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2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산책방)을 강의에서 다룬 김에 간단히 적었다(분량상 더 자세히 적지 못했다). 반스의 책은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 프랭크 커모드의 책과 원제가 같다. 지금은 절판된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문학과지성사)인데, 강의에서도 그와 관련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책으로는 반스의 에세이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다산책방)도 같이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주간경향(19. 04. 29) 시간의 파괴적인 힘 앞에 선 나약한 인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2011년에 ‘너무 늦었다’는 평을 들으며 줄리언 반스에게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안겨다준 작품이다. 앞서 세 차례나 최종심에 올랐으면서도 매번 고배를 마신 반스는 수상작 발표 전에 어떤 예감을 가졌을지 궁금하다. 물론 제목의 ‘예감’은 문학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원제를 그대로 옮기면 ‘종말의 예감’ 정도라서다.

종말은 시간이라는 지평에서의 사건이다. 곧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주어지는 불가피한 조건이다. 이 소설이 시간에 대한 성찰로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고 운을 뗀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의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는 문장을 향해 간다. 종말로 향하는 시간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무력화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시간 속에서 모든 인간은 늙어가며 삶의 성취는 마모되고 그 의미는 변질되어 간다. 세상을 ‘거대한 혼란’으로 몰고가는 시간의 파괴적인 힘 앞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패배자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반스가 제시하는 것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토니 웹스터의 사례다. 아직 본격적인 인생이 시작되기 전 학창시절에 토니의 패거리는 셋이었다. 그들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손목시계를 손목 안쪽으로 돌려서 차고 다녔다. 허세이긴 했지만 시간에 대한 저항의 상징성도 갖는다. 시간을 사적이면서 내밀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 사이에 전학생 에이드리언 핀이 끼어든다. 명민한 수재로 수업시간에 교사들과 당당하게 논쟁하는 능력자다. 카뮈와 니체를 읽은 에이드리언은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는 카뮈의 말을 복창하고 “역사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역사 허무주의적 견해를 제시한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회의주의적 견해는 얼마나 정당하며 어디까지 방어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재검토하게 만드는 것은 에이드리언의 자살이다. 대학에 진학한 토니는 베로니카라는 여학생을 사귀다 헤어지는데, 베로니카는 다시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고 에이드리언은 토니에게 둘이 데이트를 해도 좋은지 묻는 편지를 보낸다. 토니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엽서와는 별개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악담과 저주를 담은 답장을 보내고 장기간의 미국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러고는 40년의 세월이 지난다. 

이제 60대가 된 토니는 그 사이에 결혼해 자녀를 두었지만 아내와 이혼했고 직장에서도 은퇴한 뒤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 그가 뜻밖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는 일이 이야기의 출발점인데, 그 유품은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500파운드의 돈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다. 토니는 뒤늦게서야 에이드리언의 자살에 자신도 연관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건네받은 에이드리언의 일기 일부에서 에이드리언은 ‘축적’이란 용어를 써서 자신의 상황을 수학공식으로 표현하는데, 축적이란 토니의 표현으로는 ‘책임’에 해당한다. 자신의 과거를 잊거나 부인하던 토니는 비로소 충격적인 진실과 대면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자각한다. 기억의 서사로서 ‘종말의 예감’이 책임의 서사로 전화되는데, 이 책임이 파괴적 시간에 맞서는 인간적 대응이다. 


19. 0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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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5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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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5 18: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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