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만 된다면 매일같이 한 명의 새로운 저자와 그의 책들에 대해서 메모해놓을 수 있지만 (김갑수의 <나의 레종 데트르>의 표현을 빌면) 그런 일이 "밥 먹여주는 세상"이 아니어서 대개의 아이템들을 나는 참아두거나 무시해둔다. 다행히 추석 연휴를 맞아 잔뜩 '밀린 빨래들'처럼 해야 할 일들을 쌓아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투리 시간도 '풍족'한지라 건수를 몇 개 올릴 수는 있겠다.

 

 

 

 

아무 책이나 펼쳐도 책으로 가는 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이어져 있지만 오늘 고른 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의 한 대목이다(이 책 또한 제대로 읽자면 부록까지 포함해 12번의 강의는 필요하다). 1장 '동이 서를 만날 때'에서 지젝은 '사랑의 역설'을 말하면서 기독교와 불교 사이의 흥미로운 대비를 제시하고 있는데, 주로 선불교에 초점이 맞춰진 그의 불교론은 이전에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에서도 읽어볼 수 있었다. 그걸 자세하게 '브리핑'하는 일도 의미있어 보이지만 역시나 "원고료로 살 수 없는 세상"이니만큼 당장은 참아두기로 한다. 대신에 읽을 건 말미에 등장하는 '사랑의 폭력' 혹은 '폭력적 사랑'에 관한 한 문단이다. 시작은 이렇다.

"사랑이 폭력이라는 말이 발칸의 저속한 속담 - "나를 때리지 않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다" -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57쪽)

Antonio Banderas and Victoria Abril in Tie Me Up! Tie Me Down!

인용된 발칸의 속담은 영어로 "If he doesn't beat me, he doesn't love me!"이다(요즘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가는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얼른 떠오르는 영화는 발칸의 영화가 아니라 스페인 영화이다. 페도로 알모도바르의 도발적인 영화 <욕망의 낮과 밤>(1990)이 그것(원제목은 'Átame!'이고 영어제목은 'Tie Me Up! Tie Me Down!'). 그리고 물론 한국영화로는 장선우의 <거짓말>(1999)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한국영화로서는 '사랑의 폭력'을 다룬 드문 영화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원문은 이렇다: "Love is violence not (only) in the vulger sense of... violence is already the love choice as such, which tears its object out of its context, elevating it to the Thing"(33쪽) 

내용은 "사랑은 이러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저러저러한 의미에서 폭력이다"는 것이다. 국역본은 이 대목을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라고 잘못 옮겼는데,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리고 나는 이 문장을 도치구문으로 본다. 즉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로 보는 것이다. 결국에 '사랑=폭력'이라는 것이니까 대차는 아니지만 두 경우에 초점은 달라진다. 지젝의 말은 '폭력이 곧 사랑'이라는 게 아니라 '사랑이 곧 폭력'이라는 것이니까.

전체를 다시 옮기면 "사랑의 선택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대상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숭고한 대상'으로까지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의 폭력'이란 말이 뜻하는 바이다. 가령, 추석맞이로 이번주에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영화 <사랑>에서 주진모(채인호)의 경우를 보자. 신윤동욱 기자의 리뷰(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7/09/021015000200709200678012.html)를 잠시 따라가보면 영화는 이런 구도이다.

태초에 한 남자가 있었다. 소년 채인호(주진모)는 첫눈에 소녀 정미주(박시연)에게 반한다. 그리고 끝까지 이야기는 통속성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예쁘고 소녀의 집은 부자다. 산동네 소년은 괜스레 소녀를 괴롭히는 또 다른 소년과 싸운다. 소녀는 소년을 생일에 초대하지만, 하필이면 소녀의 집은 그날 망한다. 그리고 첫 번째 이별. 고등학생 인호는 또 싸운다. 하필이면 싸우다가 인호를 병으로 찌르는 본드쟁이 복학생은 미주의 오빠다. 그렇게 남자는 인호와 미주의 끊어진 인연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우연의 우연, ‘지나친’ 정공법이요 통속성의 기본이다. 미주의 본드쟁이 오빠는 노름쟁이 엄마를 껴안고 불살라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사랑의 맹세. “니가 내 지키도. 나도 니 지키주께.” 인호와 미주는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여기서 순수한 사랑, 곧 순수한 폭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맥락(학교와 가족사)에서 박시연(정미주)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래 스틸사진들에서 시연을 바라보는 진모의 시선(위)이 건달을 향하는 진모의 주먹(아래)에 앞서는 보다 근원적인 '폭력'이다. 영화 <사랑>은 그 맹목적인 사랑의 끝을 향해서 단순무식하게 돌진해나가는 '순정'영화이다(예고편과 리뷰들을 보아하니 그러하다).

다시 지젝으로 돌아와, 이어지는 내용: "몬테네그로의 민담에서 악의 근원은 아름다운 여성이다. 아름다운 여성은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며, 모든 것에 편파성의 색조를 입힌다."(57쪽) 원문은 "In Motenegrin folklore, the origin of Evil is a beautiful woman: she makes the men around her lose their balance, she literally destabilizes the universe, colors all things with a tone of partiality."이다.

여기서도 떠오르는 영화는 몬테네그로 영화가 아니라 이탈리아 영화 <말레나>(2000)이다(http://www.youtube.com/watch?v=IPwX6PPSfPM). '세기의 미녀'라는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말레나는 마을에서 모든 남성의 시선 끌어모으는, 그럼으로써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는 여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2차 대전이 한창인, 햇빛 찬란한 지중해의 작은 마을. 매혹적인 말레나. 걸어갈 때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그녀를 훑어내린다. 여자들은 시기하여 쑥덕거리기 시작하고 곁에는 그녀를 연모하는 열세살 순수한 소년- 레나토가 있다. 남편의 전사소식과 함께 욕망과 질투, 분노의 대상이 된 말레나. 남자들은 아내를 두려워해 일자리를 주지 않고, 여자들은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모함하기 시작한다. 결국 사람들은 독일군에게까지 웃음을 팔아야 했던 말레나를 단죄하고 급기야 그녀는 늦은 밤 쫓기듯 어딘가로 떠나게된다. 소년- 레나토만이 진실을 간직한 채 마지막 모습을 애처롭게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1년 후...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갈때쯤 말레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다. 그녀의 곁엔 죽은줄 알았던 남편이 불구가 되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도 근원적인 폭력은 말레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폭력 이전에 말레나를 무자비하게 탈맥락화함으로써 '숭고한 대상'의 지위로까지 고양시키는, 소년-레나토의 순수한 연모의 시선에 자리한다. "이러한 테마는 1920년대 이래로 소비에트 교수법의 변치 않는 요소 중 하나였다.""섹슈얼티니는 본래부터 병리적인(patho-logical) 것으로서, 냉정하고 균형 잡힌 논리를 특수한 파토스로 오염시킨다, 성적 자극은 부르주아의 부패와 연결된 귀찮은 방해꾼이다, 라고 소비에트는 인민들을 교육했다."(57쪽) 

다시 말해서 소비에트 사회는 섹슈얼리티에 가장 적대적인, 그래서 가장 금욕적이며 무성적인 사회였다(라이히나 마르쿠제의 기대와는 달리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성애적/향락적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관대한 성관념은 과연 진보적인가?). "실제로 1920년대에 소련에서는 성적 자극이 병리적 상태임을 심리-생리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유물론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사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위생지상주의적 관용에 비하면, 반페미니즘 성향의 소비에트의 연구 성과가 진리에 훨씬 가까운 것이다."

인용문에서 '성적 자극'은 'sexual arousal'의 번역인데, '성적 흥분'이 보다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병리적 상태'에 해당하는 것은 '성적 자극'이라기보다는 '성적 흥분'이어야 하겠기에(이른바 성적 '각성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다). 그리고 그걸 입증하기 위해 많은 소비에트 연구자들이 유물론적 연구를 시도했다는 것인데, 그 성과와 관련하여 지젝이 참고하고 있는 책이 각주32)에 소개되고 있는 에릭 나이만(1958- )의 <공적인 성(Sex in Public: The Incarnation of Early Soviet Ideology)>(1997)이다(전공과도 무관하지 않은 책이어서 책의 소재는 바로 탐지해두었다).  

이상이 '오늘의 책'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한 여타 참고문헌은 '비밀'로 해둔다(성은 비밀스러워야 한다). 다만 러시아에서 이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자가 '이고리 콘'이라는 것 정도만 밝혀둔다...

07. 09. 21.

P.S. 페이퍼를 적으며 드는 생각은 사랑=폭력=악의 기원으로서의 '아름다운 여성' 문제에 대해서 좌파정치학이 너무 무관심한 건 아닌가 하는 점. 가령 "정치적 관습으로 어떤 세력가가 국가의 안정을 위협할 때 그를 고발하지 않고도 추방할 수 있게 만든 제도"로서 그리스의 도편추방법을 상기해본다면, 공동체의 질서유지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는 '과도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림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니 잠자는 미녀들을 공연히 깨우지 말지어다. 물론 우파정치학에서라면 남성들의 경쟁 유발요인으로서 아름다움은 적극 장려해야 마땅한 것이겠지만...

P.S.2. 단수 높은 독자라면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이 페이퍼는 추석 연휴를 맞아 서재 방문객들에게 드리는 나대로의 인사이고 선물이다. 개인적으론 다음주 금요일에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에 나로서도 일주일간 휴가이다(별로 즐거운 일이 없을 뿐더러 할일도 많다는 건 내일부터 생각하기로 하자). 편안하고 즐거운 휴식과 감사의 시간들이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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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세곰 2008-05-2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작성시점으로부터도 반년을 훌쩍 넘긴 이 시점에. 곧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강의가 있는데 접점을 찾을 여지가 꽤 보이네요. 다운만 받아놓은 말레나를 봐야겠다는 압박도 느끼구요. 좋은 "추석"선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