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들뢰즈 철학사'란 리스트를 만들게 된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최근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이학사, 2007)란 책이 출간됐다. 철학사에 대한 들뢰즈의 생각들을 알려주는 글들의 선집인데, 책 자체는 들뢰즈가 만든 것이 아니라 역자와 출판사가 기획하여 만든 것이다(이 책의 편제에 대해서는 '이 책에 대하여'란 서문에 나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코멘트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알라딘에 소개된 내용상으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실제로 서점에서 책을 들여다보니 많은 글들이 내가 영역본 등의 버전으로 갖고 있는 것이어서 손에 들게 되었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갖는 글 꼭지는 '구조주의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내재성: 생명...' 등인데, 국내에 이미 다른 버전의 번역이 나와 있기 때문에 비교해서 꼼꼼히 읽어봄 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두 텍스트 중 '내재성: 생명...'은 작년초에 온라인 자율평론에 '내재성: 하나의 삶'으로 번역되어 주석과 함께 게재된 바 있다(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874&p_no=1&key=%B5%E9%B7%DA%C1%EE). '들뢰즈와 '하나의 삶''이라는 기획특집의 일환이었다. 이 참에 번역텍스트를 옮겨놓는다(문단은 내가 원문보다 더 잘게 잘랐다). 이번에 새로 나온 번역까지 포함한 두 텍스트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적어두겠다(개략적인 것은 이전에 쓴 같은 제목의 페이퍼 http://blog.aladin.co.kr/mramor/735467 참조).

자율평론 제15호(06. 01. 13) 내재성: 하나의 삶

■초역을 올린 후,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양창렬 님이 불어본을 대조하여 나의 번역에서 누락된 부분과 잘못 번역된 부분을 수정한 메일을 보내왔다. 영어본과 차이가 나는 한 대목은 두 개의 번역을 병기했다. 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양창렬 님께 감사드린다.-조정환



내재성: 삶1)

초험적(transcendental) 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관계하거나 주체(경험적 표상)에 속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경험과 구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주체적 의식의 순수한 흐름, 선-반성적인 비인격적 의식, 자기 없는 의식의 질적인 지속으로서 나타난다. 초험적인 것이 즉각적으로 주어진 그러한 것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은 흥미롭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주체와 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모든 것에 반대되는 초험적 경험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 초험적 경험주의에는 거칠고 강력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당연히 감각이라는 요소(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다. 감각은 단지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 안에서의 한 균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생성으로서, 힘(가상실효적 양)의 증가 혹은 감소로서, 하나의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의 이행이다. 그 두 감각이 아무리 가깝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험적인 장을, 대상도 자기도 갖지 않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으로서의 순수하게 직접적인 의식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이러한 이행이나 힘의 양에 관한 스피노자의 생각조차도 여전히 의식에 호소한다.)

그러나 의식에 대한 초험적 장의 관계는 단지 개념적인 것일 뿐이다. 의식은 주체가, 그 장의 바깥에 있고 또 “초월적인 것들transcendents”로 나타나는, 자신의 대상으로 동시에 생산되었을 때에만 사실이 된다. 반대로, 의식이 무한한 속도로 어디에나 확산된 초험적인 장을 횡단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2) 사실, 의식은, 그것을 대상에 관련시키는 주체에 반사되었을 때에만 표현된다. 그것이 초험적 장이, 초험적 장과 공연장적(coextensive)인 의식에 의해 정의될 수없고, 어떠한 드러남으로부터도 제거되는 이유이다.

초월적인 것은 초험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이 없다면, 초험적 장은 순수한 내재성의 평면으로 정의될 것이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모든 초험성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이다.3) 절대적인 내재성은 그 자신의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것 안에, 어떤 것에 대해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의존하지도 어떤 주체에 속하지도 않는다. 스피노자에게서, 내재성은 실체substance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다. 오히려, 실체와 양태들이 내재성 안에 있다. 내재성의 평면 바깥으로 떨어진 주체와 객체가 내재성이 그것에 귀속되는 보편적 주체나 임의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면, 초험적인 것은 완전히 변성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은 (칸트와 더불어) 단순히 경험적인 것을 되풀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재성은 왜곡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내재성-역자)은 그 자신이 초월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재성은 모든 사물보다 우월한 통합체로서의 어떤 것(Some Thing) 혹은 사물들의 종합을 낳는 어떤 행동으로서의 주체(Subject)에 관계하지 않는다. 내재성이 더 이상 그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내재성이 아닐 때에만, 우리는 내재성의 평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초험적 장이 의식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것은, 내재성의 평면이, 그것을 포함할 수 있는 주체 혹은 대상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하나의 삶(A Life)인,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순수한 내재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속에서는 삶이 아닌 내재적인 것이다.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인 내재성이다. 그것은 완전한 힘, 완전한 지복이다. 요한 피히테(Johann Fichte)는 자신의 최후의 철학에서 주체와 대상이라는 난제들(aporias)을 넘어서는 정도만큼, 더 이상 존재(Being)에 의존하거나 행동(Act)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의 삶(a life)으로서의 초험적 장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것의 활동성이 더 이상 존재에 관련되지 않고서, 끊임없이 삶 속에서 제기되는, 절대적으로 직접적인 의식이다.4)

그러므로 초험적 장은 진정한 철학적 진행의 핵심에 스피노자주의를 재도입하는 내재성의 진정한 평면이 된다. 맨느 드 비랑(Maine de Biran)은 그는 (그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결실을 맺을 수 없었던) 그의 “최후의 철학”에서, 노력의 초험성(transcendence of effort) 아래에서 어떤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삶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일까? 초험적 장은 내재성의 평면으로 정의되고, 다시 내재성의 평면은 삶으로 정의된다.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삶… 만약 우리가 무한정한 분절(=부정관사)를 초험적인 것의 지표로 받아들인다면, 그 누구도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보다 하나의(a)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기술하지 못했다["내재성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삶 … 그 누구도, 부정관사를 초험적인 것의 지표로 삼은 찰스 디킨즈보다 하나의(une)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기술하지 못했다"-불어본을 참조한 양창렬 님이 보내온 번역].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당하던, 평판이 좋지 않은 한 남자 도둑이 누워서 죽어 가는 채로 발견되었다. 갑자기, 그의 삶의 기운이 너무 미약해서, 사람들이 커다란 열의, 존경, 심지어 사랑으로 그를 돌보아 준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이 가장 사악한 남자는 깊은 혼수상태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무엇인가가 그에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소생하게 됨에 따라, 그의 구원자들은 점점 냉담해지고, 그는 다시 비열하고 거칠어진다. 그의 삶과 죽음 사이, 거기에 죽음과 놀이하고 있는 하나의 삶의 순간이 있을 뿐이다.5)

개체적인 것의 삶은, 내재적이고 외재적인 삶의 우연들로부터, 즉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주체성과 대상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순수한 사건을 해방하는, 비인격적인, 그리고 특이한(singular) 삶에 길을 비켜준다. 모든 사람이 그와 더불어 감정이입을 하는, 그리고 일종의 지복에 도달한 “지고한 인간(Homo tantum)”. 그것은 더 이상 개별화의 각개성(haecceity)이 아니고 특이화의 각개성이다. 순수한 내재성의, 중립적인, 선악을 넘어선 삶. 왜냐하면 그것을 선하거나 악하게 만드는 사태들 속에서 그것을 육화하는 것은 주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별성의 삶은, 더 이상 이름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 내재적인 특이한 삶을 위해 사라져간다. 그가, 그 누구도 아닌 것처럼 오해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특이한 본질, 하나의 삶….

그러나 우리는 삶을, 개별적 삶이 보편적 죽음에 직면하는 그 유일한 순간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어떤 주어진 살아있는 주체가 경험하는 그리고 어떤 살아진 대상들에 의해 측정되는 모든 순간들 속에 있다. 내재적인 삶은 오직 주체와 대상들에서만 현실화되는 사건들 혹은 특이성들을 실어 나른다. 이 부정관사의 삶[즉 하나의 삶 a life, une vie]은 그 자체로는 순간들을 갖지 않는다. 그 순간들이 서로 가깝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단지, 사이-시간, 사이-순간들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발생하거나come about 후속될come after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적 의식이라는 절대적인 것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그리고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바라보는, 텅 빈 시간의 거대함을 제공한다.

그의 소설에서, 레르네 올레니아(Alexander Lernet-Holenia)는 무기들 전체를 삼켜버릴 수 있는 중간(in-between) 시간에 사건을 위치시킨다. 하나의 삶(a life)을 구성하는 특이성들과 사건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그 삶(the life)의 우연들과 공존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같은 방식으로 묶이거나 분할되지 않는다. 그들은 개별자들이 연결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특이한 삶은 어떤 개별성 없이도, 그것을 개별화하는 어떤 부수물 없이도 지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아주 어린 아이들은 모두가 서로 닮아 있고 거의 어떤 개별성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특이성들을 지닌다. 미소, 제스처, 재미있는 얼굴 ― 이것들은 어떤 주체적인 질들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모든 수난과 연약함을 통해, 순수한 힘이며 심지어는 축복인 내재적인 삶이 불어넣어진다. 삶의 무한정한 측면들은 내재성의 평면을 부풀리는 정도에 따라 혹은, 마찬가지로, 초험적 장의 요소들을 구성하는 정도에 따라 모든 비결정을 잃는다. (다른 한편, 개별적 삶은 경험적 결정들로부터 분리불가능하게 남아있다.)

그러한 것으로서 무한정은 경험적 비결정의 표시가 아니라 내재성 혹은 초험적 결정가능성에 의한 결정의 표시이다. 무한정한 분절[=부정관사]은, 단지 특이한 것의 결정일 뿐이기 때문에, 개인(the person)의 비결정이다. 일자(the One)는 내재성을 포함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이 아니라 초험적 장 안에 포함된 내재적인 것(the immanent)이다. 하나라는 것은 언제나 다양체의 지표이다. 사건, 특이성, 삶…. 내재성의 평면의 바깥으로 떨어지는, 혹은 그 자체에 내재성을 귀속시키는 어떤 초월적인 것(a transcendent)을 불러내는(invoke) 것이 항상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험성은, 이 평면에 속하는 내재적 의식의 흐름 속에서만 구성된다.6) 초험성은 항상 내재성의 산물이다.

삶은 오직 가상실효적인 것들(virtuals)만을 포함한다. 그것은 가상실효성, 사건,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가상실효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실재성을 결여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에 특수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평면을 따라 하나의 현실화 과정 속에 참여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내재적 사건은 사물의 상태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발생시킨 살아진 것(the lived)의 상태 속에서 현실화된다. 내재성의 평면은, 그것이 그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주체와 대상 안에서 현실화된다. 그러나 대상과 주체가 아무리 분리불가능하다 할지라도, 내재성의 평면은, 거기에 사는 사건들이 가상실효성들인 한에서는, 그 자체로 가상실효적이다. 사건들과 특이성들은 그 평면에 그것들의 모든 가상실효성을 부여한다.

내재성의 평면이 가상실효적 사건들에 완전한 실재성을 부여하듯이. 현실화되지 않은 (무한정한) 것으로 고려된 사건은 그 어떤 것도 결여하지 않고 있다. 그 사건을, 그와 공존하는 것들, 즉 초험적 장, 내재성의 평면, 삶, 특이성들 등과 관련 속에 놓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상처는 사물들 혹은 삶의 어떤 상태에서 육화 혹은 현실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삶으로 이끄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 있는 순수한 가상실효성 그 자체이다. 나의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다. 더 높은 현실성으로서의 상처의 초험성이 아니라, 항상 어떤 환경(평면 혹은 장)7) 안의 가상실효성으로서의 그것의 내재성. 초험적 장의 내재성을 정의하는 가상실효적 것들과, 그것들을 현실화하여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변형하는 가능한 형식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1) 2005년 3월 20일 조정환 옮김; 텍스트: G. Deleuze, 'Immanence: A Life'(in G. Deleuze, Pure Immanence: Essays on A Life, tran. by Anne Boyman, Zone Books, New York, 2001, pp. 25~33)[불어본: G. Deleuze, 'L'immanence: Une Vie', Philosophie 47, Editions de Minuit, 1995.]

2) “우리가 빛을 그것을 발산하는 표면에 다시 반사시키더라도, 저항 없이 지나친 빛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Henri Bergson, Matter and Memory, New York, Zone Books, 1988, p. 36)

3) 비인격적, 절대적 내재적인 의식에 관계하는 주체 없이 초험적 장을 정립하는 사르트르를 참조하라. 그에 비교할 때, 주체와 대상은 “초월적”인 것들이다. (La transcendance de l'Ego (Paris: Vrin, 1966), pp.74-87) 제임스에 관해서는, David Lapoujade의 분석, “Le Flux intensif de la conscience chez William James," Philosophi 46 (June 1995)"을 참조하라.

4) 이미 La Doctrine de la science 두 번째 서문에서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진행이며, 존재가 아니라 삶인 순수 한 활동성의 직관”(Oeuvres choisies de la philosophie première (Paris: Vrin, 1964), p.274)이라 말하고 있다. 피히테에 따른 삶의 개념에 대해서는 Initiation à la vie bienheureuse (Paris: Aubier, 1944), 그리고 Martial Guéroult의 주석(p. 9)을 보라.

5) Dickens, Our mutual Frien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p. 443.

6) 심지어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조차도 이것을 인정한다. “세계의 존재는, 기원적인 증거 내부에서조차, 필연적으로 의식에 초월적이며, 또 필연적으로 초월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초험성이 의식의 삶 속에서, 그 삶에 분리불가능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으로서, 단독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Méditations cartésiennes (Paris: Vrin, 1947), p. 52) 이것이 사르트르 텍스트의 출발지점일 것이다.

7) Joë Bousquet, Les Capitales (Paris: Le Cercle du Livre, 1955) 참조.

07. 09. 21.

P.S. 이 번역의 대본은 각주1)에 밝혀져 있지만, 텍스트 자체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한 가지 대본이기도 한 <광기의 두 체제: 텍스트와 인터뷰 1975-1995>(2003; 영역본2006)에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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