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난 지 여러 날이 되었지만 늦더위가 만만찮다. 어디 휴양지에나 가 있어야 딱 좋을 날씨이긴 한데, 그럴 여유는 없고 무거운 머리와 씨름만 하고 있다. 잠시 커피 브레이크에 예전에 쓴 시집의 글들을 뒤적이다가 한 대목을 창고로 옮겨온다(돌아보니 12년 전에 쓴 글이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 좋아한 시 이상의 '꽃나무'에 대해 몇 자 적어놓은 것이다. 하긴 여름날의 꽃나무들도 휴가는커녕 꼼작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터이다. 그이들을 사랑한다.

나는 이상적인 시의 번역이란 시적 ‘삶’의 번역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시는 원칙적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불어의 ‘번역하다(traduire)’란 말은 ‘가로질러가는 행위․운동’을 뜻한다. 시를 번역하는 것은 시 속의 ‘삶’을 가로질러가는 행위․운동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행위․운동이란 것은 주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를 읽어내는 사람마다에게 고유한 것이다. 따라서 시 번역에는 방법론이 있을 수가 없다(몇 가지 요령은 있을까?). 자신의 전 존재를 투여하는 수밖에. 여기서는 다만 이상의 시 '꽃나무'의 말뜻만 따라가 보기로 하겠다. 편의상, 띄어쓰기를 하겠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이 시의 핵심은 나와 꽃나무의 대비적인 관계이다. 이들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흉내’이다. 나는 꽃나무를 흉내낸다(꽃나무는 나의 은유이다). 나는 꽃나무‘처럼’ (서)있다. 이 ‘처럼’이 직접적으로 겹쳐지는 부분이 “나는 막 달아났소”이다. 앞에서 문장의 주어였던 ‘꽃나무’가 여기서 ‘나’로 교체된다. ‘꽃나무’에만 국한된 시라면 이 시는 “꽃나무는 막 달아났소”라고 끝나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가 개입한다. 내가 ‘꽃나무’의 바톤을 이어받는 것이다. ‘나’는 ‘꽃나무’인 것.

 

그렇다면 이 시의 처음부터 ‘꽃나무’는 ‘나’이다. 그럼 아예 이렇게 다시 읽을 수 있다: “벌판 한복판에 나 혼자 있소. 근처에는 아무도 없소. 나는 나 혼자 열심으로 나만을 생각하며 서 있소. (그러나?) 나는 내가 바라는 나는 될 수 없소. 나는 (슬퍼서? 절망해서?) 막 달아났소.”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꽃나무’와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같은 존재로 볼 것인가, 서로 다른 존재로 볼 것인가, 이다.

"내가 바라는 나”가 ‘이상적인 나’인가, 아니면 ‘당신’인가 하는 것. 그건 읽는 사람의 마음이 결정할 문제일까? 어쨌든 시적 화자(나=꽃나무)는 나름대로 열심히 꽃을 피우고자 하는, 사랑하고자 하는, 진정한 자기발견에 이르고자 하는 존재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지레짐작한, 아니면 그런 불가능성을 몸으로 확인한 존재이다. 그는 그 불가능성을 견디지 못해서 달아난다. 그는 지극히 ‘이상’적인 존재이다.

 

 

 

 

‘꽃’을 노래하는 것과 ‘꽃나무’를 노래하는 것은 시의 계열이 다르다. 꽃은 다만 피고 지는 것을 주특기로 하지만 꽃나무는 그런 꽃들을 거느리면서 한편으론 “숙명적 상승의 전략”(이성복, '등나무')을 구사해야 한다. 내가 꽃나무를 가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 꽃핀 나무들(=꽃나무들)의 열렬한 괴로움이여! 이상(1910-1937)과 이성복(1952- )의 시 몇 편은 바로 이 주제에 바쳐진다...  

 

나는 어느 새 이상보다 많은 나이를 먹었구나! 생의 막바지에 그는 레몬인가 멜론인가를 달라고 그랬다지. 나는 오렌지를 달라고 할까? “레몬 즙보다는 후두(喉頭)가 더 크게 벌어지도록 강요하는” 오렌지 즙을 말이다. 우리의 안쓰러운 오렌지.

 

스펀지처럼 오렌지에도 표현의 시련을 감내한 뒤 형태를 다시 찾으려는 열망이 있다. 그러나 스펀지는 항상 성공하지만 오렌지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 세포들은 파열되었고 조직체는 찢겨나갔기  때문이다. 단지 껍질만이 탄성 덕분으로 완만하게 자신의 형태로 되돌아가고, 그동안 방향성 액체가 흘러나온다. 언제나 감미로운 향내와 신선함을 지니고서. 그렇지만 씨앗의 너무 이른 배출에 대한 씁쓸한 의식도 번번이 동반한다.(F. 퐁주, '오렌지')  

 

 

우리는 오렌지를 닮았는가, 씁쓸하게도? 시계태엽이 감긴 오렌지(Clockwork Orange)? 내 방 책상머리에는 언제부터인가 S. 큐브릭의 이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대학 1학년 때 H대학 영화제에서 본 듯한데, 별로 유쾌한 영화가 아니었다(反유토피아 영화던가?). 그러니 좋아하지도 않고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몇 장면만이 머릿속에 들어있다 이 포스터의 문구 그대로이다(http://www.thefoolsparadise.com/clockwork-orange/ 참조).



“여기 한 젊은이의 모험이 있다. 오로지 그의 관심은 강간과 무지막지한 폭력, 그리고 베토벤!(Being the adventures of a young man whose principal interests are rape, ultra-violence and Beethoven.)” 이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착한 오렌지인가!.. 

 

 

07.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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