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밀라노로 돌아가는 중이다. 아침에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고속열차(우리의 KTX)인데 토리노발 열차의 최종 목적지는 로마다. 우리는 한 시간 뒤에 중간 정차역인 밀라노에서 내리게 된다.

아침 8시 기차로 출발해서 토리노 중앙역에 도착한 건 9시 남짓(토리노 역이 두 개 있는데 나중역이 중앙역이었다). 프리모 레비의 묘지에 먼저 들르려다가 역앞 버스가 만원이어서 레비의 생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보로 이동했는데 1919년 레비가 태어나고 또 1987년 난간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집이 레 움베르토 가 75번지다. 움베르토 가는 토리노의 문화중심지로 레비의 책들을 다수 출간한 에이나우디 출판사도 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오전의 주된 일정은 이 두 곳을 찾는 것.

주소를 알고 있기에 생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던 건물 그대로였는데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니 최소한 백수십 년 된 건물이다(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현대적인 도시라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일 뿐이고 토리노의 건물 대부분이 그 이상의 수명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공동주택의 명패에는 ‘레비‘라는 이름이 아직 남아있었다. 레비의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아들 부부가 산다고 책에서 읽은 것 같다.

당연하지만 건물 밖 길거리에서 레비의 삶과 문학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방대한 분량의 평전을 구입만 하고 아직 읽지 못한 터라 주로 서경식 선생의 책과 작가 연보를 참고한 설명이었다. 홀로코스트 증언문학으로서의 의의와 더 나아가 수용소문학 작가로서의 의의, 레비 삶과 자살이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 등에 대해서 견해를 밝혔다.

레비가 다닌 고등학교와 에이나우디 출판사 건물 앞까지 가보고 우리는 트램을 타고 토리노의 공동묘지로 향했다. 그곳 유대인 묘역에 레비가 묻혀 있어서인데, 월요일 휴무라고 해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장례식이 치러지는 때문인지 개방돼 있었다. 다만 관리직원들은 근무하지 않았다. 문제는 굉장히 넓은 묘지에서 레비의 묘석을 찾는 일이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일에 가깝다는 것. 다행히 이탈리아 인부의 도움으로 위치는 알게 되었지만 점심식사와 이후 일정 때문에 부득히 포기해야 했다. 휴일이어서 유대인 묘역이 닫혀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더는 무리할 형편이 안 되었다. 결국 그의 묘지 부근에까지 가본 걸로 만족하고 걸음을 돌렸다.

예정보다 조금 늦게 점심식사를 한 곳은 그람시 레스토랑이었다. 무슨 연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람시‘가 안토니오 그람시를 가리킨다면 토리노를 방문한 의미 한 가지를 더 챙길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헤게모니‘란 말의 저작권자인 그람시 역시 토리노대학 출신으로 토리노와 연고가 있다. 1920년대 토리노는 ‘이탈리아의 페트로그라드‘로 불렸을 정도로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온상이었다. 당시 지적, 문화적 운동의 거점도시였다고 할까. 그것이 지금은 퇴색한 것으로 보이는 토리노의 전력이다(에이나우디 출판사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금도 이탈리아 출판의 중심인지는 모르겠다).

샐러드와 파스타, 피자를 주문한 점심식사는 맛은 있었지만 과도한 양 때문에 버거웠다(다음 식사부터는 주문양을 조정하기로 했다). 그람시 식당을 나와서 우리가 향한 곳은 알베르토 광장이었다. 니체의 생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벌어진 장소(며칠 전 페이퍼에서 적었다). 니체의 삶과 철학의 의의에 대해서 소개하고 우리는 토리노의 도심 궁전과 토리노대학 등을 둘러보았다. 밀라노로의 복귀 열차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레비가 다녔다는 유대교 회당. 거기서 중앙역까지는 5분 남짓의 거리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균 2만보 이상 걸은, 나름대로 빡빡한 하루였다. 밀라노에 도착하면 잠시 한숨을 돌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호텔근처에서 저녁을 먹을 예정이다. 맛있는 요리도 매일 먹으면 물린다고 벌써 뭔가 얼큰한 식단이 생각난다(매번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때마다 김치찌개를 찾았던 이유다).

본격적으로는 이제 하루 일정을 소화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치면 일정의 절반을 해치운 느낌이다. 게다가 문학기행에 익숙해지다 보니, 내내 여행중인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지난가을 독일여행이 끝나자마자 연속해서 이탈리아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이 무슨 여행의 영원회귀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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