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대학원신문(155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출처는 담비이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두 권의 책,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과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에 관한 것이다. 타이틀은 "우리시대의 신과 종교, '문제는 사랑이다'"로 나갔다.

 

 

 

 

'스타’ 과학자와 철학자가 신에 대해 묻는다

종교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닥에서부터 재고해보도록 요구하는 책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영국의 다윈주의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슬로베니아의 라캉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가 그 두 권의 책이다. 국역본으로는 『만들어진 신』이 약간 먼저 나왔지만 원저의 경우엔 『죽은 신을 위하여』(원제는 ‘꼭두각시와 난쟁이(The Puppet and the Dwarf)’)가 지난 2003년에, 그리고 『만들어진 신』(원제는 ‘신이라는 망상(The God Delusion)’)은 2006년에 출간되었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 ‘스타’ 과학자/철학자의 근접 조우는 그런 빌미로 마련된다.

그렇다고 해서 도킨스와 지젝이 직면 대면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중에 출간된 만큼 도킨스가 지젝을 참고할 만하지만 『만들어진 신』에서 『죽은 신을 위하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도킨스가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에 혐오감을 보이며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론에 동조했던 걸 고려하면 반(反)영국적인 헤겔철학(독일)과 라캉정신분석(프랑스)을 이론적 거점으로 한 지젝의 ‘사변’을 도킨스가 인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모든 분야의 지식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드는 지젝은 보다 적극적으로 진화생물학과 인지과학을 참조하지만 그가 보다 자주 거론하는 인물은 도킨스가 아니라 대니얼 데닛 같은 과학자이다(데닛은 도킨스의 책 『확장된 표현형』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거기에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라는 제사(題詞)를 달고 있는 『만들어진 신』이 종교 일반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반해서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를 특권화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도 예비적으로 알아두어야겠다(지젝의 책에서 제사 역할을 하는 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이다).



무언가의 부산물일 뿐인 종교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제안하는 『만들어진 신』은 전반부 대부분을 “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걸 입증하는 데 할애한다. “신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 독실한 맹신자들에게는 반감어린 호기심을 유발하겠지만 일반 독자가 읽기에 보다 흥미로운 건 ‘종교의 뿌리’와 ‘도덕의 뿌리’ 등을 다룬 다른 장들이다. 다윈주의 과학자로서 도킨스가 갖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종교적인 욕구를 충동질한 자연선택의 압력들은 무엇이었을까?” 좀스러울 정도로 ‘경제성’을 따지는 다윈주의자가 보기에 종교는 너무 낭비적이고 너무 사치스럽기 때문이다. 대니얼 데닛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햇빛이 드는 숲속의 빈터에 앉아 있는 공작 수컷들처럼.”

그렇다면, “왜 신 중추를 성장시키는 유전적 성향을 지닌 조상들이 그렇지 않은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후손을 가진 것일까?” 말하자면 종교적인 본성의 유전적 이익이란 게 어떤 것일까를 따져보는 것인데, 도킨스나 다른 진화생물학자들이 보기에 그러한 성향은 직접적인 이익과 무관한 듯하다. 그것은 감기가 종교와 흡사한 양상으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이지만 우리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서 얻어지는 자연스런 결론은 종교가 다른 무언가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는 달을 기준으로 날아가도록 진화한 나비의 본성이 촛불을 향해 뛰어드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과 같은 차원의 부산물이자 부작용이다. 요컨대 “다른 상황에서는 유용한 혹은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종교가 다른 무엇의 부산물이라면 그것은 무엇일까란 질문이 자연스레 제기되는데, 아직은 ‘가설’들만이 제시돼 있는 수준이다. 도킨스의 가설은 소위 ‘잘 속는 아이’ 이론이다. 아이들은 앞선 세대의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습득할 필요가 있으며 자연선택은 아이의 뇌에 부모나 다른 어른이 어떤 말을 하든 믿는 경향을 심어놓았다(교회는 어릴 때부터 보내야 한다!). 그렇게 믿고 따르는 것이 보통은 생존에 유익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이면은 노예처럼 속는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은 종교의 비합리성이 뇌에 들어 있는 특정한 메커니즘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바로 사랑에 빠지는 성향이다.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사랑에 빠질 때 우리의 뇌에는 신경물질들이 활성화되면서 독특한 뇌 상태를 이루게 된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소위 ‘한눈에 반하게 만드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현상이 오랫동안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도록 배우자에게 충실하게 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진화해왔다고 본다. 그리고, 역시나 비합리적인 종교는 원래 사랑에 빠지도록 뇌에 새겨진 비합리적 메커니즘의 부산물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 종교라는 ‘두가지 열병’은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다르면서도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한데 이러한 ‘부산물로서의 종교’는 원래의 진화적 본성(메커니즘)으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 것일까? 가령 우리는 사랑에는 빠지면서 종교에는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일까? 나방은 달을 향해 날아가는 본성은 유지하면서 한편으론 촛불로 달려드는 실수를 피해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비합리적 신앙 대신에 합리적 이성의 판단에 따르기까지는 혹 ‘진화적 시간’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 사랑
사랑의 역설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을 다루고 있는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체스터턴의 말을 재인용하면, “이 세상 모든 종교 중에 신이 전능하다는 이유로 불완전할 수 있다고 느꼈던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신이 온전한 신이 되기 위해서는 신이 왕이 돼야 하는 동시에 반란자가 돼야 한다고 느꼈던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27쪽) 더불어,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자기를 배반할 것은 요구하는 신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28쪽) 지젝의 책 전체는 이 도착적 핵심에 대한 새로운 독해이자 헤겔적/라캉적 해석의 시도이다.

그리스도와 배반자 유다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교훈을 멜로드라마 버전으로 바꿔서 말하면 이렇게 된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면 그녀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사명 혹은 자신의 직업이 그녀보다 중요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즉 당신은 나의 전부지만, 나는 당신 없이 살아갈 수 있고, 나의 사명 내지 직업을 위해 당신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34쪽)는 게 진정한 사랑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사랑의 근원적인 역설이다. 즉 사랑은 그것이 절대적이기에 언제나 직접적인 목표가 아닌 부산물의 지위에 있어야 하며 과분한 은혜의 산물로 간주돼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혁명가 커플의 사랑, 혁명이 요구하면 언제고 기꺼이 상대방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일 거라고 지젝은 말한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역설을 체현하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궁극적 타자가 신 자신인 한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동일성으로 환원시킨 것이 기독교의 획기적인 업적이다”라고 지젝은 주장한다. “기독교에서는 신 자신이 인간이요, ‘우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223쪽) 따라서 ‘타자성의 심연’은 기독교와 무관하며 진정한 일신교로서의 기독교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다(일신교의 배타적 폭력은 자신이 ‘거짓 신들’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신교의 가면을 쓴 다신교의 행태이다).



신 자신에 대해 죽는 기독교의 신
신이 자기를 믿지 않는 인간들 때문에 죽는 전형적인 무신론에서와는 달리 기독교에서 신은 “신 자신에 대해서 죽는다(God dies for Himself).”(27쪽)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남기고 신(그리스도)은 혼자서 죽는다. 기독교의 은밀한 도착적 핵심은 신을 신 자신으로부터 분리하는 이러한 균열, 신 자체가 되는 이 균열에 놓인다. 이러한 균열의 장면을 우스갯소리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셋이 각자 자기소개를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이유로 사자 밥이 되었소!” “나는 그리스도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화형 당했소!”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내가 바로 예수요!”

이러한 마지막 역전의 순간에 ‘창조의 토대로서의 예외’, 곧 신은 “신 자신의 창조물 속으로 타락하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피조물 속으로 삽입된다. 이러한 진입의 순간은 기독교가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생의 신비이다.”(223쪽) 지젝이 기독교의 핵심으로 분리해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신비이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이다. “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

도킨스는 ‘종교의 뿌리’를 탐문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나방들은 촛불을 향해 날아들며, 그것은 우연 같지가 않다. 그들은 스스로를 번제(燔祭)의 제물로 바친다. 우리는 그것을 ‘자기희생 행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으며, 그 도발적인 명칭을 대하면 도대체 어떻게 자연선택이 그것을 선호할 수 있는지 궁금증이 인다.”(263쪽) 그것은 달빛에 대한 나방의 ‘망상’이었겠지만 ‘죽은 나방을 위하여’는 그렇게만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07.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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