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마지막 '경이'는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이다. <채플린 - 나의 자서전>(김영사, 2007)가 문제의 책인데, 국내 최초의 완역판이어서 분량이 1,000쪽이 넘는다(이 책에 견줄 만한 건 작년에 나온 패트릭 맥길리건의 <히치콕>(을유문화사)이나 세르주 투비아나 등의 <트뤼포>(을유문화사) 정도이다. 물론 이 두 권은 자서전이 아니지만). 물론 그 부피에 걸맞은 삶의 곡절들이 갈피마다 숨어 있을 터이다. 관련기사를 옮겨놓고 몇 가지 코멘트를 덧붙인다.

 

한국일보(07. 12. 22) '희극광대' 찰리의 위대한 비극

콧수염, 헐렁한 바지, 커다란 구두, 지팡이, 중산모를 쓴 우스꽝스러운 거지신사의 모습으로 대공황기의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찰리 채플린(1889~1977). 채플린이 자서전을 쓰고 있던 1960년대초 한 여류소설가는 “당신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를 가졌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4번의 결혼과 수많은 스캔들로 점철된 채플린의 여성편력을 의식한 궁금증이었던 것. 그러나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나는 프로이트의 주장과 달리 섹스가 인간의 복잡한 심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위, 배고픔, 그리고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 등이 한 사람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는다.

<키드> <모던타임스> <황금광시대> 등 무성영화사를 수놓을 만한 탁월한 작품을 통해 백만장자가 됐지만 채플린의 예술적 자양분은 유년시절의 치욕적인 가난과 혹독한 불행이었다. 연극배우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채플린의 생후 1년 만에 갈라섰고, 술독에 빠져살던 아버지는 서른 일곱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유능한 가수였던 어머니도 후두염 때문에 무대생활을 접어야 했고 정신병에 걸려 병원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소년들처럼 런던의 빈민구호소를 들락날락하던 채플린은 5세 때부터 무대에 서야 했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잡화점 심부름꾼, 진료소 청소부, 인쇄소 직공 등을 전전해야 했다. 성공한 인물들 이면에는 가난과 불행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채플린의 위대함은 그것을 유머로 승화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채플린- 나의 자서전>이 처음으로 완역됐다. 번역본의 분량이 1,0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만큼 작품세계 이외에는 잘 알 수 없었던 채플린의 사랑, 성공과 실패 등 사생활과 공생애의 전반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그의 말이 대변하듯 비극을 유머로 극복하고 그것을 예술로 환치시킨 채플린의 낙천적 세계관을 확인하고 거기서 생에 대한 힌트를 얻어낼 수 있다면 책 두께만큼의 충분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의 미덕이라면 휴머니즘으로 귀착되는 자유주의적 철학을 육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2차대전 중 독일과 싸우고 있던 소련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자는 연설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오인 받아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미국에서 쫓겨나지만, 실상 정치적 이념은 강력한 반(反) 파시즘이었다.

나치 같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물론이고 파시즘의 질료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심지어 애국주의에 대해서조차 비판적이다. 그는 애국주의에 대해 “햄버거나 코카콜라 같은 지엽적인 습관에 길들여지고 학습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맹목적으로 고국을 사랑하고 충성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요구는 나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유성영화시대에 들어서도 그가 히틀러를 풍자하는 <위대한 독재자>(1940) 같은 명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철학이 뒷받침 됐기 때문일 것이다. 풍부한 사진자료와 처칠, 사르트르, 흐르시초프(*흐루시초프), 카잘스, 아인슈타인 등 그가 만났던 20세기의 명사들에 대한 품평을 엿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1964년작.(이왕구기자)

07. 12. 22.

P.S. 한편으로 어제 잠시 들춰본 벤야민의 책에도 채플린 얘기가 나온다. 이번에 나온 선집 중 한 권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 수록돼 있는데, '채플린'이란 짧은 글 외에도 '러시아 영화예술의 상황에 대하여'에 '러시아 채플린'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눈길이 갔다. 러시아에 좋은 외국영화들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빚어지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벤야민은 이렇게 덧붙인다.

"러시아의 개별 예술가들에게는 여기서 비롯되는 관중들의 무지가 편리한 측면이 있다. 일진스키는 채플린을 매우 부정확하게 모방하여 작업하면서 오로지 채플린이 러시아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희극배우로 통하고 있다."(228쪽)

'일진스키'는 역주에 Igor Vladimirovich Iljinsky(1901-87)로 소개되고 있는데, '일진스키'가 아니라 '일린스키'로 읽어야 한다(표기의 'j'는 'y'와 호환되는 반모움이다). 즉 벤야민이 언급하고 있는 희극배우의 이름은 '이고르(이고리) 일린스키'이고 1927년에 젊은 배우였던 일린스키는 이후에 국민배우로 성장한다(내게도 굉장히 낯이 익은 배우이다). 그가 '러시아의 채플린'이었다는 것. 

마야코프스키의 <빈대>(1928)와 메이에르홀드가 연출한 고골의 <검찰관>(1926)에 출연하기도 했던 일린스키의 영화데뷔작은 유명한 소비에트 SF영화 <알리에타>(1924)였다. 내가 인상적으로 보았던 일린스키는 엘다르 랴자노프의 데뷔작인 뮤지컬 코미디영화 <카니발의 밤>(1956)에서의 일린스키다(해빙기를 대표하는 영화의 하나다). 해빙기 청춘남녀의 사랑과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를 다룬 이 영화에서 일린스키는 고루하면서도 코믹한 관료로 등장한다(http://www.youtube.com/watch?v=Rss5fhpEo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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