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이탈리아 문학기행 중에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다시 읽고 적었다. 비록 직접적인 배경인 리도 섬에까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베네치아의 풍광 속에서 작품의 주제를 음미해볼 수 있었다.  


















주간경향(19. 03. 18) 휴양지에서 만난 아름다운 소년


이탈리아 문학기행에 나서 베네치아에 들렀다.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를 다룬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필두로 해 많이 있지만 20세기 작가의 작품으로는 단연 토마스 만의 중편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12)을 꼽을 수 있다. 독일문학 작품임에도 그의 책을 가방에 챙겨온 이유다. 나이는 차이가 나지만 주인공인 중견작가 아셴바흐에게는 집필 당시 30대 후반이던 토마스 만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리고 독자는 그 아셴바흐의 모습에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므로 작가와 독자는 그렇게 독서를 매개로 이심전심이 된다.

토마스 만의 또 다른 대표작 <토니오 크뢰거>(1903)에서 주인공 크뢰거가 뮌헨에서 만의 고향인 뤼벡과 햄릿의 고향 헬싱괴르로의 동선을 보여준다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아셴바흐는 뮌헨에서 남쪽 베네치아로 떠난다. 북쪽으로의 여행이 자기인식과 극복을 위한 여정이라면 남쪽으로의 여행은 탈출과 방임을 위한 여정이다. 평소 창작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던 아셴바흐는 기분전환에조차도 소극적이었지만 어느 날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충동에 몸을 맡긴다. 그가 향한 곳은 아드리아해의 한 섬. 바로 베네치아의 리도 섬이다. 



휴식차 떠난 여행이었지만 아셴바흐는 예기치 않게도 휴양지에서 완벽한 외모의 미소년 타치오을 보게 된다. 놀랄만큼 아름다운 소년에게서 에로스 신까지 떠올리며 아셴바흐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정말이지 나를 기다린 건 바다와 해변이 아니었어. 네가 여기 있는 동안 나도 여기에 있어야겠어!” 그렇지만 그는 강렬한 유혹을 뒤로 하고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만약 그가 결심한 대로 섬을 떠났다면 이 소설은 이성과 의지가 관능과 정념의 유혹을 극복해낸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사랑관을 그대로 반복한 ‘플라토닉 러브’의 서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셴바흐는 운명의 짓궂은 희롱에 말려든다. 호텔에서 짐을 엉뚱한 곳으로 부치는 바람에 그의 체류는 부득이하게 연장된다. 떠나려던 숙소로 다시 되돌아온 아셴바흐는 타치오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 빠져든다. 그의 사랑은 일방적인데, 거의 온종일 가까이에서 타치오를 바라보면서도 아셴바흐는 타치오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오십을 넘긴 중년의 작가는 미소년을 오직 바라보기만 하면서 숭배한다. 아셴바흐는 타치오의 존재 자체에 압도당하며 도저한 열정에 몸을 떤다. 베네치아에 전염병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떠나가는 와중에도 사랑에 빠진 자로서 그는 타치오만을 염려하며 타치오가 떠날까봐 두려워한다. 마침내 아셴바흐는 전염병에 걸려 숨을 거둔다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줄거리만 보자면 정념의 파국을 보여주는 교훈적인 작품으로도 읽힌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계산법은 복잡하다. 그는 아셴바흐의 입을 통해서 그러한 예술의 교육적 이념에 대해서도 냉소를 아끼지 않는다. “예술을 가지고 대중과 젊은이를 교육하겠다는 생각은 해서는 안될 대담한 발상이야.” 천성적으로 타락의 심연에 빠져드는 성향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토마스 만 자신의 동성애로 인한 은밀한 고충을 엿보게 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이성과 욕망 사이의 항구적인 갈등에 대한 성찰도 이끌어낸다. 

베네치아의 유혹을 뒤로 한 채 나는 베네치아를 빠져나오는 바포레토(수상버스)에 바삐 몸을 실었다. 

19. 0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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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dai 2019-03-14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8. 03. 13이라 하셔서 잠시 작년에 쓰신 글인 줄 알았습니다.ㅎ

로쟈 2019-03-14 22:17   좋아요 0 | URL
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