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리뷰를 두 편 옮겨놓는다. 지난주 한국일보에 리뷰가 실렸었는데, 컬처뉴스에도 같은 리뷰가 실려 있길래 모아놓는다. 지난 1월 중순 명품극단(이거 고유명사다!)의 '고골 3부작' 공연이 있었다. <비>, <광인일기>, <행복한 죽음> 세 작품을 묶어서 3부작으로 만든 것이고, 모두 원작은 드라마가 아니라 (단편)소설들이다(<비>는 귀신 얘기이고, <광인일기>는 제목대로 정신병자 얘기이며, <행복한 죽음>은 <옛기질의 지주들>로 국역돼 있는, 먹성좋은 노인네들 얘기이다). 이 '각색'만으로도 새로운 시도인데, 새로운 연극언어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은 모양이고, 그 점이 주목받고 있어서 반갑다. 연출자를 비롯해서 스탭들 가운데 다수가 러시아연극학교 출신들이어서도 그렇다. 사적인 인연을 보태자면, 조연출을 맡은 친구가 모스크바통신에 가끔 등장하던 나의 룸메이트였다. 거의 매일 같이 공연을 보러 외출했었고, 내가 본 공연도 대부분은 그와 같이 본 것들이다(그러니 미리 광고라도 했어야 하는데, 나조차도 공연이 끝난 뒤에야 알게 됐으니!)...  

컬처뉴스(07. 01. 26) 몸, 충동적 에너지의 물화

‘고골 3부작’(명품극단, 김원석 작/연출) ― <비>, <광인일기>, <행복한 죽음> ― 은 ‘연극의 정체성 찾기’란 화두를 다소 색다른 방식으로 자극하는 연극이다. <고골 3부작>은 19세기 러시아의 소설가 고골의 단편소설 세 편을 극화한 연극인데, 주목되는 것은 이 연극이 연극의 정체성 모색에 있어 ‘왜’와 ‘어떻게’란 문제제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이 연극은 연극과 타 예술매체와의 구별 지점에 대해 파고든 듯 하다. 즉 ‘연극이란 무엇인가?’라는 ‘극 언어로서의 연극 언어에 대한 질문’을 근간에 깔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이는 차이의 주장을 통해 생존 근거를 찾기 위한 시도로 읽힌다.

‘고골 3부작’은 무용수에 버금케 훈련된 신체의 배우들이 아크로바틱을 응용한 미장센을 통해 요소요소 신선함을 제공한다. 가면과 인형, 악기 등 오브제의 놀이적 사용은 가벼운 눈요기로 흘러가지만, 강도 높은 신체 훈련의 흔적이 역력한 배우들의 역량이 만들어내는 육체 에너지는 연극적 구조 짜기의 또 다른 방향을 느끼게 한다.

이 단체의 개성이 가장 효과를 드러낸 경우는 이 연작의 첫 번째 공연 <비> ―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세 명의 신학생이 마녀(혹은 귀신)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 ― 다. 비현실적 소재의 환상성이 극의 논리적 해명의 ‘빈틈’ ― 마녀가 신학생의 억압된 성적 욕망의 상징인지 아니면 그 지방 고유의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단순 지시인지에 대한 해석의 유보 ― 을 메워주며, 밤마다 다시 살아나는 처녀 귀신과 그녀의 영혼을 떠나보내기 위한 한 신학생의 장례 치러주기 한판 승부가 팽팽히 펼쳐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극이 신체 에너지의 물리적 변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길 잃은 청년들의 공포와 절박함을 세 명의 배우가 극장 공간 전체를 원형으로 도는 행위로 전환시킨다. (분장 안 한 맨 얼굴에 땀이 줄줄 흐를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어 간신히 찾은 집에 묵기를 사정할 땐 여태껏 뛰어온 에너지를 간직한 채 배우 두 명이 다른 한 명의 몸 전체를 들어 그대로 집주인에게 들이밀며 장면을 연결시키는 등 극은 움직임 이전의 충동인 에너지의 물화(혹은 외면화)를 시도한다. 즉 <고골 3부작>의 새로움은 말이 아닌 ‘행위로 이야기 이어가기’를 의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은? ‘고골 3부작’의 가장 취약한 지점은 (이 단체의) 언어에 대한 다소 소홀한 대접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세 작품 중 가장 대사량이 많았던 <광인일기>의 경우 들리지 않는 대사에 극은 나아가는 대신 흔들리며 오브제들의 ‘놀라운’ 사용 ― 눈을 즐겁게 해 주는 ― 의 순례가 되고 만다. 대사가 거의 없거나 혹은 중요 대사 외에는 의미 없는 말로 처리한 <비>나 <행복한 죽음>의 경우 갖가지 소품들은 배우의 신체 리듬에 합세해 고유의 극 리듬을 만들어 간다. (<행복한 죽음>의 중요 오브제인 세 개의 커다란 공은 술단지란 극의 설정과 어우러져 배우들이 공 위에서 이리저리 튀기며 놀 때 인생의 ‘제어되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전달한다).

‘고골 3부작’을 통해 독특한 연극 만들기 메소드를 선보인 이 단체는 작년 객석과 평단 모두에게서 호평을 이끌어낸 박근형이나 이윤택, 김낙형, 김한길의 연극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연극의 생존을 위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듯 하다. 가장 큰 구별점은 개인의 시선이 놓이는 자리에 다수의 배우들의, 상대의(동료 배우이든 관객이든)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예민하게 다듬어진 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거르는 ‘막’이 없어져서인지 이 연극은 실험적 극언어들로 넘쳐남에도 전복적인 의미에서 ‘새롭지는 않다’. 오히려 고골 고전으로, 즉 텍스트의 원의미로 회귀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고유의 방법론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의 경향을 좇아 비슷비슷한 연극 만들기를 반복하는 우리 연극계를 되돌아보게 하기에 반갑다. 일정한 메소드로서 연극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이 단체의 작업이 한국 연극에서 하나의 분명한 목소리가 될 것인가. 프로듀서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한 개인의 예술 세계의 깊어짐으로만 가능한 것일까.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메소드이기에 희망적이지만, 무엇보다 아직은 메소드다.(엄현희 _ 연극평론가) 

한국일보(07. 01. 20) 고골의 광대놀음… 그게 바로 인간세상인걸!

18일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막을 내린 극단 명품극단의 ‘고골 3부작’은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연극학도들의 성실한 연구공연이자 도전적인 출사표로 느껴졌다.(지난해 9월 같은 작품이 공연됐으나 당시 출연진의 건강 악화로 2부까지만 공연되고 중도에 막을 내려야 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에 3부에 해당하는 <행복한 죽음>까지 보고 나니, 별난 이름의 이 극단이 러시아 연극 전통에 대해 갖고 있는 매혹과 탐구심을 짙게 느낄 수 있다. 원작의 문화적 배경에 해당하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토속적 색채와 질감을 재현하고, 러시아의 민속악과 정서를 충실히 옮겨놓은 고골 3부작은 <비이> <광인 일기> <행복한 죽음>(원제 <옛 기질의 지주>) 등 세 단편에서 줄기를 취해 왔다.

고골의 소설들은 본질적 속성상 소극(笑劇)으로의 장르 전환이 용이하다. <외투>와 <코>는 이미 2005 2인극 페스티발에서 연출가 박근형과 반무섭에 의해 공연됐다. 해외 연극제 출품 목록에서도 고골의 각색물은 간간이 눈에 띈다.

고골에 의하면 인간은 그다지 품위 있거나 정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상황과 사회적 환경에 짓눌려 있으며, 게걸스레 먹고, 배설하고, 침 튀기고, 땀에 절어 번질거리고, 겁에 질려 다리나 떨어대면서도 한편으론 발정이 나 날뛰는 존재들이다. 연극 고골 3부작은 이러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소극적 본질을 취하는 한편 소극에 걸맞는 곡예적 연기, 인형극, 광대 연행 등 다양한 쇼 비즈니스를 선보인다. 이는 신체적 기량을 갖춘 배우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희극 연기에 자질을 보인 주용필, 손경숙과 일인극 <광인 일기>를 그로테스크한 개성으로 끌고 간 조하석 등 눈여겨볼만한 배우들이 이 극단에는 포진해 있다.

문화에도 본격 펌프질 직전의 마중물이 있다. 우리 삶의 마른 대지를 적시기 위한 예술가들의 쉼 없는 펌프질을 생각해 본다. 이제 이 땅에 돌아와 연극을 막 시작하려는 이 젊은이들에게 러시아 연극은 우리 연극의 수원지에 숨은 물을 퍼 올리기 위한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돼야 한다.

그 동안 선학들이 걸어온 러시아 문학을 향한 흠모와 근대 연극의 심리적 사실주의 연기 방법론에 거리를 두고, 메이어홀드의 신체 역학과도 다르며, 러시아의 민속 문화와 대중극 전통의 원형을 탐구하는 듯 보이는 이 극단의 독자적 방향성이 다음엔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들려줄까. ‘소극’과 ‘광대극’이라는 만국 공통어 안에서 극단의 방향성을 잘 수렴해낸 고골 3부작 이후가 궁금해진다.(극작ㆍ평론가 장성희) 

07. 01. 28.

P.S. 참고로, '공식적인' 공연 소개를 옮겨놓는다.

니꼴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1809-1852)은 그리바예도프, 뿌쉬낀으로 대변되는,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고향 우크라이나 이야기, 수도 뻬쩨르부르크 이야기, 러시아 관리의 세계, 러시아 지방의 삶, 종교적 성찰 등, 폭넓은 주제를 통해 혼란하고 무질서한 삶의 실상을 때로는 날카로운 현실 바판과 고발의 형태로, 때로는 통렬한 풍자의 스타일로 그려내어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토대를 닦은 작가이기도 하다. 고골은 이러한 사회성 짙은 주제를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에 기반을 둔 언어로 그려나가며 환상적 리얼리즘, 일명 ‘판타스마고리야’라는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며 러시아 문학사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는 자칫 센티멘털적 습성으로 빠질 수 있는 작품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극복하며 작품이 내재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확대하고 있다. 그의 대표 희곡 작품인 ‘검찰관’은 물론이거니와 산문 작품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현대 연출가들의 무대적 영감의 재료가 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명품극단 창립작품인 고골 삼부작 시리즈는 한국연극 무대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초기 그의 우크라이나 이야기 시리즈 중의 하나인 ‘비이’,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단편중의 하나인 ‘광인일기’, 그리고 죽음과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발견이 감동적인 ‘행복한 죽음’이다. 각각의 작품들은 ‘봄’, ‘여름’, ‘ 가을, 그리고 겨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이는 삼부작 시리즈를 하나의 통일 된 작품으로 이루게 하는 역할을 한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 음악가 프라꼬피예프, 러시아의 전통 민속음악과 로망스 등, 낭만과 열정의 대명사인 러시아 음악을 바탕으로 역동적인 배우의 신체연기가 어우러져 새로운 연극세계를 창출을 기대한다. ‘비이’와 ‘광인일기’와 는 이미 러시아 국립 연극원 기티스 극장과 모스크바 슈킨 연극대학극장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러시아 관객들로부터 한국연극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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