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중국문학 강의에서 바진(1904-2005)의 <휴식의 정원>(1944)을 읽었다. 바진의 작품으로는 마지막 장편 <차가운 밤>(1947)을 몇년 전에 읽었고, 이번이 두번째다. 대표작 <가>(1931-32년에 발표되고 단행본은 1933년에 나온다)를 다루려다가 미래의 과제로 남겨놓았다.

<가>는 바진의 초기작이면서 대표작의 위상을 갖고 있는데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1901)이 비교거리가 될 만한 작품이고 강의에서도 그렇게 언급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가족사 소설로는 펄 벅의 <대지>(1931-35)가 비교거리인데 그렇게 비교한 논문을 보지 못했다(중국에는 있을지도).

<휴식의 정원>은 중편으로 <가>를 필두로 한 30년대의 ‘격류 3부작‘과는 분위기가 다르고 중년(마흔)이 된 작가 바진이 변화된 창작관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작중 화자가 작가이기 때문에 이 변화를 인물의 것으로 봐야 할지 작가(바진)의 것으로 봐야 할지 확실하지는 않다. 이 소설에서 화자가 완성하는 소설의 제목도 친구의 저택 이름인 ‘휴식의 정원‘이고 바진의 소설 제목도 ‘휴식의 정원‘이다. 자연스레 ‘소설이란 무엇인가‘가 작품의 한 주제가 된다.

다른 주제는 이 저택 ‘휴식의 정원‘의 전주인과 현주인이 갖는 문제성이다. 전주인 양씨 가문은 몰락해가는 봉건지주 집안으로 특히 셋째 나리는 가산을 탕진하고 무력하게 몰락해가는 구시대의 대표격으로 나온다. 포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편에 속하지만 의지박약한 생활무능력자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봉건지주계급의 습속이다. 아무일도 할 필요가 없었던 계급은 아무일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를 낳는다.

반면 ‘휴식의 정원‘의 현주인은 대학까지 나와 교수 노릇까지 한 지식계급이다. 하지만 부친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뒤 고향에 내려와 ‘휴식의 정원‘ 주인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재혼으로 얻은 젊은 아내가 있고(소설을 좋아하며 현명한 여성이지만 집안에서 발언권은 작다) 전처 소생의 아들이 있다. 십대에 접어든 아들이 외할머니의 비호하에 버릇없이 커 가지만 방임한다. 이 아들은 소설 말미에서 부주의한 행동으로 익사한다.

결국 바진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휴식의 정원 전주인과 현주인 집안의 비극이다. 이 비극을 바진은 유한계급의 습속 때문에 빚어지는 걸로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는 <가>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바진의 번역된 작품이 제한적이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정도까지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