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엔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수다에 대한 독후감으로 '정성일 아줌마와 자크 랑시에르'란 페이퍼를 쓰겠다고 예고한 적이 있다. 그가 지난 계절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는 랑시에르의 책 <영화 우화들>을 마침 내가 지난주에 구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려고 했었다. 아마도 이 달 안으로는 쓰기 어려울 텐데, 막간을 이용해서 자크 랑시에르를 소개하는 기사를 옮겨놓는다(아래 이미지는 <영화 우화들>의 영역본).

알튀세르 사단의 3인방 중 한 사람이었던 랑시에르에 대한 관심은 전적으로 슬라보예 지젝을 경유한 것이다(바디우와 아감벤 등도 내게는 모두 지젝이 소개해준 철학자들이다). 그래서 랑시에르에 관한 글들은 앞으로 '로쟈의 지젝'에 적을 두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론 주로 랑시에르의 정치철학과 미학 관련서들이 눈길을 끌었고, 나는 그의 저작들을 얼추 6-7권 정도 구해놓은 듯하다(랑시에르의 최대 미덕은 주저들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것이다). 조만간 번역서들이 나온다고 하니까 어쩌면 몰아서 읽어볼 수도 있겠다. 아래 '담비'의 기사가 그 워밍업이 되겠다.

담비(07. 02. 14) 자크 랑시에르 한국 상륙 예정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의 주저인 '미학의 정치' 등이 도서출판 울력을 비롯한 몇몇 출판사에서 한창 번역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지난 1980년대에, 알튀세르의 맑스 독해팀 일원이었다가 알튀세르와 틀어져서 다른 길을 걸어간 이로만 알려진, 아니 그 이후 15~16년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왔던 철학자다.

랑시에르의 한국 상륙은 "왜 그런 중요한 사람이 번역되지 않는지 정말 이상하다"라는 어느 소장 철학자의 말마따나 뒤늦은 감은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프랑스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뒤를 이어 지성계를 주름잡은 비판철학자 4인방 가운데 에티엔 발리바르는 윤소영 한신대 교수가 지난 80~90년대에 이미 소개해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같은 네오 맑시스트와 '따로 또 같이' 진격하면서 맑스주의가 90년대 후반까지 그 담론적 생명을 이어가는 데 골몰했고, 그의 동료인 랑시에르에겐 너무 무관심했다. 아니, 발리바르가 랑시에르를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한국 학자들의 무관심이 더 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2명인 알랭 바디우와  E. 라클라우가 최근 들어서야 한국에 소개되고 있어 이들과 함께 랑시에르의 책들도 본격 조명될 조짐이다. 알랭 바디우의 책들은 현재 새물결 출판사에서 한창 번역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라클라우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서문을 통해 대중들과 얼굴을 '쎄게' 익혔으니, 아마 곧 주저가 소개돼 대학원생들이 손때를 어지간히 묻힐 것으로 예상된다(*라클라우/무페의 주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는 (다른 이름으로이긴 하나) 이미 번역돼 있고 지젝, 버틀러와의 공저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은 도서출판b의 근간 예정으로 돼 있다).

랑시에르의 책이 서점에 깔리기 전에 왜 지금 이 시점에 그의 주저들이 번역되기 시작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매우 극단적인 주체성의 이론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랑시에르는 현대사회가 선전하는 '자유', '평등' 같은 가치들은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고 '괘씸죄'를 건다. '배제된 목소리'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이기도 하며, 랑시에르의 표현대로라면 사회라는 건축물 속에 그 자신의 '공간'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쉬운 예를 들면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들이 거기 해당하며, 일본의 불가촉천민으로 여겨지는 '부라쿠민(部落民)'이 여기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 사람들이 있는데, 민주주의 체제이든 뭐든 간에 이들을 계산에 넣지 않고 호혜와 평등을 주창해왔다는 것이 랑시에르가 벌인 폭로전의 전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랑시에르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해설을 몇차례나 썼다. 특히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 b, 2005)에서는 아주 길게 랑시에르의 비판이론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어 맛보기로서는 안성맞춤이다. 왜 지젝 얘기를 꺼내는가 하면 이런 랑시에르의 핵심주장은 얼핏 접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고 '극단적'인 주장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고대 그리스의 예를 들며, 귀족정과 과두정이 상류층 체제라고 비판하며 스스로의 몫을 요구한 데모스 집단을 강조할 때는 "뭐지?, 원시민주주의로 돌아가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젝은 랑시에르가 결코 앞뒤 재지 않는 원칙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랑시에르의 주장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서 풀뿌리 연대를 강조하는 요즘의 진보주의자들과 기본 멘탈리티는 동일하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렌즈를 국가 내부의 국부적인 현실에 맞출 때가 많기 때문에 훨씬 검증해보기 쉬운 쪽에 속한다.

최근 한국에는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화재가 발생해 3층에 머물던 외국인들이 대량 참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관리가 허술했다, 직원들 근무가 엉망이었다는 후속보도가 나오고, 이들 이주노동자들에게 보호한답시고 수갑을 채우고, 문을 밖에서 잠궈놓았던 정황이 알려지면서 성토여론이 일고 있다.

랑시에르는 바로 이런 존재들, 수갑에 묶여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외면함으로써 체제를 합리화해온 것이 오늘날의 정치철학이라는 것을 탁월하게 이론화했다. 또한 이들 정치철학들은 랑시에르 같은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데, 지젝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원정치(arche-politics), 초정치(para-politics), 마르크스주의적 메타정치, 극정치(ultra-politics)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중 극정치의 예만 들어본다면, 이들은 정치의 직접적 군국화를 통해 정치를 부정한다. 이들이 부정하는 정치는 물론 '사회에 자신의 몫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과 투쟁으로서 발생하는 '사건으로서의 정치'를 말한다. 투쟁을 더 큰 투쟁으로 말소시키는 전략인데, 오늘날 급진적 우파가 계급 투쟁보다는 계급(또는 성)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적 메타정치는 어떤 은폐를 가하는가. 지젝은 이 대목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을 빌려온다. 제임슨은 맑스주의가 때로 인간 행위를 실용성의 극대화로서 보편적으로 모형화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극단적 판본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는데, 양자 모두가 고유한 정치적 사고의 필요성을 없애버리는 것은 똑같다는 지적이다. 그에 비해 랑시에르는 '언어의 모호성' 같은 문학이론을 철학적 사유 속에 도입하면서까지 정치라는 것의 미묘한 운동성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쉬운말로 정리하자면, 소수자들의 정치적 발언은 이러한 네가지 형태의 '부정'에 의해 정치적 시민권을 갖지 못한채 주변으로 끊임없이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들이 밀려만 나겠는가.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의 프랑스혁명에서 끊임없이 확인되듯, 막히면 터지게 마련이다. 물론 랑시에르에 따른다면 터진다는 것은 물리적 폭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언로가 다양해졌고 사회의 기득권 섹트들이 수없이 쪼개져있는 현 상황에서는 다른 식의 정치적 투쟁이 가능하다는 점을 랑시에르의 이론은 환기시켜주는 듯하다. 경제적 성장을 이룬 중산층의 나태한 무의식을 겨냥한 랑시에르의 이론이 한국땅에서 얼마나 생산적으로 음미되고 변형될 수 있을지 기대된다.(리뷰팀)

07. 02. 21.

P.S. 참고로, '담비'(http://www.dambee.net/)는 '담론비평'의 약자인데 최근에 문을 연 온라인 학술저널이다. 교수신문의 강성민 기자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분가하거나 독립한 것이 아닌가 싶다(요즘 교수신문은 이름만 걸고 있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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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07-02-2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구입한 스리지Cerisy에서 열린 랑시에르 토론을 엮어 낸 책의 저자들을 보면 바디우의 독자들과 상당수 겹침을 봅니다. 사실 랑시에르는 영어권에 바디우보다 30년도 더 일찍 알려졌고,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그의 마오주의시절(저널<논리적 반란>)의 글들이 번역되었는데.. 아마도 60-70년대 영,미 알튀세주의자들의(초기 Radical Philosophy그룹) 영향일거라 생각됩니다... 어디에선가 그가 학위논문(<프롤레타리아의 밤>)에 도움을 얻기 위해 푸코를 찾아갔는데, 푸코가 랑시에르에게 한수 접어줬다는....^^

로쟈 2007-02-21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독자와도 얼마간 겹칠지 모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읽어본 건 아니지만 <미학의 정치> 같은 책들이 관심사와 맞아서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