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을 다룬 "시조차도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12887)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역사에 대한 철학의 무관심이 18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전통을 지배했다고 했는데, 여기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이었다. 이 두 역사적 사건은 현재가 과거와 근본적으로 단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철학은 이성이 본질적인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철학이 역사와 좀더 능동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23쪽)

 

 

 

 

그리하여 보수적인 성향의 칸트조차도 "과거의 권위를 비롯한 모든 권위에 맞서 개인들에게 자기 독립심을 부여하는 혁명적 정신을 찬양했다. 칸트를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의 자기 확신이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했는데, 왜냐하면 이성만이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사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칸트와 계몽철학자들의 인식은 아직 철저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단지 인간 종에 속함으로써 모든 개인들이 갖게 되는 하나의 정신적 능력일 따름이며, 이성의 힘은 역사의 우발적 사건들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역사에 대해서 초월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What if?)'라는 역사에 대한 가정법, 혹은 '대체역사'는 아마도 '역사 이후의 이성' 혹은 '역사 바깥의 이성'에 가장 잘 상응하는 사례일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연쇄에서 오직 한 가지 변수만을 분리해내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를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대체역사의 전제는 역사를 마치 물리학에서의 사고 실험 대상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행은 그러한 가정/대체의 불가능성과 상관적인 게 아닐까. 그것은 '역사 바깥의 이성'으로부터 '역사 속의 이성'으로의 이행이다.

"칸트 이후 단지 한 세대가 지난 다음에, 헤겔은 이성 그 자체가 역사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역사와 철학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최후의 일보를 내디뎠다. 헤겔에게 이성은 모든 인간이 구비하게 되거나 또는 자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추상적인 정신적 능력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파생되는 결과는 무엇인가? "만약 생각하는 능력이 시간과 문화에 의해 지속적으로 형성된다면, 역사에 대한 연구만이 우리의 본성과 세계속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 그 자체는 역사-의존적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철학을 제외하면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23-4쪽) 즉, '역사적 인간'은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라 조건 자체이다.  

역사와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바로잡게 된다면 자유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만약 이성이 역사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합리적 행위자가 자신을 자율적 단위로 경험할 여지가 있"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이 입장에 대한 헤겔의 반응이나 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롯하여 헤겔을 따랐던 사람들의 반응은, 그것이 허구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허구적인 생각'은 'illusory conception'의 번역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그 입장은 표면 아래에 있는 심층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으며 또한 개인들이 왜 그러한 선택을 하는지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택은 개인들이 모든 종류의 자원들, 즉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심리적, 종교적, 기술적 자원들에 전급할 수 있는가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그 시대의 지배적 힘에 종속되게 만든다."(24-5쪽)

이에 따른 결론: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는 믿음은 다음과 같은 것을 함축한다. 외부의 힘과의 영구적인 절충을 통해 개인의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깨달을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따라서 자유는 우리가 이러한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정도에 의해서 평가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힘이 우리를 통제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은 9.11의 의미에 대한 공적 토론에 기여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해야 할 책임도 있다."

08. 01. 12.

P.S. 예전에 책을 읽으면서 빼놓았었는데, 보라도리의 서론 '테러리즘과 계몽주의의 유산'은 잘 씌어진 글이다. 하버마스와 데리다 철학의 '입문'으로서 간략하면서도 요긴하다. 해서 몇 차례 '브리핑'을 시도해볼까도 한다. 우선은 '공적 참여의 두 가지 모델'에 관한 절을 브리핑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는데(이 절은 저자가 한권의 책으로 발전시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전에 역사와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 지난번에 미진하게 끝내놓은 듯해서 마저 정리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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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cinema 2008-01-13 09:55   좋아요 0 | URL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1-13 09:59   좋아요 0 | URL
덕분에 한번 더 읽어보고 오타들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