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옮겨오는 경향신문의 연재 '작가와 문학사이'이다. 이번주에는 시인 김선우씨가 '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평론가 신형철씨가 거들고 있다. 한겨레('모 일간지')의 '18도' 지면에서도 그녀의 칼럼을 종종 읽을 수 있으므로 젊은 시인들 가운데는 지명도가 높은 편이다. 시집으론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물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등이 있다.

 

경향신문(07. 03. 03) [작가와 문학사이](8)김선우-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만취한 여자 하나 밤거리에서 비틀대고 있었다. 몸 가누지 못하고 기어이 쓰러져 머리가 깨졌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피 흘리던 그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한다. “아아 상쾌해.”(‘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80년대는 “격렬한 외상의 날들”이었으나 90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었다. 한 시절은 속절없이 저물고 함께 꾸던 꿈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몸 상할 일 없어 좋겠구나 했는데 꿈 없는 세상이 끔찍해 마음은 속에서 곪아갔다. 그러니 아시겠는가, 무엇이 그녀를 쓰러뜨렸는지. 취중난동은 자해공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선우, 1970년에 태어나 1996년에 시인이 되었다.

그녀가 여성성의 매혹과 위력을 새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머리 미처 성할 날 없었을 것이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얼레지는 얼레지/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얼레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을 바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족하는 아름다움이다. 원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 긍정의 여성주의다. 꽃을 여성의 생식기와 포개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생각도 난다. 특히 “얼레지는 얼레지”가 이 시를 어여삐 들어올린다. 힘 있는 것들이 발설하는 자기확인의 동어반복은 역겹지만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자기확인은 당당하다. 이 시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별 자체를 해체하는 길 말고 여성의 고유성을 더욱 보듬는 길을 택했다. 이를테면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어라연’)라고 말하는 긍정의 길이다.

제 안의 여성(어미)됨에 지극한 이라면 고통 없이는 볼 수 없는 사태들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 앞에/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피어라, 석유!’)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검은 피’에 굶주린 이들 앞에서 어머니-대지는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화자-석유는 제 자신이 차라리 ‘무용한 꽃’이거나 ‘무력한 꽃’이기를 바란다. 안쓰러운 반전시위다. 둘 다 꽃을 노래하고 있지만, ‘얼레지’의 관능과 ‘석유-꽃’의 절규 사이의 거리는 멀다. 애틋한 긍정에서 애절한 부정까지의 이 거리가 바로 김선우 시의 넓이다. 이 화력(花力)의 시학을 세간에서는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그 꽃들의 산파가 될 것인가.

거름을 줘야 한다. 시인은 어렸을 적 파밭 밭둑에 똥 한 무더기 누고는 밭고랑에 던져놓고 오기도 하였다(‘양변기 위에서’).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채로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뒤의 시를 아껴 읽은 소설가 천운영은 언젠가 이 시인을 만나면 꼭 한번 함께 오줌을 누리라 다짐한다. 마침내 시인을 만난 소설가, 통음난무 끝에 얼추 목표달성 했다는 후문.) 건강하고 생생하다. 꽃의 시들이 한바탕 피고 나면 똥오줌의 시들이 능청스럽게 거름을 뿌린다. 그 위에서 다시 꽃은 피리라. 이것이 김선우 시의 선순환(善循環)이다.



세상의 꽃은 세상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만이 서정의 본진(本陣)이고 문명의 배수진이다. 혹여나 그녀 시의 아름다움을 많이 배운 여자의 우아한 성정 탓이라 할 텐가. 모 일간지에 띄엄띄엄 실린 그녀의 세설(世說)들을 읽으면 모진 말 쉽게 못할 것이다. 세상의 낮은 곳으로 퍼져 흐르는 연대(連帶)의 향기가 거기에 있다. 내처 기다려 보라. 곧 나올 그녀의 세번째 시집은 아마도 자신이 꽃임을 잊어버린 이 시대의 슬픈 여성들에게 바쳐질 것이다. 피어라, 꽃! (신형철|문학평론가)

07. 03. 03.

P.S. 시인은 지난 2004년,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사이'에 '피어라, 석유!' 등의 시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기사에도 인용되고 있는 시의 전문은 이렇다. 그 아래는 두번째 시집의 표제시 '도화 아래 잠들다'. 

피어라, 석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도화 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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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7-03-0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야구 선수 김선우를 생각했었습니다.^^ 요즘은 작가들도 인물이 좀 되야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건가요? ㅎㅎ

jouissance 2007-03-0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저는 이 시인의 책이나 칼럼에 함께 실린 사진을 보면 왠지 불편하더라구요. 만일 제가 바르트라면 '모델처럼 찍힌 시인의 사진'이라는 기호를 가지고 아주 재미있는 설을 풀어 볼 수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냥 그런저런 시인이라면 모르겠는데 '에코 페미니즘과 진보'를 얘기하는 시인이라, 그 사진이 무심하게 보이지만은 않더라구요. 너무 강팍하고 삐뚤린 시선으로 본 건가요?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시와 산문이 좋다는 겁니다...ㅎㅎ

로쟈 2007-03-0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니다님/ 아무래도 매체환경이 유인하는 면이 있겠죠. 게다가 여성성을 강조하는 시인이기도 하고...
jouissance님/ 한마디로 색을 쓸 줄 아는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데 개인적으로 특별히 와닿는 시인은 아닙니다...

jouissance 2007-03-04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성을 노래하는 시인은 '색'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페미니스트들에게 '색'을 얘기하면 당연히 으르렁 대겠지요. 그렇다면 여성성과 페미니즘 동시에 강조하는 사람은 '색'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슬며시 궁금해집니다^^ 그나저나 신형철 선생이 조금 오바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벌써 '색'에 포섭된 걸까요..ㅎㅎ

로쟈 2007-03-0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시집에 대한 김승희 시인이 추천사를 다소 길지만 인용해봅니다. "김선우의 두번째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는 여성적 글쓰기의 긍정적 차이와 해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전범이다. 그녀의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맛있는 모국어와 무의식이 질주하는 치렁치렁한 환유의 시 문법은 남성 시인의 직선적 상상력과 발성과는 차이가 있으며, 여성적 글쓰기의 긍정적 차이와 흘러넘치는 환상(環狀)선의 욕망을 보여주는 기표들의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육체와 대자연의 쾌락, 성욕 등이 무한한 욕망으로 겹쳐지면서, 이 대자연-상상계적 여성 육체는 그리하여 아버지-근대-로고스중심주의를 넘어서서 탈근대라는 새로운 담론의 공간으로 태어나게 된다. '민둥산'이나 '69-삼신할미가 노는 방'이 보여주는 우주적 에로티시즘, '완경(完經)'이나 '물로 빚어진 사람'이 보여주는 엄마-딸의 생리적 연대와 사랑, 여성의 '여성다운' 육체와 생리를 대자연의 성욕에 천연스럽게 연결시키는 열락(jouissance)의 상상력. 이러한 특징은 김선우적 여성 텍스트가 모유와 음문(陰門), 유방과 아주 능동적인 클리토리스로서의 풍요로운 글쓰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jouissance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jouissance님이 가장 잘 아실 거 같습니다.^^

jouissance 2007-03-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러 인용해주신 로쟈님께는 죄송하지만, 일순 짜증나게 만드는 추천사입니다. 평론도 아니고 추천사인데, 이런 고답적인 어투 조금 거북스럽네요. 꼭 이렇게 교수티를 내고 싶은 걸까요. 아무래도 김선생이 교수들의 나쁜 습성을 너무 여과없이 받아들인 것 같아요. 사실, 최근 몇년 사이에 읽은 김승희 선생 대부분의 글에서 이런 불쾌감을 경헙했답니다. 하루빨리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기를 바랄뿐입니다...ㅠㅠ

로쟈 2007-03-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교수'로서의 정체성은 다른 것이니까요. '대부분의 글'을 읽으셨다니 놀랍습니다.^^;

jouissance 2007-03-0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교수가 발표한 '대부분의 글'을 읽은 게 아니라, 제가 읽은 김교수의 글에 한에서 '대부분'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근데 로쟈님, '시인 김승희'가 역량에 비해 평단에서 너무 홀대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외도를 많이 해서 그런가^^

로쟈 2007-03-0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이 양반은 크리스테바의 기호분석론 같은 걸 시텍스트 분석에 적극 도입하려고 해서 좀 '현학적'인 게 나오지요. 그리고 '시인 김승희'는 소월문학상을 이미 수상했고 아마도 '서정주 문학상' 정도만 남은 듯한데, '홀대'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소설가로서도 좋은 평을 받았었고. 그보다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 작가들이 더 많지 않을까요?..

jouissance 2007-03-05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동년배의 여성 시인들 중에서 '김승희'를 특별히 좋아합니다(그냥 취향이 맞아서요^^) 애독자로서 비슷한 연배의 최승자, 김혜순, 고정희에 비해 비평가들로부터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문학상 수상 경력(소월, 고정희 문학상)과 평단의 주목은 별개일 수 있습니다. 발표된 시인론을 예로들면 되겠네요. 비교해보면 아시겠지만 저 세 시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편수가 적답니다. 가벼운 연구 책자 정도는 나올 법도 한데 아직 없구요(예컨대 '작가세계', '깊이읽기', '문학앨범'...뭐 이런 시리즈 말입니다) 그래요, 그보다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작가들이 훨씬 많지요. 아마 이런 저의 불만은 애독자의 편향된 시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