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인에 실린 칼럼(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6)을 옮겨온다(실명 칼럼이다). 시사인에도 가끔 북리뷰를 싣기로 했는데, 첫번째 책으로 내가 고른 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이다. 당초 '중학생도 읽을 수 있는' 글을 청탁 받았지만 적어도 고등학생은 돼야 읽을 수 있을 듯하여 원고를 보낸 후에 찜찜했었는데(가령 '헤게모니의 봉사자'가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말끔하게 편집되어 있어서 그런 찜찜함을 씻을 수 있었다. 기사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편집담당자가 집어넣은 사르트르의 사진이다. '사팔뜨기 사르트르'의 모습이 지식인의 이중적 정체성을 대변해주는 듯해서. 우리 주변에서 갈수록 '사팔뜨기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시사인 11호(07. 11. 26)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에 관한 ‘고전적’ 정의는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1966년 일본 강연에서 내린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분명 비난의 어조를 담고 있는 부정적 정의이지만 사르트르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란 어떤 명분을 내걸면서 사회와 기존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전문가로서 자신의 명성을 ‘남용’하는 부류들이다(예컨대, 번듯한 직함을 달고서 이런저런 지면에 칼럼을 ‘남발’하는 자들이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은 이런 부류의 역사적 운명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한 상념에 한 가지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지식인의 종언’ 담론이다(그리고 최근 한 변호사의 양심 고백이다). 그것이 유행어가 되었다면 이제 지식인이란 부류가 역사의 무대에서 모두 퇴장했거나 퇴장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일까? 일견 그런 듯 보인다. 한데 이 종언의 사태를 부추기는 것이 자신의 명성을 남용할 수 없을 만큼 지식인들의 형편이 더 열악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두둑해졌기 때문이라면? 오늘날 지식인의 입을 막는 국가의 손은 더욱 커지고 자본의 발은 더욱 넓어진 것처럼 보인다면? 



다시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본성적으로 약자’였다. 그 자신이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않기에 경제 또는 사회 권력을 갖지 못하며 따라서 지식인이란 ‘무능하고 불안정한 자’이다. 지식인은 일단 기식인이다. 하지만 지식인의 도덕주의와 이상주의는 그러한 무기력한 상황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진단이다. 그가 말하는 ‘무기력한 상황’이란 무엇인가? 지배 계급에 대한 예속적 상황이다.

양심선언은 지식인 시대의 흔적

지식인은 ‘실천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이지만 이런 전문가가 모두 지식인이 되는 건 아니다. 즉 그러한 전문가가 되는 것은 지식인의 필요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다. 지배 계급은 ‘실천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 두 가지 역할을 가르치고 강요한다. 하나는 지배적 헤게모니의 봉사자의 역할이고, 상부 구조의 관리자 역할이 다른 하나다. 즉, 이들에게는 지배 계급의 가치관을 전파하면서 그와 대립되는 가치관은 타파하는 기능이 부과되는 것이다. 지식인이란 이러한 예속적·기생적 상황에서 탈피하여 ‘숙주’로서의 지배계급에 반기를 들고 저항할 때 탄생한다. 알다시피, 이러한 반항의 신화적 형상이 프로메테우스이며, 지식인의 시대는 그러한 프로메테우스들의 시대였다. 

하지만 오늘날 상황은 달라진 듯하다. 지식정보사회, 지식경영시대의 지식인은 더 이상 ‘불만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적어도 ‘지식 자본을 가진 자’로서 새롭게 규정되는 지식인은 ‘단지 봉급으로만 생활하는 자’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들의 허세는 언제부터인가 위세가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지식인의 종언’은 지식인의 불우한 처지가 아니라, 배부른 처지를 이르는 말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는 ‘실천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은 점점 더 발을 빼기가 어려워진 시대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무겁다.” 

사실 지식인의 사회적 위치는 모호했다. 지배 계급도 아니고 피지배 계급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무능력하면서도 불안정한 위치의 ‘모호함’이 지식인의 계급적 토대였다. 하지만 오늘날 ‘지식 계급’은 단일한 대오가 아니다. 그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노동 계급이 단일한 대오를 구성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식인의 위치는 더 이상 모호하지 않으며, 각각의 지식분자들은 지배 계급이나 피지배 계급으로 분류된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약자’가 아닌 지식인, 혹은 ‘약자’가 아니고자 하는 지식인이 득세할 때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사회는 이들이 비워놓은 자리를 다만 ‘사이비 지식인’(혹은 ‘집 지키는 개’)들로 채워놓을 따름이다. ‘지식 계급’은 ‘지식층’으로 용해되고, ‘지식층’은 또 자연스레 사회 ‘지도층’으로 편입된다. 이것은 애도할 만한 일일까? 그나마 아직은 ‘양심 고백’과 ‘지지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지식인 시대의 흔적을 다행스러워해야 할까?

07. 11. 29.

P.S. 이번주 한겨레21에도 '한국 지식계의 위기'를 질타하는 기고문이 실렸다. 고세훈 고려대 교수의 '지식인은 아무도 없는가'(http://h21.hani.co.kr/section-021067000/2007/11/021067000200711290687029.html)이다. '지식계'란 용어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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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르트르를 발가벗기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1 23:45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고 나니 20세기 원조 지식인이라고 할 사르트르에 관한 평전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르트르 세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알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 역자는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 교수다. 968쪽에 달하니까 얼추 안니 코헨 솔랄의 세 권짜리 평전 <사르트르>(창, 1993)에 이어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2007-11-29 17: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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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9 2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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