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는 5회에 걸쳐 한국현대시 강의도 진행하는데 어제 첫 시간에 다룬 시인은 김소월이다. 선택의 여지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현대시사의 첫 머리에 오는 시집이 <진달래꽃>(1925)이기 때문이다(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시집이 만해의 <님의 침묵>(1926)이다). 따라서 현대시사 이해의 첫 과제는 소월의 시적 성취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해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의는 유감의 말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데 소월시를 읽을 때 필수자료로 읽을 만한 평전이 아직도 나오지 않아서다. 평전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책이 없지는 않으나 모두 연보를 자세하게 푼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시사의 많은 시인들의 평전이 나와있음에도 유독 소월의 경우에만 그 위상에 걸맞는 평전이 나와있지 않다. 백석과 함께 학계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는 시인이라는 사실에 비추어도 이례적이면서 불만스러운 현실이다.

결과적으로는 한국 현대시 이해에 온전한 첫발을 내딛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어정쩡한 모양새밖에 되지 않는데, 나로선 무엇보다도 스승인 김억(김안서)와의 관계가 잘 해명되어야 소월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소월은 김억의 주선에 의해 시들을 발표했다. 요즘식이라면 스승이 제자의 매니저 노릇을 한 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호의적이면서 동시에 불화관계였다. 김억의 진술에만 의존할 수 없는 이유다). 더불어 소월의 독서 경험과 번역작업 등도 제대로 검토되어야 한다.

이러한 여건이 아직 갖춰지지 않아서 나는 소월시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가설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작 ‘진달래꽃‘만 하더라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라는 통상적인 이해는 이 시의 시제가 미래시제라는 것을 간과한다. 오지 않은 이별을 노래한다는 것은 거꾸로 현재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님이 아직 내 곁에 있다면 진달래꽃을 가시는 길에 뿌리겠다는 제스처는 ‘가진 자의 여유‘로 읽힌다. 정반대로 ‘사랑의 기쁨‘을 반어적으로 노래한 시가 되는 것이다. 너무도 잘 알려진 시이건만 ‘진달래꽃‘에 대한 이해조차도 나는 미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시인이 소월이다. 어제 강의에서는 그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언제나 제대로 된 규모의 좋은 평전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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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 2019-07-05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억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와 김소월이 읽은 어떤 번역시와 김소월의 시는 어떤 삼각형의 꼭지점으로 이어져 있을 듯 합니다.

로쟈 2019-07-05 06:29   좋아요 0 | URL
네, 당연히 포함되고요, 그밖에 소월은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번역하기도 했고 짧게 일본유학생활도 경험했기에 그에 대한 자세한 검토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