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42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번째 산>에 대해서 적었다. 브룩스의 책은 전작 <인간의 품격>을 인상적으로 읽어서 마저 읽게 된 책이다. '두번째 산'은 에드먼드 버크와 밀턴 프리드먼의 세례를 받은 저자가(정치적 보수주의+경제적 자유주의)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답안으로 읽힌다...
















주간경향(21. 05. 17) 함께할 때 맛볼 수 있는 기쁨의 세계


‘두 번째 산’이라는 제목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인생에는 두 개의 산이 있다”라는 저자의 비유를 받아들이면 두 번째 산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첫 번째 산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 인생의 목표와 지향이라면, 두 번째 산의 무게중심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라는 구분이 그 차이를 잘 짚어준다. <두 번째 산>에서는 두 번째 산의 의미를 체계화하고 다양한 실례를 통해 ‘두 번째 산 오르기’를 보여준다. 물론 그의 의도는 많은 독자가 그의 견해에 공감하고 ‘두 번째 산’ 등정에 동행하는 것이다.


우리와는 차이가 좀 있겠지만, 저자가 진단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은 초개인주의 문화의 팽배에 있다. 그의 판단에, 초개인주의 문화의 발흥은 1960년대에 시작됐다. 바로 전시대까지 미국사회는 여전히 권위에 대한 존중이 강요됐으며, 개인보다는 조직과 집단이 우선시됐다. 하지만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두한 새로운 반문화(카운터컬처) 운동은 “나는 자유다”를 새로운 도덕 생태계의 구호로 탄생시켰다. 이에 따라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개인과 개인주의 라이프 스타일이 칭송됐다. 그렇게 반세기를 거치면서 개인주의 문화는 초개인주의 문화로까지 진화했는데,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하려 한다. 개인주의 문화가 그토록 예찬하는 자유가 과연 인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가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치명적인 결함은 그것이 아무런 방향성도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정치적 자유는 위대하지만, 그 확장판으로서 개인적·사회적·정서적 자유는 “완전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자유주의와 함께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능력주의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능력주의는 공동체를 각 개인이 서로 경쟁하는 집단으로 규정한다. 개인의 권리가 공동체적 가치나 덕목보다 우선하며, 자연스레 공동체적 유대는 파괴된다. 서로가 남들보다 더 잘나고 싶어 경쟁에 몰두하지만, 이 경쟁은 어느 순간 무의미해진다. ‘개인의 해방’은 한편으로 우리를 공동의 삶으로부터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저자 브룩스는 이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반란이라고 말한다. 개인주의 문화가 전시대의 획일주의에 대한 반란이었다면, 두 번째 산으로 비유되는 두 번째 반란은 이 ‘반란에 대한 반란’이다. 개인주의가 행복의 추구를 지상의 가치로 간주한다면 두 번째 산에 오르는 이들은 인생의 의미와 도덕적 기쁨을 추구한다. 행복이 자기만족의 상태라면 기쁨은 자기 초월의 상태와 연관된다. 자기만의 관심에 갇혀 있다면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 두 번째 산의 세계는 자기도취적 세계에서 빠져나와 타인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기쁨의 세계다.

첫 번째 산이 개인주의적 세계관과 연결된다면 두 번째 산은 관계주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다. 개인주의와 그 진화적 형태로서 초개인주의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삶에 이르게 할 뿐더러 타인과 인류 전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약화시킨다. 브룩스가 제안하는 관계주의는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간에 지속가능하면서 더 나은 문명으로 나아가려는 희망을 우리가 놓치지 않는다면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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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1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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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4 22: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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