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자적하게 '파도타기와 공잡기'란 페이퍼를 쓰고 있다가 문득 오늘이 마감인 보고서 파일을 저장해오지 않은 걸 알게 됐다. 부랴부랴 학교에 나올 수밖에(이런 게 '파도타기'다!). 오는 길에 경향신문에서 '작가와 문학사이' 마지막회를 읽었다. 덩달아 6개월 또한 이 연재를 '문학의 뒷계단'에 옮겨놓았으니 나로서도 감회가 없지 않다. 안면이 없지 않은 두 문학평론가의 얼굴을 지면에서 보니 반갑기도 하고, 매주 하던 일 한 가지가 줄어서 기쁘기도 하다. 기꺼이 마저 옮겨놓도록 한다.  

심진경(왼쪽)·신형철씨가 신세대 문학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80년대, 90년대 학번인 두 사람은 작가적 자의식, 젊은 독자들의 수용태도 등에 대해 일부 이견을 보였으나 계몽과 교양의 손을 떠난 문학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경향신문(07. 06. 30) [작가와 문학 사이]시리즈 결산… 새로운 한국문학을 논하다

지난 1월6일부터 매주 연재됐던 ‘작가와 문학 사이’가 막을 내린다. 김연수부터 한유주까지 13명의 소설가, 문태준부터 김경주까지 10명의 시인을 다룬 이 시리즈는 현재 우리 문학계의 주역으로 떠오른 1970년대 생 이후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심층 조명해 호평을 받았다. 필자로 참여한 문학평론가 심진경씨(소설)와 신형철씨(시)의 대담을 통해 새로운 한국문학을 진단했다.

▲ 수록작가

시인: 문태준 황병승 진은영 김선우 강정 손택수 김민정 이장욱 이병률 김경주
소설가: 김연수 박민규 강영숙 윤성희 김중혁 이기호 천운영 정이현 편혜영 박형서 김애란 백가흠 한유주

# 자신만의 방언같은 소문자 문학

신형철:전통적인 스타일의 시인과 새롭고 전위적인 시인을 교대로 다뤘다. 이장욱 황병승 김민정 김경주 등 젊은 시인들의 특징은 서정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다. 시적인 것이라는 큰 범주가 있다면 서정적인 것은 하위 범주이면서 가장 유력한 범주다. 그러나 그것 사이에는 틈이 있다. 90년대에 워낙 서정시가 주류였기 때문에 2000년대 시인들은 대개 그에 대한 반작용을 보인다. 문태준이나 손택수 같은 시인도 서정시를 쓰지만 서정적인 것의 상투성, 그 메커니즘의 위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심진경:김연수와 한유주는 10살 차이가 나고 문학의 색깔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이들을 아우르는 특징이라면 문학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방언 같은 문학, 소문자 문학, 개별 문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김연수는 역사를 다루지만 그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회의한다. 이기호도 기존 소설 관습을 뒤집고 비트는 시도를 한다. 박민규나 편혜영을 보면 기존의 인간이란 종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새로운 인종의 출현을 기대한다. 개별 지도를 만들어가는 영세업자들이 오늘의 작가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육화(肉化)

신형철:2000년대 문학의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육화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초반의 전위적 시는 대중문화를 끌어들이건, 패러디를 하건 정치적·계몽적 요소가 있고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보수적인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몽적 자의식이 없다. 시에 대해 숭고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시인이 드물고 여러 예술 장르의 하나로 받아들인다. 90년대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머리로 받아들인 근대적 인간들의 시대였다면 지금 작가들에게는 포스트모던 문화가 그대로 들어와 있다. 장르 문학과 본격 문학의 경계 흐리기, 무국적, 젠더적 혼란, 인류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기 등이 자연스럽다.

심진경:김중혁의 작가의 말(펭귄뉴스)을 보면 자기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이 혼합된 레고블록이며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한 조각의 레고블록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이런 식의 자기 이미지가 이전과 달라진 점이다. 작가가 이 정도는 알고 이 정도 음악은 듣고 이 정도 예술 영화는 봐야 한다는 자기검열, 교양인의 상은 사라졌다. 무작위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90년대 백민석이 비트음악과 록음악을 말할 때에는 고급문학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표지로 소비했으나 지금의 박민규는 저항하기 위해 끌어온다든가 하는 자의식이 없다. 자기가 즐기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농민이 농업사회의 주체이고 노동자가 산업사회의 주체라면 후기 산업사회의 주체는 기계다. 자기를 단일한 주체로 호명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아바타로 분열, 해체시키고 다시 합칠 수 있는 기계로 보는 상상력이 자연스러워졌다.

# 교양속물 vs 자기전시

신형철:소설은 이래야 한다, 시는 저래야 한다는 숭고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문학은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훨씬 스타일에 대한 압박을 덜 느끼고 자유롭게 한다. 수용자 층의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워서 젊은 세대의 독자는 말 많은 젊은 시인들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의 작품이 이질적이라는 건 윗세대의 담론 아닐까.

심진경:황병승의 시와 한유주의 소설은 책의 형태가 아니라 인터넷을 떠돌고 각자의 블로그에 퍼가는 형태로 소비된다. 대신 이 세대는 칙릿이나 일본소설을 산다. 자신을 현학적으로 포장하고 과시하기 위해 문학을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적인 시, 연애시가 아니라 황병승의 시를 알고 있다는 식의 자기자랑, 내지는 개성의 표현방식으로 사용된다.

신형철:소비하는 방식이 바뀐 건 맞는데 외적인 방식이 바뀌었을지언정 자기세대의 문학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수용한다는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황병승의 시를 읽는다면 단순히 좋아하기 때문이지, 이전 세대처럼 이만큼은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그러는 건 아니다.

심진경:이들은 물론 황석영 책 정도는 읽어줘야 한국 현실을 안다는 이전의 교양 속물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나름의 리스트가 있는데 이는 자기 전시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필독서 목록이 버지니아 울프에서 폴 오스터로 바뀌었으며 고급음악에 대한 느낌도 바흐나 모차르트에서 ‘라디오헤드’의 록음악으로 변했다. 개별적인 문화소비로 보이지만 그들만의 장(場)이 있다는 뜻이다.

# 후광 사라진 시대의 작가의식

신형철:문학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작가 역시 그 위계질서의 위를 차지하려는 입신양명적인 욕망을 버렸다. 문학이 다른 예술 장르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거나 소설가가 기타리스트 나부랭이와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니다. 이기호가 말한대로 소설가는 소설을 써서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후광이 사라졌기 때문에 ‘너는 구두를 닦냐, 나는 소설을 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 역시 옛날처럼 비평가가 권위있는 이름의 시대라면 말 못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비평가라고 말한다.

심진경:이전 선배들이 보여주는 리더의식, 작가가 보통 사람과 다른 지성인이라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문학적 환경이 예전보다 비천해지면서 일종의 자기보호 본능이 작동한다고 본다. 예컨대 윤성희나 김애란이 비천한 삶을 그리는 것, 김중혁이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박민규가 전직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 등에는 소설가라는 이름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이는 제스처가 있지 않을까.

신형철:그런 자의식이 너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심진경:김중혁의 말처럼 누군가의 레고블록이라도 되고 싶다면 그게 작가적 자의식일 것이다. 그런 자의식 없이는 문학이 성립하지 않는다. 단 80년대에 비대해진 문학의 권력화, 제도화와 상관없는 게 오늘의 작가들이라면 오히려 60~70년대와 맥이 닿을 것이다.

# 신세대 문학, 예술 아니면 유령

신형철:근대문학이 했던 역할이나 위상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시인, 소설가들이 거꾸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문학은 점점 주변화, 소수화, 취미화의 길을 갈 것이다. 이 현상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이야기하면 너무 갑갑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걸 해야 했기에 왜곡되고 비대해졌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 치열해졌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소설은 아직 모르겠다는 느낌이 많고 시에 대해 호의적이다. 지금 독자에게는 한국문학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이 있다. 90년대 시와 소설이 남긴 부정적 효과 중 하나인데 서정시 일변도나 여성문학의 영향으로 인한 내면과 성찰의 이미지다. 특이한 시와 소설이 동시대 독자들에게 재미있네, 다르네, 우리 이야기를 하네, 그런 느낌을 준다면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기성 독자와 평론가들이 선입견을 자꾸 고착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심진경:문학의 전문화, 세분화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일반인들이 더 접근하기 어려운 클래식, 하이모더니즘이 될 것이다. 전문적인 독해능력, 지루함과 낯섦을 견딜 수 있는 고급 취향의 영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현실이 있고 문학이 그걸 재현한다는 사고 대신,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현실에 대한 사유가 훨씬 탄력적으로 변한 건 신세대 문학의 장점이다. 단 상상할 수 없었던 여러가지를 미디어를 통해 경험하면서 모방의 모방이 거듭되고 사유없는 사유, 경험없는 경험이 떠다니는 것을 경계한다면. 자칫 유령이 될 수도 있다.

# 다루지 못한 작가들

신형철:시인 김행숙을 언급하고 싶다. 서정적인 것에 대한 자의식, 긴장이란 면에서 2000년대 시인의 등장 이전에 독보적인 자기 목소리를 냈고 직관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쓰는 시인이다. 소설가 전성태는 타자를 재현할 수 있는가라는 논란의 중심에 선 작가다. 빠트려서 죄송하다는 멘트가 들어가야 할 듯하다.

심진경:동의한다. 김숨도 다뤘으면 좋았을 것이다. 장편 ‘백치들’, 단편집 ‘침대’를 냈는데 같은 이야기를 아주 낯설게 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중동에서 일하다 돌아온 아버지를 방 안에 모래바람을 몰고 온 백치로 묘사한다든지, 현실적 이야기를 믿을 수 없게 한다. 권여선은 나이로 보면 젊은 작가가 아니지만 굉장히 특이한 인간형을 제시한다. 홍상수(영화감독)식의 자기비하가 우월감의 다른 표현이라면 권여선은 자기우월감 없이 바닥으로 추락시키는 자의식을 보여준다. 매우 공감가는 캐릭터이다.(진행·정리|한윤정기자)

07. 06. 30.

P.S. 두 평론가의 '일부 이견'에 대해서는 노랗게 색칠해놓았다. 8년 정도의 연배/세대 차이가 이견을 낳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소설(심진경)과 시(신형철)라는 장르적 관심(이해관계)의 차이가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두 장르가 공동운명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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