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80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최근 영국문학 강의에서 키플링의 <정글북>과 <킴>을 읽었는데, 키플링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킴>을 대상으로 삼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비판적인 독해를 제시한 이후 많은 비평적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간경향(20. 06. 08) 작가 키플링보다 더 현명한 주인공의 선택


<정글북>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영어권 작가 최초이면서, 역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다. 1907년 42세의 그에게 수상의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 <킴>(1901)이다. 당대를 대표했던 다작의 작가이자 시인이었지만, 오늘날 문학사에서 키플링이라는 이름은 주로 <킴>에 의존하고 있다. 대표작인 만큼 키플링의 작가적 세계관과 정치적 견해를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 독자는 기대해볼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영국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데 있다. 식민지 인도를 배경으로 한 <킴>이 한편으로는 영국의 식민통치를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작품으로 의심받아온 이유다. 그런 만큼 주의해서 읽어야 할까.


제목의 ‘킴’은 주인공의 이름이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의 인도 주둔 영국군 하사관이었고, 어머니는 연대장 사택의 보모였다. 세 살 때 어머니가 콜레라로 세상을 떠나고 이후 아버지는 아편중독자로 생을 마쳤다. 고아가 된 킴에게는 출생증명서를 포함한 세 종류의 문서만이 유산으로 남겨졌다. 비록 영국인이라는 이유로 또래 아이들에게 특권을 행사했지만 킴은 ‘가진 것 하나 없는, 지지리도 가난한 백인’이었다. 그렇지만 킴은 죽은 아버지의 기대대로 언젠가는 어엿한 남자가 되고 강력한 부대 연대장의 호위를 받게 되리라고 상상했다.

주인공의 설정만 보면 <킴>은 성장소설의 서사를 기대하게 한다. 독특한 것은 그가 티베트에서 온 라마승과 동행한다는 점이다. 라마승은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설의 강을 찾아 순례하던 길이었다. 킴은 그의 제자가 되어 펀자브 지역의 라호르에서 북부의 히말라야에 이르는 긴 여정에 나선다. 이 여정의 끝에서 결국 라마승은 깨달음에 도달하는데, 결말만 보면 <킴>은 전형적인 구도소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킴>은 킴의 성장소설과 라마승의 구도소설의 결합에 그치지 않는다.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말에 인도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에서는 ‘큰 게임(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불리는,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 쟁탈전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국 첩보요원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되면서 점차 ‘큰 게임’에 관여하고 <킴>은 스파이소설의 외양도 갖추게 된다. 여정 중에 킴은 3년간 학교 교육도 받으면서 첩보요원의 자격을 갖춰나간다. 성장한 킴은 정부기관의 요원으로 활약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한편으로 깨달음을 얻은 라마승은 킴을 제자로 호명한다. “윤회의 수레바퀴는 공정하다! 우리는 온전히 해방되었다! 내게로 오너라!” 과연 킴의 선택지는 무엇이 될까. 영국의 제국주의를 세뇌하는 작품으로 비판받은 것과는 달리 <킴>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킴은 백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다가도 한편으론 백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어린 나이에도 러시아와의 첩보전에서 일익을 담당하지만, 라마승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수레바퀴에서 해방되려는 열망도 느낀다.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고통받는다는 점에서는 모든 인간이 공통적이다. 영국인이건 인도인이건 혹은 러시아인이건 차이가 없다. 비록 현실세계에서는 서로의 국익을 위해 각축을 벌인다고 해도 말이다. 키플링 자신은 제국주의자로서 비서구 지역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백인의 책무’를 믿었지만 <킴>의 결말이 그러한 믿음과 합치하는가는 의문이다. 적어도 그런 결론을 유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킴>은 작가 키플링보다 더 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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