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곳의 지방강의를 마치고 귀경중이다. 서울역에서는 다시 버스로 환승해야 하기에 자정이 넘어 귀가하게 된다. 요즘은 버스보다도 KTX를 더 자주 타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이동간에 생각난 작품은 체호프의 단편 ‘우수‘다. 가난한 마차꾼 이오나의 이야기. 아들을 잃은 슬픔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나중에는 마차를 끄는 말에게 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단편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보다 이오나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제목을 빌려, 우수에 잠기게 하는 것은 그걸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동간에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 아무런 대화 없이 묵묵히 시간을 보내야 하니 이오나의 처지와 비슷한 면이 있다. 비록 ‘우수‘의 배경은 겨울이라는 점에서 눈발을 맞으며 고개를 푹 수그린 이오나까지는 흉내내지 못하겠지만 차창으로 비치는 충혈된 눈을 보자니 상태가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무얼 잃어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젊음을 잃어버렸나?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1920)을 강의에서 읽다가 두 여주인공 어슐라와 구드룬의 나이가 스물대여섯임을 다시 확인한다. 소위 ‘사랑에 빠진 여인들‘의 나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아직 어린 나이일 수 있으나 당시에는 세상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나이였기도 하다. 남자 주인공인 버킨과 제럴드는 그보다 조금 위이고. 사실 이 소설에서 연애하는 커플은 버킨과 어슐라, 제럴드와 구드룬 외에 버킨과 제럴드가 추가된다. 이른바 남자 사이의 완벽한 관계를 모색하는 남남커플이다.

<사랑의 빠진 여인들>의 차별성은 제목과는 달리 이 남남커플의 모색에 두어진다. 로렌스의 마지막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이러한 남남커플 혹은 남자끼리의 사랑이다. 나는 그것이 로렌스 소설이 수축이라고 생각한다. 이성간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사랑에 빠진 여인들>의 결론이라면 제목은 ‘사랑에 빠진 남자들‘로 읽어도 틀리지 않는다. 로렌스가 발을 디뎠으되 끝까지 가지 않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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