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0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50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김수영 시의 의의에 대해서 간단히 적었다. 월트 휘트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 '거대한 뿌리'에 대한 감상이기도 하다. 



주간경향(18. 12. 17) 김수영의 자유는 포용적-주권적 자유다


김수영 사후 50주년이 저물어 간다는 생각에 시선집 <거대한 뿌리>를 다시 손에 들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읽은 김수영 시집이어서 애착이 간다. 게다가 책에 수록된 평론가 김현의 ‘자유와 꿈’은 내가 읽은 최초의 김수영론이기도 하다.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이다”라는 선언적 문장으로 시작하여 김현은 김수영 시의 윤곽과 의의를 그렸다.


자유라는 주제에 한정하자면 김수영은 그 최대치를 노래했다. 유사한 선례를 찾자면 19세기 미국의 국민시인 월트 휘트먼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1855년에 처음 출간한 이후 생을 마칠 때까지 지속적으로 개정판을 낸 시집 <풀잎>이 휘트먼의 대표작이다. 그 서문에서 휘트먼은 다짜고짜 “미합중국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장 위대한 시”라고 단언한다. “개인은 최고의 국가를 이루는 특질들을 지닐 때 국가만큼 최상”이라며 “시인에 대한 증거란 그가 나라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듯 그의 나라가 그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나 자신을 찬양”하는 그의 노래는 그래서 곧장 미합중국에 대한 찬양으로 변모하며 한갓 풀잎은 대지 전체로 확장된다. 시인에게 개미는 물론이고 모래 한 알, 굴뚝새의 알조차도 완벽하며 “청개구리는 가장 고귀한 존재를 위한 걸작”이다.


김수영에게 한국은 휘트먼의 미국이었다. 휘트먼적 절창이라고 생각되는 ‘거대한 뿌리’가 이를 실증한다. 1893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하여 기행문을 남긴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의 책을 통해 김수영은 이 땅의 ‘거대한 뿌리’를 발견하며 그에 대한 벅찬 환희를 노래한다. 그런데 그 뿌리는 자랑스러운 전통뿐만 아니라 더러운 전통까지도 포함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과장 없이 말하자면 이것이 니체가 말한 ‘운명애’가 아니면 무엇일까. 김수영의 자유는 단순히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었다. 일상뿐 아니라 오욕의 역사까지도 끌어안는 포용적 자유이고 주권적 자유였다. 그렇기에 자신의 비루한 일상과 옹졸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타박하면서도 동시에 놀라운 기개와 시적 도약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한국 시문학사에서 그처럼 막힘없는 정신의 자유와 활기를 따로 읽을 수 있었던가. 무수한 반동까지도 좋다고 허용하는 정신 말이다. 

김수영의 자유는 확장된 의식의 자유이고 시로써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고투를 통해 얻어진 자유다. 그 자유는 어디에 도달하는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일찍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그 ‘풀’의 역량이 김수영의 자유였다. 

18. 12. 12.



P.S. 사후 50주기를 맞아 앞서 전집이 새로 출간되었고 최근에는 헌정 산문집으로 <시는 나의 닻이다>(창비)가 나왔다. 나대로의 김수영 다시 읽기는 내년의 과제로 넘긴다. 한편, 분량상 원고의 일부가 지면에는 실리지 않았는데, 내가 적은 마지막 두 문단은 이랬다. 


한국 시문학사에서 그처럼 막힘없는 정신의 자유와 활기를 따로 읽을 수 있었던가. 무수한 반동까지도 좋다고 허용하는 정신 말이다.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좃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김수영의 자유는 비단 시적 자유니 예술의 자유니 하는 등속이 아니다. 그것은 확장된 의식의 자유이고 시로써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고투를 통해 얻어진 자유다. 그 자유는 어디에 도달하는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일찍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그 '풀'의 역량이 김수영의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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