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준비 때문에 읽게 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작년 경향신문에 연재됐던 '헤르메스의 빛으로'의 한 꼭지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관한 것이다. 일견 졸렬해 보이는 아이네아스의 형상에서 새로운 영웅상을 읽어내고 있는데, 필자의 예시대로 <일리아스>의 영웅들과 대조해봄 직하다. 그리고 '비르투스(virtus)'와 '피에타스(pietas)'도.  

↑ 로마의 가부장 전통(pater familias)을 표현한 조각상. 가운데 중심 인물이 아이네아스이고, 어깨 위에는 아이네아스 가문의 신주(神主)를 든 아버지 앙키세스, 뒤에는 아들 아스카니우스다. 로렌초 베르니니가 1618년부터 2년에 걸쳐 완성했다(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경향신문(07. 02. 09) [헤르메스의 빛으로](6) 새로운 영웅 아이네아스의 탄생

"기억하라! 로마인이여, (굳건한 기강 위에 세워진) 국권의 힘으로 인민들을 다스리는 것, (이것은 너희들만의 기술일진저!), 평화의 법도를 수립하는 것, 곧 순종하는 자에겐 관용을, 오만한 자에겐 징벌을 내리는 것을('아이네이스' 제6권 851~53장)." 이는 제우스가 아버지 앙키세스의 입을 통해서 로마의 건국 원조인 아이네아스에게 내린 천명이다. 로마식 '평천하(平天下)'선언이다. 이 '평천하'를 수행할 인물에 대해서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년)는 작품 '아이네이스'에서 그의 첫 등장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중략)온 바다가 심연의 밑바닥으로부터 뒤집히면서 일으킨 거대한 파도를 바람들이 해안으로 거세게 몰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비명을 내지르고, (돛을 지키는) 밧줄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일순간에 먹구름이 덮쳐 트로이인들의 눈에서 하늘과 낮을 강탈해 가고, 암흑이 바다를 뒤덮는다. 하늘을 찢을 듯한 천둥과 창공을 불태울 듯한 번개가 번쩍이면서 눈앞에서 일렁이는 죽음을 선원들에게 몰아대는데, 순간 아이네아스는 공포에 질려 사지가 풀려버리고, 절망의 통성(痛聲)과 함께 하늘의 별들을 향해 두 팔을 뻗어 올린다('아이네이스' 1권 84~94장)."

데뷔 무대치곤 너무 초라하다. 울고 있는 아이네아스의 모습은 영웅으로 보기에는 너무 졸렬하다. 유사한 상황에서 하늘에 대고 포효를 내지르는 그리스의 영웅 아이아스를 보라! 죽는 것은 무섭지 않으니 암흑이 아니라 광명천지에서 장렬하게 전사토록 해달라고 제우스에게 대드는 아이아스를! ('일리아스' 17권 645~47행). 이에 반해 아이네아스는 여느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울면서 징징거리고 있다. 용기와 평정심을 가지고 상황을 진두지휘해야 할 사람이 말이다. 이런 그를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 영웅답지 못한 그의 모습은 이것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 크레우사도 지키지 못했고,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내였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pietas erga parentem)' 때문이라 하지만, 어쩐지 궁색해 보인다. 어쨌든 파파보이(papa-boy)였다.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와 비교해보라! 소위 자신의 '왕의 남자'인 파트로클로스가 전사하자,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전투에 나선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불멸의 영웅이다. 이렇게 영웅이란 지켜주어야 할 것을 지켜주고 소중한 것을 위해선 모든 것을 걸 줄 알아야 한다. 이 기준에서 볼 때 로마의 아이네아스는 자격이 한참 모자라 보인다.

↑ 가슴에 꽂은 비수를 아래로 떨구고 있는 여왕 디도와 이를 애절하게 지켜보고 있는 카르타고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과 글로 실은 필사본.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어쩌면 그리스식, 더 정확히 호메로스식 영웅의 기준에서 보면, '아이네이스'에서 진정한 영웅은 아이네아스가 아니라 오히려 여왕 디도일 것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으며 자신의 생명도 내던졌던 여인이었기에.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여왕 디도의 사랑이 과연 영웅적인지를. 그녀는 한 나라의 책임자다. 그녀 안에는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카르타고 인민과 카르타고가 그녀의 일부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존재가 아니고, 만인의 존재이다. 자신의 운명이 곧 국가의 운명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여왕으로서 그녀의 사랑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광기(furor)는 아닐까? 이 광기는 사랑의 감정만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 속였고, 자기 안의 다른 존재들도 자신의 일부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결국 그녀를 사로잡은 광기는 절제와 품위로 넘쳤던 한 여왕을 죽음으로, 조국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

반면, 아이네아스의 태도는 딱 파파보이의 그것이다. 그는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을 따른다. 아이네아스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라 한다. 나름대로 인간적인 번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종국엔 사랑을 배신한다. 아무래도 쏟아지는 비난을 모면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이를 염두에 두었는지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아스의 효심은 파파보이의 그것이 아니라 한다. 이 마음은 단지 생부 앙키세스만을 향하는 혈연적 사랑이 아니기에. 오히려 이 효심 안에는 멸망한 조국의 재건이라는 역사적 사명과 세계에 평화의 법도를 수립해야 하는 천명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이네아스 안에는 아이네아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 인민과 로마도 함께 있다. 이런 운명(fatum)의 인물이기에, 아이네아스는 자신에겐 황홀하지만 다른 만인에겐 참혹한 사랑의 달콤함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그들도 결코 남이 아니므로. 자식, 아버지, 아내, 형제, 친척, 친구, 로마의 인민으로서 자신들의 몫을 아이네아스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저울질이었으리라. 아이네아스의 선택은 자신만을 위한 사랑의 달콤함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의 몫에 대한 존중이었다. 이 존중을 로마인들은 피에타스(pietas)라 부른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에 대해서 자식이 부모에게 가져야 하는 마음, 효(孝)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나라가 인민에게, 인민이 나라에 대해서 가져야 할 마음, 곧 충(忠)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로마식 충효지심(忠孝之心)인 피에타스가 연인에 대한 사랑을 희생시킬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사회의 기본 원리인 남녀의 사랑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르길리우스가 피에타스의 확립을 위해 사랑을 희생시킨 데에는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러 답변이 가능하겠으나, 이런 해명도 가능하리라. "이곳은 사는 동안 형제를 증오하는 놈, 아버지를 두들겨 팬 패륜아,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피호민을 속인 귀족 떨거지들, 평생 돈만 알고 (행여 새지나 않나 두려워) 혼자서만 꿰차고 친척들에게 베풀지 않은 수전노(이런 족속이 제일 많은데)들, 간통 중에 걸려 맞아 죽은 (연)놈들, 칼과 창을 들고서 들어와선 안 되는 땅을 군홧발로 짓밟은 놈들, 주인을 속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놈들이 갇혀서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오('아이네이스' 6권 608~613행)."

이 대목은 지옥의 한 장면이지만, 실은 지상 로마의 현실이기도 하다. 온갖 잡범들과 법을 어기고서 군대를 로마로 끌어 들이고 있는 악한들로 가득한 지상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으로,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을 어떤 사람이 바로 잡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품성을 가져야 할까? 온갖 범죄로 가득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하는 책무를 지닌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이는 분명하다. 그것은 청춘남녀간 사랑의 정념이 아니라, 타인의 몫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할 줄 아는 법과 사람 사이의 관계(人間)를 정립해주고, 사람이 사람답게 처신하도록 해주며, 곧 예의를 회복시켜주는 복례(復禮)의 덕인 피에타스이다. 그것은 전쟁과 내전으로 사람이 짐승으로 떨어지고, 가족도 무너지고, 법의 강제력으로도 나라가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그곳을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고자 할 때 요청되는 내심(內心)의 명령이다.

칼을 외부의 적으로 향하게 할 때에 필요한 것은 용기(virtus)이다. 그러나 그 칼이 내부의 세계로 향하게 될 때, 그것은 광기(furor)로 변한다. 아무리 내부 세계가 지옥이라 할지라도 저 칼을 내부로 돌려선 안 된다. 복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폭력이 아니라 정신의 무기이기에. 베르길리우스는 그 무기로 인내와 관용이 결합된 피에타스를 제시한다. 보기에 지저분하고, 하는 일이 일사천리로 시원스럽게 진행되지 않는다 해서 한 판에 싹쓸이해야 한다는, 한 번에 다 씻어내야 한다는 조급증은 이럴 때에 가장 위험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조급증의 소유자는 이런 상황에서 칼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이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그 사회는 내전(bellum civile)이 시작된다. 기원전 80년 술라 독재의 로마를 봐라! 정신의 무기는 그 효과가 당장 드러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정신의 무기, 곧 인문 교양이 필요한 단계로 접어든 사회는 따라서 더딤과 답답함을 견딜 줄 아는 법을 요구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속전속결을 요구하는 전쟁터의 영웅에게는 더욱 그러하리라.

이런 이유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아스를 호메로스식 전쟁 영웅에서 인내와 관용의 인물로 탈바꿈시킨다. 더디고 답답해 보이는 지도자로 말이다. "'오 동료들이여, (중략)자네들은 이보다 더 험한 것도 겪지 않았소. (중략)자! 그러니 탄식과 두려움일랑 떨쳐 버리고 용기를 냅시다! 이 고생도 언젠가는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오. 비록 다양한 고난에 부딪히면서 숱한 험로를 지나고 있지만 우리는 라틴 땅으로 향하고 있소. 운명이 우리에게 보장한 안녕(安寧)의 땅으로 말이오. 그곳에 트로이를 재건하는 것이 우리의 천명이오. 견디시오. 장성하게 뻗어 나갈 나라를 위해서 당신 스스로를 지키시오.'

아이네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산더미 같은 걱정에 짓눌려 견디기 힘들었지만 얼굴로는 거짓 희망을 지어 보이면서, 가슴 저 깊은 곳으로는 고통을 억누르면서 말이다('아이네이스' 1권 198~206장)." 자기도 견디기 힘든 것을 남에게 견디라고 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영웅이 아니다. 뭐 하나 해결해 주지도 못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고초를 통해서 형성된,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법이 그의 내면에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된다. 이 법은 인고의 세월을 통해 언젠가는 얻게 될 결실(로마의 '평천하')을 위한 기본 원리로 작동한다.

이 점에서 그는 새로운 영웅(heros novus)이다. 그는 자기를 견딜 줄 아는 극기(克己)의 영웅이다. 극기의 힘은, 그것이 힘이라는 점에서 외면의 용기와 다르지 않다. 같은 힘이다. 외부로 향한 용기가 내면으로 승화된 힘이 극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화는 쉽지 않다. 여기엔 저 숱한 견딤의 세월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견딤을 통해서 마침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 곧 예의를 회복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 길을 열어 준 사람이 아이네아스이다. 즉, 그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영웅이고, 이를 통해서 로마의 '평천하(平天下)'를 가능케 했다. 물론 로마의 '평천하'가 군대의 힘과 외면적 용기에 의지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근본에 자리 잡고 있는 힘은 로마인의 내심에서 작동하고 있는 '극기복례'의 원리인 피에타스일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도 않았고,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8. 03. 24.

 

 

 

 

P.S. 어제 도서관에서 <아이네이스>(도서출판숲, 2004)를 대출했다. 지금은 절판된 소프프카바인고, 작년에 하드카바로 새로운 판이 나왔다. <일리아스>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네이스>의 경우에도 몇 개의 번역본이 있는데, 라틴어 원전 번역은 천병희 선생의 <아이네이스>(도서출판숲, 2004/2007)가 유일하다(이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15514 참조). 김명복 교수가 영어본을 중역한 <아이네이드>(문학과의식사, 1998)가 10년전에 나왔었고, 오스트리아 작가 아우구스테 레히너의 각색본을 옮긴 것이 <아에네이스>(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 등은 인터넷에서 쉽게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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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5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25 08:26   좋아요 0 | URL
네,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