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해야 할일은 미리 해치우기로 한다. '작가와 문학사이' 연재 23번째는 젊은 작가 한유주 편이다. 씨네21의 기사와 같이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7. 06. 23) [작가와 문학사이](23)한유주-읊조리다, 태초의 시간을 향해

‘달로’. 한유주의 첫 소설집 제목이자 등단작 제목이기도 한 이 낯선 어휘는 한씨의 독특한 소설작법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달로, 달로, 먼 옛날이야기로, 어느 왕들의 무덤은 무수한 바위를 깎아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끝이 없는 미로와 바닥이 없는 함정이 있다는, ……그런, 비정한 고대의 시간처럼, 달의 뒷면에는 어느 바다가 있고, 그곳에 발을 담그기 위해서는 비정한 긴긴 시간을 거꾸로 헤엄쳐서, ……, 그는 몸을 세워 일으켰고, 장대를 손에 쥐었다. (중략) 그의 장대는 몽상을 걷고, 백일몽을 걷고, 환영을 걷고, 기억나지 않는 꿈들과 희미한 이야기들을 걷고, ……, 허공을 한 아름 휘돌다가, 땅으로 떨어진다.’



달을 배경으로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이 아름다운 장면에 대한 다른 설명은 필요 없다. 느리게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복문과 우리를 잠시 침묵과 어둠 속에 붙잡아두는 생략부호, 그리고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느껴지는 문장의 리듬감. 우리는 그저 이 문장들을 읊조리면 되는 것이다. 그럴수록 현실은 우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어느덧 우리는 낯선 시간과 장소에 존재한다. 그곳은 “비정한 긴긴 시간을 거꾸로 헤엄”쳐야만 도달하는, 이 세계의 ‘뒤쪽’이자 ‘건너편’이다.

‘달로’는 바로 태초의 신화적 말씀의 세계를 향한 한씨 소설의 어떤 지향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지향적인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씨에게 ‘달로’ 가려는 의지란 훼손되지 않은 태초의 시간, 모든 매혹적인 이야기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바람에 다름 아니다. ‘달’이 태초의 시간과 옛날이야기의 세계라면, ‘로’는 그곳으로 가고자하는 작가의 바람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한씨는 시간을 거슬러 ‘달로’ 가려고 하는 걸까. 왜냐하면 이 ‘세계의 사진첩’에는 슬픈 일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파울 첼란의 삶과 시를 쫓아가며 쓴 ‘죽음의 푸가’에서 묵시록적으로 기록된 현대사의 비극은 지금의 문명세계에 대한 작가의 환멸과 그 세계의 변화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독문학 전공자답게 독일의 과거와 현재를 두서없이 배회하는 과정을 기록한 ‘베를린·북극·꿈’에서도 이러한 문명 비판적 독백은 반복된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과 슬픔이 한씨에게 태초의 과거를 향해 움직이도록 부추긴다.

한씨 소설이 탐색담의 성격을 띠면서도 자폐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대개 탐색담의 주인공은 세계를 향해 바깥으로 나아가는 반면, 한씨 소설의 화자들은 스스로를 “어두운 방 한구석” “좁다른 페이지들 안”(‘그리고 음악’)에 유폐시킨다. 그래서일까. 고통스러운 현대사에 대한 작가의 진술은 직설적이기보다는 우회적이고, 현실적이기보다는 비현실적이다. 마치 통각(痛覺)을 상실한 자의 고통에 대한 진술과도 같다.

그러나 모든 고통에 대한 진술은 사실 간접적이고 매개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란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세대에게 세계는 언제나 매개된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떠돌던 인간을 한 곳에 정착하게 하고 인간들이 가족과 사회를 이룰 수 있게 한 ‘뼈의 시대’는 지나갔다. “단단히 맞물려 있던 뼈들은 헐거워져서” 이제 “유령의 가벼운 몸, 없는 기억, 한없는 시간……(‘뼈’)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을 사랑하고 기억을 기억하는, 혹은 두려움을 두려워하고 무서움을 무서워하는 유령이 된다. 그래서 마치 무표정하고 창백한 얼굴, 비현실적으로 가늘고 긴 팔다리 때문에 무게감이 없는 듯한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이 유령들은 미디어를 통해서만 세계에 대해 경험하고 진술하는 한씨 소설에 특유한 어떤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심진경|문학평론가)

07. 06. 22.

P.S. 바흐친-모슨의 시학/산문학의 구도를 가져오자면 한유주의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시로 분류되어 마땅하다('시적인 소설'이요 '산문시'이다). "훼손되지 않은 태초의 시간, 모든 매혹적인 이야기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바람"을 그의 소설에서 읽을 수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고통스러운 현대사에 대한 작가의 진술은 직설적이기보다는 우회적이고, 현실적이기보다는 비현실적이다. 마치 통각(痛覺)을 상실한 자의 고통에 대한 진술과도 같"은 이유도 마찬가지겠다. 아름다운 모든 것이 굳이 소설일 필요는 없다...

씨네21(07. 06. 15) [신진 여성작가 3인] <달로>의 한유주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언어가 미끄러진다. 허공을 맴도는 단어들, 의미에 정박되지 않는 문장들, 응집되지 못한 채 흩어지는 문단들. 한유주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불편하며, 종종 난독증을 유발하기까지 하는 고통스러운 체험이다. 문장은 읽어내림과 동시에 기억에서 휘발되기 일쑤고, 문단과 문장, 단어를 거슬러 올라가 반복해 읽는 과정을 거듭해야 한다.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 <달로>는 각각의 작품이 사실상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잠언에 가까운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로, 달로, 세계는 현재를 그대로 간수하려는 오랜 습관이 있다.”(<달로>) “지구는 하나의 푸른 공이었다. 무료한 시간이면 신들은 지구를 굴리면서 공놀이를 했다.”(<죽음의 푸가>) 하나의 몸짓으로 수렴되지 않는 단어들의 윤무 속에서 그의 세계를 여행하는 이들은 행간을 떠돌며 이미지의 맥박을 느껴야 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을 하나 정도 짚어보자면 바로 자기분석이다. 예전부터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생각하는지가 너무나 궁금했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쓰는 것이었다. 인과관계나 서사적인 요소로는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 있었고, 자연스레 지금의 글쓰기로 이어진 것 같다.”

그래서 한유주의 글에는 우리가 흔히 소설에 기대하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매끈한 서사의 흐름에 독자를 흡입하는 대신, 역으로 몰입 자체를 끊임없이 지연시킨다. 이인성의 평을 빌리자면, “체질적으로 이야기에서 자유로운” 한유주의 작법은 넘쳐나는 “가짜 이야기들”에 대한 반작용의 지점에 있다. 전파를 타고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수신되는 메시지들, “세계를 14인치 텔레비전 화면 하나로 축소”하는 폭력적인 이야기들. 삶을 간결하게 재단해 틀에 집어넣는 것을 그는 거부한다.

“적어도 내 삶은 기승전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거기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려고 하지 않나. TV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 뻔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 뻔하면 쉽긴 하지만, 너무 설명을 하려 드니까.” 그래서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을 채워 넣는 것은 온전히 읽는 자들의 몫이다. 예컨대 <달로>는 우주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기억과 역사, 신화를 경유한 상징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각자가 가슴속에 지니고 있을 정서를 환기하고, 촉발한다.

“달은 정말 흔해 빠진 상징이다. 전세계 사람들이 딱 하나의 달을 두고 각자 하고 싶은 말들이 있고, 각자 부여한 의미가 있지 않나.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쓴 것인데, 독자들의 편지를 보니 그들도 읽으면서, 그런 것들을 느꼈더라. 각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고. 어쩌면 그게 나에게는 가장 기쁜 반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말줄임표 역시 그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빈 공간을 채워 넣을 목소리를 기다리는 것. 일방향처럼 보이던 독백은, 백지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독자에게 수신받기보다는 끊임없이 발신할 것을 촉구한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탐닉했다는 한유주이지만, 등단은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문예창작론 수업을 듣던 중 기말과제로 소설을 완성하게 됐고, 친구의 권유로 문예지에 응모한 것이 바로 등단으로 이어졌다. “당선됐다는 전화를 받고 얼떨떨했다. 지금은 그래도 덜하지만,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작가라는 자의식도 거의 없었다. (웃음)”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지만, 스스로는 “남들이 새롭다,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그렇지 않다”고 털털하게 이야기하는 그는 “내가 10년 뒤에도 글을 쓰고 있을까”를 곰곰이 자문하는 타입이다. 의미의 굴레에 속박되지 않는 자신의 작품처럼, ‘작가’라는 타이틀의 무게보다는 글쓰기 자체가 주는 매혹에 더욱 관심이 많다.

“글을 쓰다보면 모든 생각들을 완전히 다 잊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저 아, 내가 정말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찰나적으로 지나갈 때, 그게 너무나 좋다.” 대학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는 아마도 졸업 뒤 “9시 출근, 6시 퇴근하는 직장에 취직해 밥벌이와 글쓰기를 병행”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전에 우선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올 작정이고, 운이 좋다면 대륙의 공기 속에서 첫 장편이 탄생할 것이다. “대단한 걸 써야지, 하는 마음은 없다. 그냥 쓰는 것뿐이다. 10년쯤 뒤에 누군가가 한명이라도 내가 쓴 책을 읽어준다면, 그때까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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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7-06-23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고 싶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