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걸러서 '작가와 문학사이'를 옮겨놓는다. 이번주는 소설가 편혜영 편이다. 첫 창작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을 통해서, 우리문학에서는 좀 낯선 '하드고어 원더래드'의 세계를 펼쳐보인 바 있는 작가이다(첫 창작집의 제사가 '안녕, 시체들'이었다). 개인적으론 그녀의 문장들을 좋아하며(건조한 단문들이다) 그녀의 장편소설이 기대된다(그게 가능한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래 글에서 평론가는 그녀의 세계를 인간이하(subhuman)의 인간성 탐구로 규정하고 있다. 

경향신문(07. 05. 12) [작가와 문학사이](17)편혜영-인간 이하의 인간성 탐구

여기 죽음의 수용소에서 떼죽음을 당한 유태인과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도살된 가축이 있다. 대개 학살된 유태인은 연민과 공감의 대상이 되지만 도살된 가축은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런가? 아니, 어쩌면 인간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을 비교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존 쿳시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서 노작가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이 두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다르지 않아야 함을 주장한다.

흔히 공감(sympathy)이나 감정이입(empathy)을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것으로 보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주체의 자기 이해에 불과하다. 나는 나를 연상시키는 존재만을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란 상상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물의 마음이란 의인화와 동일시의 과정을 거친 이후의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동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인간성(humanity)이란 동물의 마음, 혹은 동물됨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감과 감정이입을 불가능하게 하는 속성에 불과한 것이다.



편혜영의 소설에는 바로 그런 인간성이 실종된 존재들, 예컨대 다양한 혐오동물(쥐 바퀴벌레 개구리 구더기 등등)과 썩어가는 시체 혹은 시체나 다름없는 인간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인간적으로’ 참기 어려운 악취(얼마나 지독했으면 “다락의 쥐들조차 미쳐 날뛰게” 할까?)를 풍기고 ‘인간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괴한 모습을 지닌 존재들이다. ‘아오이가든’에서 인간은 고양이를 삼키다가 개구리를 낳다가 급기야 개구리가 된다. 인간과 고양이, 개구리는 뒤섞이면서 인간을 인간 이상이거나 인간 이하가 되게 한다.

그런 지경이니 편혜영의 소설에서 “이성적이고 정당한 것은 내가 아니라 개”(‘만국 박람회’)라는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또 “우리는 결국 또 하나의 쓰레기가 되어 소각장에 던져질” 운명(‘맨홀’)이라는 말에 충격받지 말기를. 오히려 편혜영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다른 존재가 될 때까지” 변신을 거듭한다. 급기야 인간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인 시체의 자리에 서게 된다. 편혜영의 소설은 그렇게 인간의 지위를 단백질의 자리로까지 끌어내린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역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이 아닌 모든 비루한 것들과의 공감을 위한 제스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른다. 아무리 시체되기, 동물되기 ‘놀이’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진짜 시체가 되기 전에는, 진짜 동물이 되기 전에는 시체와 동물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시체와 동물이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시체와 동물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은 시체와 동물이 되는 순간 그저 시체와 동물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게다가 시체와 동물은 말이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시체와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우리는 나와 다른 존재들, 흔히 타자라고 불리는 존재들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혜영은 시체 동물 사물 등과 같은 비인간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비인간적 존재들의 총체임을, 즉 잡종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썩어가는 시체의 살조각은 물고기의 밥이 되고 다시 그 물고기는 ‘입맛 다시는 반찬’이 되는 순환구조를 상상해보자(‘시체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시체와 물고기가 뒤섞인 존재가 된다. 우리 인간이 시체와 물고기의 마음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 안에 시체와 물고기가 있다는 자각에서부터 나와 다른 존재와의 불가능한 공감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니 편혜영 소설의 불편함과 불쾌감을 ‘인간적인’ 편함과 쾌감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말자. 그 ‘비인간적인’ 불편과 불쾌야말로 ‘너’라는 불가능한 허구(fiction)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심진경|문학평론가)

07. 05. 12.

P.S. 캐리커쳐와 사진 속의 작가는 너무도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내가 실제로 본 작가는 사진 속 이미지와 같았지만 작가 편혜영의 이미지는 검은 옷을 입은 캐리커처와 가깝다. '편혜영'이란 이름의 두 동거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작년 11월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자 인터뷰('편헤영-정미경'편)를 페이퍼로 옮겨놓은 게 있는데, (링크할 주소가 너무 길어서)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에 관한 대목만을 다시 옮겨놓는다. 그녀의 대표작이면서 작년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천성적으로 착하고 교훈적인 얘기엔 흥미가 없어요. 이질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좋아하다 보니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상상력이 발달한 것 같아요.”

작품과 작가의 실제 이미지가 상충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사육장 쪽으로>의 편혜영(33)씨는 그 충돌이 유별나다. 얌전하고 부끄럼 많은 성격을 보면 ‘천상 여자’이지만, 그의 작품은 엽기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통해 독자의 청각과 후각에 극한의 공포를 불어넣는다. “제 소설을 보고 집에 혼자 있을 때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분들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쥐 배 가르며 놀아요’라고 농담했어요.(웃음) 제 작품이 저의 인상과 괴리되는 데서 오는 충격효과가 컸던 것 같아요.”

<사육장 쪽으로>는 평화로운 전원주택 마을의 중산층 소시민이 파산 경고장과 마을 사육장 개들의 습격을 동시에 받게 된, 강렬한 위기의 하루를 그린 단편. “처음부터 중산층의 속물성과 깨지기 쉬운 허구를 드러내자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이미지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생겼어요. 사육되는 개들은 사육장 안에서만 생활하고 삶과 죽음의 방식이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도시인과 비슷하기도 하잖아요.”

편씨는 “전에는 문제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극단으로 이미지를 밀고 나갔는데, 이젠 그런 이미지들에 손이 안 간다”며 요즘의 변화에 대해 말했다. “워낙 강력한 감각이라 중복되면 효과가 체감되게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주인공의 아기가 개한테 물리는 장면도 묘사를 참았는데, 많은 분들이 여전히 잔인하게 느끼시더라구요. 아, 나는 태생이 끔찍해서 이런 걸 너무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자책했어요.”

2000년 등단해 그 이듬해부터 직장생활과 소설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편씨는 “사무원의 쓸쓸함에 관한 소설은 열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며 웃었다(*그런 쓸쓸함에 관한 소설도 읽고 싶다, 사실은). “사실 소설이라는 게 노동으로선 참 형편없는 일이거든요. 하지만 소설을 쓰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유일하게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매혹적이에요. 사회적 인간으로 살다 보면 남들 눈에 보이는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은데, 소설을 쓸 때만은 그런 고민이 없으니까요.”

◆ 심사평: 삶의 부조리 감각적 형상화 탁월
<사육장 쪽으로>는 우리 소설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야생의 상상력이 그로테스크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도시 인근의 전원주택단지를 지배하고 있는 삶의 부조리를 이 소설만큼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소설도 드물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사육장의 개 짖는 소리로 청각화한 이 야만적인 공포는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소시민의 삶을 위협하는 삶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놀라운 메타포라고 할 만하다.

편혜영이 이런 종류의 알레고리에 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상적 삶을 특유의 판타지로 추상화하는 알레고리 작가로서의 편혜영의 독특한 위상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은 역겹고 끔찍하며 엽기적인 상상력의 창고와도 같았다.

그러나 <사육장 쪽으로>에 이르게 되면 이 작가가 그 기괴한 악몽 아래 하나의 현실적인 밑그림을 살짝 배치해 둠으로써 독자들에게 해몽의 실마리를 제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실과 판타지가 절묘하게 섞여있다고 할까. 파산 직전에 이른 가장이 치매에 걸린 노모와 개에게 물어뜯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 헤매는 이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의 현실이 이 끔찍한 악몽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문학평론가 신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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