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고온 책들 가운데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를 아무데나 펼쳐 읽는다. 재작년 가을에 나온 시집이고 내가 구입한 건 올봄에 나온 5쇄다. 시인은 지난주에 세상을 떠났다. 꼭 그렇게 읽을 필요는 없지만 시를 읽는 맥락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에 ‘푸른 들판에서 살고 있는 푸른 작은 벌레‘에 눈길이 멈추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다.

바지에 묻어온 벌레를 털어냈다
언젠가 누군가를 이렇게 털어낸 적이 있었다
털리면서도 나의 바짓단을 누군가는 무작정 붙잡았다
나는 더 모질게 털어내었다
서늘하고 아팠다
벌레여 이 바지까지 온 네 삶은 외로웠나
이렇게 말하는 건 나, 중심적임을 안다네,
사라져가는 생물들이 쉬는 마지막 숨을
적어본 적이 없고
모든 살았던 것들의 눈동자 역사를
적어본 적도 나는 없었으므로

시의 서두이자 전반부이고 후반부는 상상에 맡긴다. 다만 시인이 털어낸 벌레가 ‘날개 달린 벌레‘라는 걸로 보아 풍뎅이 종류가 아닐까 싶다. 고고학 답사 현장에서 묻어온 벌레이지 않을까 싶고. 이 벌레로 인하여 언젠가 벌레인 양 털어낸 한 사람이 생각났고 그 모진 행동에 뒤늦은 자책감이 들었다는 게 골자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시인은 다시 한번 털어내지 않을까. 그렇지 않는다면 회한이 남지 않을 테고 이런 시도 쓰일 수 없을 테니. 시쓰기는 회한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택의 산물이다. 우리는 반복해서 후회하고, 혹은 후회를 반복하고 그 후회를 밑천으로 시를 쓴다. 상실을 시로 보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잃어버려야 하니까. 시인은 잘 잃어버리는 자이고 기필코 잃어버리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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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10-0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할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후회와 회한, 상실을
기필코 부여잡고 있어야 하는게
시인이라면
시인의 운명을 타고나지 않은 것에 감사를~

로쟈 2018-10-10 23:07   좋아요 0 | URL
상실을 피해간다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