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서(한국은 주말 오후지만 독일은 아침시간이다) 이어서 여행기를 적는다. 어제 일정이 예정보다 늦게 끝나서 오늘은 30분 늦게 시작하게 되었고 덕분에 한 시간의 자유시간이 남았다. 일행이 산책을 나가거나 휴식을 취하는 틈에 바쁘게 어제의 행적을 적으려 한다. 아, 괴테하우스를 방문했다고 했지.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도시들 가운데 가장 미국적인 도시라 한다. 패전 이후 미군의 관할하에 놓여 있어서 그렇다는데 독일 도시로서는 희소하게도 도심에 빌딩숲을 갖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도 상업과 교통의 요지이고 유럽 금융의 허브다. 인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75만의 도시다. 한강에 비하면 아담한 마인강을 끼고 있어서 정식 이름은 프랑프푸르트암마인이다. 그리고 괴테는 바로 이 프랑크푸르트에서 1749년에 태어났다.

괴테하우스는 괴테의 생가인데, 전기를 보니 1755년에 개축된 건물이고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내관이 비교적 잘 보존된 건물이다. 버스에서 내려 대로에서 조금 안쪽으로 걸어들어가자 이내 친숙한 건물과 맞닥뜨릴 수 있었는데 사진으로 자주 본 탓인지 말 그대로 구면이었다. 대략 괴테 집안이 얼마나 부유했던가 말해주는 여러 방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괴테는 이 집에서 1775년까지 살았고 1775년 바이마르에 초빙된 이후 이듬해부터는 1832년 생을 마칠 때까지 바이마르를 정주지로 삼는다.

괴테하우스 방문을 계기로 새삼 알게 된 것은(자프란스키의 평전을 읽었다) 괴테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 괴테 역시도 법학을 전공하고 베츨라에서 실습을 거친 후 법학박사가 되었고 공직에서의 경력을 시작하기 전에 일년간 이탈리아 여행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탈리아 여행기>까지 썼고 아들에게 읽어주고는 했다. 괴테하우스에는 그 흔적으로 이탈리아에 관한 그림과 스케치가 걸려 있었는데 그 영향이 없을 리 없다. 1786년 아들 괴테의 돌발적인 이탈리아 여행은 부전자전의 내력을 갖고 있었던 셈(내년 봄에는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의 여정을 일부 따라가볼 참이다).

아홉 명의 가정교사로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은 괴테는(아버지 요한은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1765년 16살에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법학 공부를 위해서였는데 건강을 잃는 바람에 1768년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한다(결핵이나 위궤양이었을 것으로 추정). 1770년 다시 건강을 회복하자 이번에는 슈트라스부르크(현재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으로 공부하러 떠나서 변호사 자격을 얻는다.

그러고는 1772년 봄 법률 실습을 위해 제국고등법원이 있는 베츨라로 떠난다. 그곳에서 샤를로테 부프라는 여성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미 약혼자가 있던 이 여성과 실연을 경험하고서 쓴 작품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게 <베르테르>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상식이다. 하지만 사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데...(복잡한 사정은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적기로 하고 오늘의 일정이 바로 베츨라를 방문하여 베르테르와 로테의 사랑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혹은 하룻동안 베르테르-괴테가 되어보는 것이다.)

괴테하우스에서 빠져나와서 찾은 곳은 프랑크푸르트의 시청과 광장,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다는 대성당 등이다. 슈테델 미술관을 찾은 것은 요한 티쉬바인이 그린 이탈리아 여행 중의 괴테(로마 캄파냐의 괴테‘)를 보기 위해서였다(내게는 그랬다). 그리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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