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몇 차례 다룬 것이지만,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저작이 일년 사이에 지난 일년 사이에 3권이나 번역돼 나왔다. <우리시대의 비극론>(경성대출판부, 2006), <성자와 학자>(한울, 2004),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이 그 세 권의 책이다(<성스러운 테러>에 대해서는 두어 차례 페이퍼를 쓴 바 있다). 마침 연세대 대학원신문의 기획서평으로 '테리 이글턴 새롭게 읽기'가 다루어졌기에 자료삼아 옮겨놓는다(출처는 담비이다 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135). 개인적으론 지난 겨울에 읽지 못하고 미뤄놓은 <우리시대의 비극론>을 이번 겨울에 읽을 계획이다(사실 원서를 찾지 못해서 미뤄놓았었다). 관심있으신 분들도 서평을 빌미 삼아서 독서계획을 꾸려보는 게 좋겠다.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6호) '세련된’ 변증법이 아닌, 현실에 밀착된 변증법을 향하여

아일랜드 출신인 테리 이글턴의 첫 저서는 『망명자들과 이민자들: 근대 문학 연구』(1970)이다. 이 책은 제대로 된 20세기 영국문학은 영국 본토 출신 보다는 아일랜드 출신(제임스 조이스, 예이츠), 폴란드 출신(콘래드) 등 제3세계 출신이거나 영국 내의 제3세계라고 할 수 있는 빈한한 탄광출신 (D. H. 로런스)이거나, 미국에서 영국으로 귀화하거나(T. S. 엘리어트) 영국에서 미국으로 귀화 (W. H. 오든) 했던 작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문화주의가 횡행할 때에도 이글턴은 어디까지나 ‘우선적으로 계급과 민족을 거쳐서만’ 문학과 예술을 논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것이 이글턴적 맑스주의의 특이성을 구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노동계급 출신과 아일랜드 출신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70년대 중반은 이글턴이 한참 알튀세를 받아들여서 매우 ‘영국적인’ F. R. 리비스의 이른바 휴머니즘적 문학이론 및 비평을 비판하고 나서던 때였다. 『비평과 이데올로기』(1976), 『맑스주의 문학이론』(1976) 등이 이 시기의 저서이다. 그 후 『발터 벤야민, 혹은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1981)와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이론 등을 소개하는 『문학이론입문』(1983)을 쓰면서는 이전의 이른바 ‘과학주의적’ 비평에서 탈피하여 정치적 비평, 수사학적 비평을 주창하고 나섰다. 물론 이전의 작업에서 이미 ‘문학’과 ‘작가’의 아우라는 ‘생산’이라는 이름하에 탈신비화된 것이지만, 더 나아가 문학교육 및 연구제도 자체의 정치성을 전면화하면서 특히 ‘영문학’, ‘정전’ 등이 푸코적인 ‘권력’ 관계에 의하여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었고, 그 파급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비평을 표방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푸코 이래로 모든 것이 ‘이미’ 정치적임이 밝혀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정치적’ 비평은 ‘더’ 정치적이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질적으로 다른 ‘정치’를 말하는 것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정치적임을 계속적으로 주장해야 하는 것인지 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글턴이 이론적으로 명쾌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른바 헤겔주의적 혹은 아도르노적인 ‘정치성’(프레드릭 제임슨을 포함하여)은 ‘변증법’이라는 밤에 모든 대립을 해소해버린다고 비판하는 점에서,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저 계급적이고 민족적인 거친 현실, 그것을 직시하는 바로 그것이 정치라고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저 세련된 변증법이 밥 먹여주냐’라는 것이다. 이는 브레히트의 거친 진실, 혹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세속적’ 비평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가장 생존과 직결되는 이 너무나 ‘자명한’ 것들이 ‘이론’과 ‘언어’라는 이름으로 증발되기 일쑤라는 점 또한 이 후기 자본주의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성자와 학자』(1987)라는 소설은 풍자와 위트라는 수사학을 동원하여 아일랜드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는 한편, 그 참상이 참상임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언어가 갖는 한계의 문제를 다루고, 1916년 부활절 봉기의 현실과 그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이 과연 헛된 죽음인지 아닌지를 논구하고 있다. 미하일 바흐친의 형인 니콜라이 바흐친은 먹고 마시는 데 탐닉하는 그야말로 바흐친적(카니발적) 인물인가 하면, 동성애적 욕망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여기에 아일랜드 시민군 총사령관 제임스 코널리가 총살당하기 직전에 이들과 잠시 합류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코널리의 행위도 하나의 ‘언어 게임’이라고 주장한다. “그건 아마도 육체의 언어, 다시 말해서 죽음, 순교, 부활의 언어라고 부를 수 있겠죠. 다른 모든 언어를 번역해낼 수 있는 한 개의 순수한 언어요.” 이글턴의 결말에 의하면 코널리는 총살당함으로써 결국 하나의 언어로만 남지만, 그것은 “새 공화국의 탄생을 알리는 첫 울음소리”가 되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앞에서 통렬한 패배감에 사로잡힌다.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면 나는 끝장이다. 만약에 저 작자가 성공한다면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글턴은 실재 앞에서 언어는 무력하지만, 그 무력하다는 사실 또한 언어를 통해서 말해진다는 역설에 주목한다. 결국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그의 노력의 상당 부분은 부르주아 혹은 우파가 전유물로 사용하는 언어를 해체하고 탈환하는 작업에 쏟아진다. 이는 단순히 미학적, 혹은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학 및 문학을 적극적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은, 문학 및 문학제도를 탈신비화시키고 정전논쟁과 ‘문학에서 문화로’라는 슬로건을 촉발시킨 장본인이 어째서 과거의 미학이나 문학에 ‘집착’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셰익스피어나 콘래드를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구현되어 있다고 비판한 다음 내치기보다는 역사와 정치의 장으로 끌어내어 수사학적 설득의 자료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가 넘나드는 영역은 광범위하다. 철학, 미학, 역사, 소설, 시, 희곡 등 그가 ‘정치적’ 수사를 위하여 동원하는 언어와 텍스트의 집적체는 방대하고, 특유의 신랄함과 위트로 무거운 주제들을 적절하게 요리하여 전달하는 재능은 놀라운 바가 있다.



비극을 낳는 실재로서의 자본주의

『우리 시대의 비극론(원제:달콤한 폭력?비극의 사상)』(2003)은 비극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비극론에 대하여 반기를 든다. 비극의 핵심이 죽음, 순교, 속죄양, 정화, 부활 등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신화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고통당하고 죽음을 당하며 내쳐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하나같이 그 안에 역설을 포함한다. 죽음과 순교는 각자의 몫으로 일어나지만, 공동체의 생존과 재생에 관여하고, 그것은 다시 말해 그러한 죽음을 필요로 할 만큼 공동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포는 개개의 폭력적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죽음이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전지구적 체계 즉 실재 자체가 공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이글턴은 비극이란 치명적인 하마르티아를 가진 영웅적 인물이 운명적으로 몰락하되 실재에 대한 비전을 얻는 것이라는 식의 비극론에 내재한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비극을 지금 이 시대에 전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핵심을 지구적 자본주의의 작동에 없어서는 안 될 희생양들, 박탈당한 다수의 계급현실에 두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글턴의 수사적 전략을 읽어 본다면, 비극이라는 고급화되어 있는 장르의 핵심을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부여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이 계급에게 돌리는 한편, 이 비극을 낳는 ‘실재’로서의 자본주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헤겔적인, 더 변증법적인

『성스러운 테러』(2005)는 이 비극론의 연장선상에서 종교와 윤리의 문제를 좀더 적극적으로 다룬다.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하고 있듯이 윤리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한다는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해결이 가로막혀 있다는 징후일 수 있다. 이를테면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부르주아가 완전히 패권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전무하던 시대에 박애주의에 기초한 종교분파들이 극성을 부리던 것을 상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윤리의 언어를 먼저 장악하는 쪽은 지배계층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유와 정의와 평등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글턴은, 이 말들을 그냥 저들이 가져가 마음대로 쓰게 내버려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치 니체가 선악의 계보를 따라가서 그 계급적 성격을 밝혀내듯이 계보학적으로 추적하고 해체하여, 탈환해야 것은 탈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테러라는 말은 지배계급이 그 타자에 대하여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런데 계보학적으로 따져 올라가보면 (이글턴은 아감벤의 작업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것은 희생양이 가진 ‘성스러움’의 이면이다. 이 양면성이 서로 분리가 되면 희생을 위한 희생이 되어버리거나, 폭력을 위한 폭력이 되어버려 단지 죽음충동의 먹이가 되고 만다. 아니면 희생과 폭력이 도구화되어 버려 그 성스러운 성격을 잃고, 목적과 수단이라는 이원론의 끝나지 않는 지리한 갈등 속에서 ‘테러리즘’이 된다.

이글턴은 데리다처럼 죽음 자체에 뭔가 불가해한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이 갖는 성스러움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삶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개인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접근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알랭 바디우와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른바 인간성 내지 ‘인권’을 본질화하게 되면 또다시 근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이것은 다시 다른 것을 수단화하는 테러리즘으로 갈 수 있음도 경계한다. 어쩌면 이글턴의 작업은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헤겔적인 것과 변증법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젝을 경유한 (지젝은 다시 라캉을 경유한다) 것이기는 하지만 헤겔이 이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보다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이경덕 연세대 영문과 강사)

07. 11. 13.

After TheoryFigures Of Dissent

P.S. 적어도 이글턴의 책 두 권 정도가 앞으로 국내에 더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내년에는 나올까?). <이론 이후>와 <반대자의 초상>이 그 두 권의 책이다. 하니 올해 나온 책들은 미뤄두지 말고 미리미리 다 읽어두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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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1-13 21:08   좋아요 0 | URL
<우리 시대의 비극론> 정도는 저도 읽어보려 합니다..

로쟈 2007-11-14 08:28   좋아요 0 | URL
확인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