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서 간혹 시집 대신에 '시 읽어주는 남자'를 읽는다. 최근에 나온 읽을 만한 시집들이 어떤 것이 있나 요긴하게 일람해볼 수 있는 연재 꼭지이다. 대개는 읽고 말지만 오늘은 하도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이기에 옮겨놓는다. 시인과 평론가가 합창하며 말하기를 우리의 삶은 '백팔번뇌 콘서트'가 아닌가, 라고 하니 춤은 안되더라도 박자는 맞춰줘야 하는 게 아닌가도 싶고(그래야 민폐를 안 끼칠 테니!). 자, 곧 당신 차례다. Are You Ready?

 

한겨레21(07.08. 02) 라라라~ 백팔번뇌 콘서트

SES’는 3명, ‘핑클’은 4명이었다. 한창 활동 중인 ‘원더걸스’는 5명이다. 그리고 이제 ‘소녀시대’가 온다. 이번에는 9명이다. 최근 온라인 틴에이저 커뮤니티의 최대 이슈 중 하나가 이 9명의 소녀들이다. 음반도 출시되지 않았고 방송 데뷔도 아직 안 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래와 영상은 이미 인터넷에서 인기다. 그래서 보았다. 상큼한 노래, 발랄한 군무, 다 좋다. 그런데 9명이라니, 너무 많지 않은가.

천만에. 일본에는 초대형 걸그룹 ‘번뇌걸즈’가 있다. 이 해괴한 이름의 팀을 구성하는 멤버는, 놀라지 마시라, 총 108명이다. 그러니까 백팔번뇌인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이 팀의 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들은 삼각편대로 대열을 맞추고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무표정하게 부르면서 그야말로 ‘엉거주춤’을 추고 있었다. 정말이지 번뇌가 밀려왔다. 도대체 뭐하자는 건가. 조롱하고 냉소할 힘도 없다. 어쩐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영상을 끄고 말았다.

물론 대중음악은 본디 예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산업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무에서 유를 낳는 창조의 영역이 아니라 유가 더 많은 유를 낳는 장사의 영역이다. 인재를 발굴해 자본을 투입하고 스타로 만들어 잉여가치를 뽑아낸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튀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108명은 너무했다. ‘장사’가 되기는 할까? 이것은 무한경쟁 상업주의의 제 살 깎아먹기가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진부한 물음이다. 시인들의 뛰어난 상상력은 물음 자체를 바꾼다.

“라라라, 여긴 매우 비좁군요 머릿속은 당신이 모른 채 당신이 상연되는 콘서트장이죠 걱정 말아요 우린 아주 잠시 동안만 당신을 빌릴 거예요// 우리의 하모니는 서로를 비난하는 데 바쳐지죠 당신은 누구지요? 이름이 뭐예요? 우리는 의심 많은 소녀들, 머릿속은 고장 난 앰프처럼 먹통이 되겠죠 우린 점점 증폭되고 있어요.” 번뇌걸즈를 소재로 한 시 ‘번뇌스런 소녀들-리허설’의 전반부다. 후반부는 이렇다.

“우린 하루 종일 둥글게 둥글게 입을 모아요 각자의 목소리만 너무 사랑하는 우린 즐거운 소녀들, 라라라, 발성 연습은 언제나 아름다워요 당신이 당신을 잊어버릴 때까지 우린 노래 부를 거예요// 누구를 가장 좋아하세요? 라라라, 마지막 멤버가 도착했군요 당신은 서서히 돌 거예요 당신은 108개의 목소리를 갖게 됩니다 당신에게 새로운 노래를 불러드리겠어요.”

최근에 출간된 김경인 시인의 첫 시집 <한밤의 퀼트>(랜덤하우스·2007)에서 골랐다. 이 시는 번뇌걸즈라는 이름을 곧이곧대로 해석해 오히려 신선해졌다. 그래, 저기 108명의 ‘번뇌’들이 노래하고 있군. 그런데 당신은 뭐가 놀랍다는 거지? 저건 그냥 당신의 머릿속과 똑같아. 108명의 “의심 많은 소녀들”이 나와 당신의 머릿속에서 오늘도 콘서트를 열고 있어. 번뇌들, 내 머릿속의 소녀들, 끝없이 욱신거리는 내 영혼의 노래들.

번뇌걸즈를 보면서 상업주의의 복마전을 생각하는 일은 따분하지만, 그 소녀들을 ‘내 머릿속’으로 기꺼이 불러들이는 시인의 상상력은 재미있다. 예컨대 “우리의 하모니는 서로를 비난하는 데 바쳐지죠”라든가, “각자의 목소리만 너무 사랑하는 우린 즐거운 소녀들”과 같은 구절들은 실로 ‘번뇌’라는 굳은 단어에 대한 신선한 규정이면서 동시에 제 자신이 사랑스러운지 모르고 있기에 더 사랑스러운 소녀들 같지 않은가.

이 시가 “번뇌스런 소녀들”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래도 그것이 꼰대의 조롱이나 먹물의 냉소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이 시에 조곤조곤 감염된 탓인지 달리 생각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노동이란 것이 번뇌걸즈의 맨 뒷줄에서 열심히 노래하고 있는 소녀의 그것보다 특별히 우아한 것도 아니다. 번뇌걸즈의 영상을 다시 튼다. 번뇌가 밀려온다. 그런데 나는 몇 번째 줄 어디쯤에서 노래하고 있는 거지?(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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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04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표정한 108명의 여인들이 똑같은 율동에 맞춰 의미없는 노래를 중얼거린다면..번뇌가 밀려오기도 전에 제법 공포스러울 듯 하기도 합니다.

로쟈 2007-08-0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영상은 보지 않았는데, 자못 일본스런 발상이란 생각은 드네요...

twinpix 2007-08-0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8면 대단하네요. 저번에 일본에서 초등학생 여자 아이돌 그룹의 (이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요.) 동영사을 본 적도 있었죠. 아무튼 시집이 관심이 가네요. 'ㅁ'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8-05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누가 썼을까 궁금해하며 봤는데, 신형철님이었군요. 역시, 좋군요. 흠흠

로쟈 2007-08-05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에 평론집이 나온다고 했는데, 8월에 나오는 건지 모르겠네요...

누에 2007-08-0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의 이미지와 백팔번뇌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묘한 느낌이 납니다.

로쟈 2007-08-06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뇌야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거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