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신문에 기고했던 기사를 옮겨놓는다. 갑작스런 청탁을 받고 급조한 것이어서 미흡한 대목들이 없지 않은데, 핑계라면 분량이 너무 한정돼 있었다는 것. "보드리야르의 사상과 업적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 그의 학문(사상)이 어떻게 전수돼고 있는지"에 대해서 12매 분량으로 쓰는 일은 나의 능력을 벗어난다. 그저 한 '독자'로서 몇 가지 인상만을 나열하는 데 만족했다.
대중적으로는 ‘매트릭스’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2007)가 세상을 떠났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하이퍼리얼리티의 이론가에게 걸맞은 표현을 쓰자면 이 세계로부터 ‘로그아웃’했다. <사물의 체계>(1968)로 지식사회에 명함을 내민 지 얼추 40년만이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적/이론적 삶에 대한 본격적인 독해와 평가가 이제 남은 이들의 몫이 되었다. 그것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네는 두 가지 알약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처럼도 보인다. 빨간약이냐 파란약이냐, 혹은 보드리야르를 기억할 것인가 잊어버릴 것인가.
빨간약을 입에 넣을 경우 우리에게 펼쳐지는 초기화면은 1960년대 중반 프랑스 지식계의 풍경이다. 보드리야르는 낭테르대학에서 <현대세계의 일상성>(1968)의 저자 앙리 르페브르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고 롤랑 바르트의 <모드의 체계>(1967)을 연상시키는 첫 번째 연구서를 출간한다. 그것이 <사물의 체계>이다(*국역본이 신뢰할 만한지는 의문이다). 이 ‘사물’에 대한 관심은 그의 이론적 여정에서 줄곧 견지된다.
자신의 이론적 여정을 요약해주고 있는 책 <암호>(2000)에서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첫 번째 ‘패스워드’가 바로 ‘사물(objet)’이었다. "나에게 사물은 암호 중의 암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러한 관점을 취했는데, 왜냐하면 주체라는 문제틀과 단절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물의 문제는 (...) 지금까지도 나의 사유의 지평으로 남아있다."고 그는 적었다.
보드리야르가 다루는 사물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상품’들이다. 1960년대는 사물들이 득세하게 된 시대, 본격적인 상품들의 시대였다(동시대 작가인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1965)을 떠올려보라). 그러한 시대를 일컫는 말이 ‘소비사회’이며 이 새로운 사회를 주도하는 것은 더 이상 생산이 아니라 소비이다. 그의 초기 사회학적 작업은 이 소비사회의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에 바쳐진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소비사회에서의 상품가치는 ‘사용가치/교환가치’라는 문제틀만으로 더 이상 유효하게 분석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재평가하면서 ‘기호가치’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요즘 쓰는 말로는 ‘브랜드가치’가 예가 되겠는데, 가령 사치성 소비재, 소위 ‘명품’에 대한 수요는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란 용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명품의 가치는 말 그대로 ‘이름값’이기 때문이다.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1972)은 그러한 ‘이름값’으로서의 기호가치에 대한 이론적 분석이다. 그에 따르면 상품은 더 이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데 봉사한다.
상품들과 기호가치가 범람하는 보드리야르적 세계는 1970년대 후반 이후에 컴퓨터화되고 디지털화된 세계로 ‘버전-업’된다. 그것이 그가 펼쳐놓는 두 번째 화면이며, 보드리야르는 이것을 ‘코드’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부른다. 여기서도 여전히 사물들은 그의 주된 관심대상이지만 그 존재론적 차원은 변화한다. 이것은 가상세계이지만 현실과 가상이라는 구분/구획 자체가 무효화되기에, 즉 더 이상 원본과 모사물(시뮬라크르)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가 유지되지 않기에 ‘가상화된 현실’이고 ‘현실화된 가상’이다. 그러한 현실-가상을 축조하는 방식이 시뮬라시옹이다(이 새로운 시대, 포스트모던은 ‘나훈아’의 시대가 아니라 ‘너훈아’의 시대이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세계는 가역성의 원리가 지배하며 극단적으로 말해서 죽음조차도 불가능한 세계이다(우리는 로그아웃할 수 있을 따름이다). “걸프전을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악명 높은 주장은 그러한 차원에서 제기된다. 이 ‘불가능한 죽음’을 이제 우리는 ‘보드리야르’라는 기호-이름에도 되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의 주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가 보드리야르라는 ‘빨간약’을 먹을 때마다 우리 눈앞에 언제나 되살아날 것이다.
07. 03. 19.
P.S. 짤막한 기고문을 작성하는 일이라고 해서 품이 덜 드는 건 아니고 나는 부랴부랴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에서 리처드 레인이 쓴 <장 보드리야르>(루틀리지, 2000)을 구해 읽어보았다. 물론 서론과 문헌해제를 주로 읽어본 것이었지만(*최근 번역돼 나왔다. -08. 03. 07).
그리고 몇몇 관련문헌들을 읽어보았다. 이런 글을 쓸 때 요긴한 책은 존 레흐트의 <현대 사상가 50>과 존 페파니스의 <이질성의 철학>, 그리고 미셸 리샤르 등이 쓴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 등이다.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도 보드리야르에 대해서 한 장이 할애돼 있다(이 장은 개정판에 추가된 것이며,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 초판에는 빠져 있다).
한편, 처음 작성한 원고에는 다음과 같은 자기변명조의 문단이 포함돼 있었다: "내게 잠시 부여된 역할은 얼치기 장의사의 그것이다. 관을 짜기 위해서 죽은 자의 치수를 재듯이 그가 남긴 이론 혹은 사상의 사이즈를 재는 것이 나의 몫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하지만 내가 거들지 않더라도 견적은 이미 다 나와 있다!). 모사물(시뮬라크르)이 실재를 대신하는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실 보드리야르 자신이 ‘지적 사기꾼’이란 혹평도 심심찮게 들었던 만큼 그의 사상에 대해서 섣부른 관견을 늘어놓는 일이 심하게 무례한 건 아니겠다." 그건 내가 다른 사상가들에 관해서였다면 섣불리 이런 일을 맡지 않았을 거란 얘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