을 누볐던 <뉴 레프트 리뷰> 편집위원 타리크 알리(65)는 자신이 쓴 <1960년대 자서전>(Street-Fighting Years: An Autobiography of the Sixties. 책과함께 펴냄)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 케네디 암살 당일과 비교하면서 체 게바라가 죽던 날을 그렇게 떠올렸다. 베트남을 방문한 적 있는 체는 죽기 전 “베트남을 구체적으로 돕기 위해 새로운 전선을 열어서 제국주의 관심을 인도차이나에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몸소 실천하기 위해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에 가 있었다.

미국은 50만의 군대와 최신 군사기술을 동원했으나 전쟁에서 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촉발된 미국내 반전운동이 세계를 휩쓸었다. 미국의 베트남 군대 파견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장기집권을 보장받은 군사정권이 ‘3선개헌’ 공작에 분주하던 한국 같은 나라는 오히려 예외적이었다. “모든 대륙이 변화의 욕망에 사로잡혔다. 희망이 넘쳐났다.” 타리크 알리가 말한 그 “전지구적 반란”에서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은 전세계를 분기시킨 핵심이슈였다.

1968년 2월 베트남연대 캠페인(VSC)이 주최한 반전집회 베트남 총회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벨기에 마르크스주의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미국이 몇 년 내에 패배할 것이라며 그것은 “디엔비엔푸보다 더 큰 패배가 될 것”이라고 점쳤다.

3월 프랑스 빈민가의 낭테르대학에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됐다. 사회학도 다니엘 콘-벤디트가 이끈 ‘3월22일운동’은 “우리는 자본의 감시견이 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한 리플렛 수십만장을 뿌렸다. 5월 메이데이 직후 학생들이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베를린 등 전유럽으로 삽시에 퍼진 그 운동의 핵심 메시지를 사가들은 반권위주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문화혁명’으로 정리했다.

 

 

 

 



 

 

 

올해는 바로 68혁명 40돌이 되는 해다. 타리크는 지난 1월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때 실용주의를 주장하면서 전면적 변혁을 주장한 혁명가들을 비웃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도로 비웃어 주었다고 말했다. “당신들은 낚싯줄은 보지 않고 미끼만 보는 물고기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물질적인 소유가 아니라 타인-빈민과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일부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경제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해 규제되고 재조직될 필요가 있으며,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절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는 묻는다. 1968년의 꿈과 희망, 그 모든 것은 게으른 환상이었던가? 운동의 열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워싱턴 컨센서스가 신자유주의적 디스토피아를 체현”한 시대가 됐다.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세계는 다시 한번 뒤집혔다. 자본의 지배에 대한 대안이 하나하나 무너지면서 자본과 자본의 숭배자들은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승리를 축하했다. 좌파에게 그것은 역사적 몫의 패배였다.” 그가 서문에서 지난해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우파 사르코지가 ‘68년의 관에 마지막 못질을 한 것’이라고 자화자찬한 얘기를 인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르코지마저 자신의 승리를 68혁명에 빗대어 평가할 만큼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도 그만큼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역자 안효상씨는 이를 “모든 혁명은 실패로 끝나지만, 어떤 효과를 남긴다는 점에서 모든 혁명은 성공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거리에서 싸우던 나날’이란 원제가 시사하듯 저자는 줄곧 68운동(1967~75년) 현장에서 학생과 언론인, 전문활동가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콩고의 선출된 지도자 파트리스 루뭄바가 유엔과 미국의 공모 아래 권좌에서 쫓겨나 피살당한 데 항의하다 조국에서 사실상 쫓겨나 영국 옥스포드대학에 들어간 이후 유럽뿐만 아니라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와 남미, 모스크바 등 그를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당대의 리더들을 만나고 연설하고 조직했으며 썼다. 일관된 시각 아래 체험에 토대를 둔 유럽 변혁운동의 구체적 에피소드들을 풍성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개인 자서전이 아니라 1960년대라는 한 시대의 자서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한승동 선임기자)

08.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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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0 22:32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민주화 투쟁가들이 여전히 권위주의를 못 벗어난 원인은 68혁명 같은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이 따지고 선후배 따지고...근데 알리가 트로츠키 주의자인가요?

로쟈 2008-04-21 10:13   좋아요 0 | URL
68혁명도 사실 '실패한' 혁명이죠. 그건 러시아혁명이나 쿠바혁명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보다 못하다면 문제죠...

노이에자이트 2008-04-21 23:40   좋아요 0 | URL
실패라도 좋으니 우리 사회의 수직 서열 충효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항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클린턴이 카스트로와 정상회담한 적이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