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핵심 일정은 헤세의 고향 칼브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바덴-비르템베르크 주의 주도인 슈투트가르트에서 칼브까지는 한 시간 거리. 우리식으로 말하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단풍이 단정하게 든 호젓한 국도를 즐기다 보면 도착하는 작은 도시다(‘마을‘이었을 이 도시의 인구는 2만3천 가량이라고). 따로 목적지로 설정하지 않는 한 독일여행에서 찾아기기는 어려운 도시이고 그 목적이란 ‘헤세‘일 수밖에 없다.

이미 칼브(‘칼프‘라고도 표기하지만 ‘칼브‘가 발음에 가깝다)의 사진은 많이 봐두어서 낯설지 않고 친숙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칼브는 ‘헤세의 마을‘이었다. 헤세의 생가와 이사했던 집이 보존돼 있었고 마을 중심에는 헤세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헤세가 생을 마감한 스위스의 시골마을 몬타뇰라도 짐작컨대 비슷한 느낌의 마을이지 않았을까 싶다(교회만 다를까?). 마을 곳곳에 ‘헤세의 길‘이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헤세가 자주 다녔던 길을 알려주는 이 표지판들에는 헤세의 시 한편씩을 담고 있다. 프라하가 카프카의 도시라면 칼브는 말 그대로 헤세의 마을이었다.

1877년 칼브에서 선교사집 아들로 태어난 헤세는 네살 때 부모와 함께 스위스 바젤로 이사했다가 1886년에 다시 칼브로 돌아와 상급 라틴어학교 진학하기까지 4년간 칼브의 학교를 다닌다. 이 학교 건물도 보존돼 있는데, 더 중요한 기념지는 어린 헤세와 매일같이 지나다녔다는 니콜라우스 다리다. 마을로 들어가는 네 개의 다리 가운데 가장 왼편에 있는 이 다리 중간에 노년의 헤세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인터넷에서 ‘헤세, 칼브‘를 검색하면 바로 보게 되는 동상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작은 수돗가가 있는 광장이 나오는데 바로 헤세 광장이다. 안내판에는 물론 헤세의 칼브에 대한 소개가 적혀 있었다. 다리 위 동상이 언제 세워졌는지 모르겠지만(같은 작가의 동상이 마을에는 여러 개 더 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헤세를 기념해온 역사는 좀 되는 듯싶었다. 1946년 헤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부터였을까? 설사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않았더라도 1904년 <페터 카멘친트>를 발표한 이후의 헤세는 독일 문학계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명이면서 칼브가 낳은 가장 유명한 인사였을 터이니 충분히 기념할 만하다.

시골 마을답게 칼브는 한적한 편이었고(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그나마 사람들이 좀 늘었다) 헤세박물관을 둘러볼 때도 관람객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전시물을 꼼꼼히 다 살펴보지는 못했지만(유품들은 사진과 독어로 쓰인 사본, 책들 위주다) 순전히 헤세의 삶과 작품으로만 채워진 공간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회를 느끼게 했다. 중학생 때 <수레바퀴 아래서>를 처음 읽은 지 대략 36만의 일이다.

헤세를 읽어본 적이 없는 독자가 칼브를 찾을 일은 거의 없을 테지만, 방문을 위해서 챙겨보아야 하는 작품은 <수레바퀴 아래서>(1906)와 <크눌프>(1915)다. 칼브에서의 학교생활과 마울브론신학교에서 경험을 소재로 한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헤세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면 작품에서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로 지칭되는 마을은 바로 칼브다(한스가 마을의 대표격으로 시험을 치르기 위해 가는 곳이 비르템베르크 주의 수도인 슈투트가르트였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초반과 말미에 주로 묘사되는 마을의 모습과 한스의 동선은 칼브와 겹쳐놓으면 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와 간격이 있어 보이지만 <크눌프>를 구성하는 세 편의 이야기 가운데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이 1908년에 발표되기에 연속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헤세는 말년의 한 편지에서 크눌프가 고향과 하나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고향 칼브의 이미지와 의미가 응축된 인물이 크눌프인 것이다. 칼브에서는 그에 걸맞게 크눌프의 동상도 세워놓았다. 헤세 동상이 있는 니콜라우스 다리에서 5분도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서 있는 크눌프의 동상은 친근하고 너그러운 표정의 방랑자 형상이다. 마을을 한 바퀴를 도는 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기에 우리는 크눌프와 여러 번 마주쳤다.

점심식사를 칼브의 식당에서 생맥주와 함께 즐기고 나서도 좀더 시간을 보낸 뒤에야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헤세문학 전반에 대한 짧은 강의를 마칠 때쯤 우리는 슈투트가르트에 다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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