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3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강의에서 읽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에 대해서 적었다. 대략 2000년대 이후 2012년 절필하기까지의 작품들이 그의 말년작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싶다. 케페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죽어가는 짐승>(2001)부터가 되는지. 그의 마지막 작품은 <네메시스>다...



 













주간경향(19. 06. 24) 죽음을 앞둔 보통사람의 보편적 운명


지난해 세상을 떠난 필립 로스는 생전에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간판 작가였다. 2016년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오히려 문학독자들의 시선은 필립 로스를 항하기도 했다. 밥 딜런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수상자였다면 필립 로스는 누구라도 동의할 만한 수상 후보였다. 미국 최고의 작가라는 평판과 30여편의 소설을 발표한 다작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필립 로스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처음 정식 판권계약을 맺고 출간된 <에브리맨>(2006)이 신호탄이었다. 2012년 절필을 선언한 그에게는 말년작의 하나다.

노년에 이른 작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필립 로스의 말년작들은 노년과 죽음을 주제로 다룬다. <에브리맨>도 마찬가지다. ‘보통사람’을 뜻하는 ‘에브리맨’은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가게의 이름이지만 죽음을 주제로 다룬 이 작품에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의 주어를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구체적인 한 인물의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운명을 환기시켜준다는 점에서는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도 비교하게끔 만든다(‘이반’이라는 이름 역시 러시아에서는 가장 흔한 이름이다). 

이반 일리치의 부고와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에브리맨>도 이름 대신에 ‘그’라고만 지칭되는 주인공의 장례식으로 시작해 그가 살아온 생애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으로 따라간다. 광고회사의 아트디렉터로서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삶을 산 축에 속하지만 그는 사생활에서는 그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 끝에 혼자서 은퇴자 마을에 살다가 심장수술 중에 사망한다. 그렇지만 공적인 경력에서나 사생활에서 그의 삶이 특별하거나 도드라진 것은 아니다. 가족과 일부 지인만 참석한 장례식도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하게 치러진다. 오히려 인상적인 것은 그런 평범함이다.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라는 토로는 작가의 육성으로 들린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일리치는 의문의 병으로 죽어가면서 마지막까지 죽음에 대한 의식으로 고통받는다. 죽음이 그가 살아온 삶과 성취를 무효로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중시킨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 전체가 기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는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주인공 일리치는 죽으면서 죽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란 존재가 부정된다면 그의 죽음이란 사건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에브리맨>에서는 그러한 회심과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부정하는 이반 일리치와 달리 <에브리맨>의 주인공은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을 좌우명으로 여긴다. 비록 후회할 만한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을 되물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는 수용적 태도만 가능한 것일까. 소설의 결론은 아니지만 필립 로스는 젊은 시절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주인공의 생각에 슬쩍 끼워넣는다. 그것은 죽음의 부당성에 대한 생각이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필멸적 존재가 갖는 반항의 최대치다. <에브리맨>은 그 반항을 주제로 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보통사람들을 위한 ‘보통사람’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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