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4호)에서 한나 아렌트에 관한 기사를 옮겨온다(직접적으로는 담비에서 옮겨온 것이다). 아렌트 번역자 중 한 사람인 홍원표 교수가 전반적인 개요를 잡아주고 있어서 길잡이로서 참고할 만하다.  

연세대 대학원신문(07. 06. 24) 20세기의 영원한 국외자

혁명과 폭력의 세기 한가운데 서있던 아렌트의 저작들은 글로벌 시대 우리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적실성을 갖고 있는가? 궁금한 문제이다. 아렌트는 자서전을 결코 집필하지 않았지만, 제자인 영-브륄은 이야기하기 형식의 ‘철학적’ 전기에서 아렌트의 삶을 세계사랑으로 특징화하였다. 그의 저작들은 냉정하면서도 헌신적인 ‘인간사랑’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시대와 세계를 반영한 저작들에서 인간다운 삶의 지혜를 찾으려는 노력은 값진 것이다. 국내에서 번역·출판한 저작들을 중심으로 아렌트의 삶과 사유 궤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삶에서 말과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언어행위 가운데 이야기하기(story-telling) 역시 인간 관계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그는 전통적인 분석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인간의 삶, 특히 정치적 삶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정치적 삶의 심오한 의미를 찾고자 정치영역 자체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저작들에서는 정치영역과 다른 영역들(철학, 문학, 역사, 종교 등) 사이의 끊임없는 ‘왕래’가 이루어진다. 아렌트는 이러한 왕래의 수단으로 이야기하기를 활용하였다.

이야기하기로 전개된 아렌트 저서들을 이해하는 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저서들의 구성 틀은 주로 3벌 구조(triptychs)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삶을 활동적 삶(vita activa)과 정신의 삶으로 구분하고, 전자를 노동·작업·행위로, 후자를 사유·의지·판단으로 범주화하였다. 둘째, 인간의 특이한 경험인 시작(탄생)과 끝(죽음)을 대비시키고 있지만, 시간적 맥락에서 인간의 삶을 과거·현재·미래와 연계시키고 있다. 그는 단선적 시간 개념과 역사이론을 거부하고 있다. 셋째, 공간적인 맥락에서 사적·사회적·공적 영역과 활동유형을, 그리고 윤리적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저작들은 시간적·공간적·행위적 맥락이라는 3벌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몇 가지 기준에 기초하여 주요 저작들의 흐름을 고찰하기로 한다.


 
정치이론가로서 성찰하던 시기(1951~1965)
1951년에 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박미애 옮김, 2006, 한길사)은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전체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로 결정화(結晶化)되는 요소들(인구과잉, 팽창과 경제적 과잉, 사회적 불안정과 정치적 삶의 악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근본적 악의 등장을 해명하였다.

전체주의 지배는 역사상 전례 없는 정치적 악이다. 인간의 시작 능력(power to begin)을 박탈함으로써 인간을 ‘파블로프의 개’로 전락시켜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집단수용소(즉, 인간도살장)는 지옥, 즉 지구에 존재하는 정치적 실재이다. 전체주의 체제는 죽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아렌트는 이에 대한 이론적 거부로 새로운 시작(삶)을 정치적 개념으로 전환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삶에 대한 그의 이론적 입장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역사적 사건이 되기 이전 시작은 인간의 최고능력이었다. 정치적으로 시작은 자유와 동일하다.”

『전체주의의 기원』 출간 이후 아렌트는 서구의 ‘위대한’ 사회적·정치적 전통을 규명하면서 전체주의의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들을 탐구하는 데 전념하던 중 새로운 정치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인간의 조건』(1958), 『과거와 미래 사이』(1961), 그리고 『혁명론』(1963)이 바로 그 결실이다.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 발전한 『인간의 조건』은 노동·작업·행위의 의미를 현상학적으로 조명하였다. 이 활동들은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조건(수명, 세계성, 다원성)과 연계된다. 공간적 차원에서 볼 때, 세 가지 활동은 사적·사회적·공적 영역에서 진행된다. 행위와 공적 영역의 활성화를 통한 인간다운 삶을 강조한 이 책은 세계사랑에 대한 아렌트의 정치적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통에 대한 성찰은 『과거와 미래 사이』로 발전하였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틈새(시간의 공간화)는 바로 현재(nunc stans)이다. ‘이곳에서’ 아렌트는 사유 실험으로 중요한 정치적 개념들의 정신을 밝히고 있다. 근대와 전통의 단절, 역사 개념에 대한 비판, 권위와 자유의 진정한 의미, 교육과 문화 위기의 정치적 함의가 조명되고 있다. 1968년판에는 「진리와 정치」라는 주제의 중요 논문이 추가되었다.



아렌트는 1956년 헝가리혁명 소식을 들고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59년 ‘미국과 혁명정신’이란 주제의 프린스턴 대학교 세미나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혁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책이야말로 아렌트 ‘정치’사상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이진우 옮김, 한길사, 1996)에서는 행위가, 『혁명론』에서는 ‘혁명’과 ‘건국’이 핵심 개념어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시작의 개념적 변형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혁명을 단지 폭력이나 전제정과 연상시키는 기존의 선입견에서 벗어나 희망의 빛을 찾았다.



1960년 아이히만 재판은 선악문제에 대한 아렌트의 사유에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였다. 『혁명론』을 한창 집필하던 때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잔재인 아이히만 재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청하여 《뉴욕커 신문》의 재판 취재 특파원으로 활동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고자 하였으며, 이때 5부작 연재 기사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으로 출간하였다.

이때 다수의 유대인들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용서하고 유대인들의 잘못을 부각시켰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반유대주의자나 친나치주의자라며 혹평하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아렌트는 자신의 주장을 결코 철회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악행은 사유하지 않음과 판단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행적을 통해 우리 삶을 왜곡시킬 수 있는 무사유의 위력(Force)을 부각시켰다. 따라서 이 저서는 분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여유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어두운 시대와 투쟁하는 삶(1965~1970)
1960년 후반 아렌트는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폭력현상을 목격하였다. 이에 관한 아렌트의 정치적 성찰은 우리 독자들에게는 『폭력의 세기』(1968)(김정한 옮김, 이후, 2000)로 소개되었다. 이 책은 권력과 폭력의 관계를 독특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의 경우, 권력은 ‘공동으로 활동하는 능력’으로서 언어행위를 통해서 나타나는 진정한 정치현상이지만, 폭력은 언어행위가 중단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한계적인 정치현상이다. 얇은 분량의 이 책은 『혁명론』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 가운데 폭력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Люди в темные времена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1968)은 아렌트 저서들 가운데 우리 독자들에게 가장 먼저  소개되었다(*하지만 이미 절판되었다. 러시아아본의 이미지를 대신 띄워놓는다). 이 전기는 아렌트의 자서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브레히트의 시 「후손들에게」(첫 구절, “나는 참으로 어두운 시대에 살았구나!”)에서 차용하였다. 물론 아렌트의 저서에서 이 시어는 정치언어로 바뀌었다. 그는 공사(公私) 구분이 무너져 정신적으로 혼돈된 어두운 시대에 공적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사람들을 칭송하고 있다.



‘정신의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만년(1970~1975)

아렌트는 블뤼허와 야스퍼스의 사망으로 혼자 있게 되었을 때 『정신의 삶』(홍원표 옮김, 푸른숲, 2004) 이란 3부작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저서는 1970년대 초반 「칸트의 정치철학」 강의로 시작되어 1973~4년 에버딘대학교 기포드강의를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사유’와 ‘의지’에 관한 저서는 기포드 강의안 원고로 마련되었지만, 1975년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으로 ‘판단’에 관한 저서를 완결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뉴스쿨 강의안으로 구성된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 푸른숲, 2002)를 통해 그의 판단이론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활동적 삶은 현상세계에서 이루어지지만, 정신의 삶은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순간 진행된다. ‘사유’는 나와 자아 사이의 소리 없는 대화로서 현재‘시제’와 연계된다. 우연성과 자유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의지’는 의도를 시작하는 능력이며 행위의 근원으로서 미래시제와 연계된다. 반면에, ‘판단’은 상상속의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이며 사건의 종결 이후 작동되는 활동으로서 사유와 의지의 결과를 외재화하는 가장 정치적인 정신활동이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정신영역의 세 행위자(사유·의지·판단)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공조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세 행위자는 종종 국가를 구성하는 3부(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비유된다. 아렌트는 사적인 정신활동과 정신영역에서 공적 영역의 특성을 도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신의 삶』 3부작은 아렌트 정치철학의 완결이다. 제2권의 한국어판은 아쉽게도 미출간 상태이지만, 곧 출간 예정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렌트의 주요 저작들이 우리 독자들에게 소개되었고 일부는 곧 소개될 예정이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일부 소개되지 않은 저서들 역시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아렌트의 삶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영-브륄의 전기는 6월말 소개될 예정이다. 아울러 국내 연구자들의 저서 몇 권도 아렌트 이해에 많은 도움일 될 것이다.

‘사막화된’ 세계를 비옥한 옥토로 전환하려는 열정이 깔려 있는 아렌트의 저작들은 정치적 삶을 포함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지혜를 담고 있다. 그의 저작들에서 정치적 악과의 투쟁, 세계에 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투쟁하는 것이며, 또한 사랑하는 것이다(vivere est militare, vivere est amare).”(홍원표 한국외대 교수-정치철학)

07. 06. 24.

P.S. 기사의 서두에서 '이야기하기'를 아렌트가 강조했다고 언급돼 있는데, 그와 관련하여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렌트 연구서 <한나 아렌트: 삶은 하나의 이야기이다>(2000)도 소개됨 직하다.

물론 그보다 먼저 소개됨 직한 책은 거의 결정판 전기라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영-브륄의 <한나 아렌트: 세계사랑을 위하여>(2판 2004)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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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년, 당신에게 최고의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from Namyc.com 2007-12-17 02:28 
    photography: Books - bookcase top shelf by fil himself어느 덧 2007년도 저물어 갑니다. 2007년도 여느 해와 다름 없이 수 많은 문장들이 여러분의 망막위를 즈려밟고 지나갔을 텐데요. 그중에서 하나를 혹은 몇가지를 꼽아본다면 어떤 것들 인가요?2007년 마무리 겸 이런 주제가 생각이 나서 한번 포스팅 해봅니다. Namyc의 2007년 최고의 문장 보기"최고" 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내게는 "감동"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