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댁에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가벼운 책을 하나 빼들었다. 이동중에나 잠시 카페에 들러 읽을까 해서인데, 책장에서 손에 집힌 책이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21세기북스)이다. 대학에서 ‘행복의 과학‘이라는 인기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는 저자의 행복학을 기대하게끔 하는 책. 30년간 이루어진 행복 분야의 연구를 갈무리하여 ˝굵직한 결론들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생존과 맞물려 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서두에서 이성과 본능 사이의 갈등과 줄다리기가 인간의 모습이라고 지적하면서 행복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경험이기에 의식이나 생각으로부터 분리시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각의 일부만 행복과 연관되기에 생각을 바꿈으로써 행복해진다는 건 극히 제한적으로만 옳다. 착각에 가깝다는 것이다. 행복을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로 전환한 것은 타당하며 동의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저자의 서술이 정연하지 못하다는 데 있다. 강의로서 흥미로울지 모르겠지만 책의 서술로는 비약과 공백이 많다. 게다가 이성과 의식, 본능과 감정 등의 개념을 별다른 정의 없이 혼용하고 있어서 독서의 어려움이 가중된다. 참지 못하고 이런 지적을 하게 만든 대목이다.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행복을 이해하는 데 왜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 보다 중요한 원인을 못 보게 만들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주술사의 현란한 기우제 춤 때문에 비가 온다고 믿었다. 춤은 눈에 띄지만, 비의 원인은 아니다.˝

무슨 말인가. 여러 번 읽었는데, 저자는 이성적 능력을 기우제 춤에 비유한 것으로 읽힌다. 옛사람들이 기우제 춤을 믿음으로써 비의 진짜 원인에 대한 이해에는 이르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이성적 능력을 신뢰한다면 행복의 원인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지. 나로서는 기우제 춤 같은 주술적 행위를 이성적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도 특이하게 여겨지면서(그런 주술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반이성적 활동이 되는가?) 동시에 저자는 ‘이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단비를 행복이라고 해보자. 이 비가 언제, 왜 내리는지 알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습도나 풍향 같은 자연 요인들을 이해해야 한다. 주술사의 춤이나 기우제 음식 같은 가시적인 것에 현혹돼서는 행복의 본질을 볼 수 없다.˝

단비(행복)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습도나 풍향)을 말해주는 것이 아마도 저자가 소개하려는 행복의 ‘과학‘인 듯싶다. 그런데 그 과학은 이성적 사고와 무관한 것인지. 이성적 사고를 주술사의 춤에 비유하면 과학은 대체 어떤 능력에 의해서 가능한 것인가. 가시적인 것에 현혹되어서는 행복의 본질을 볼 수 없다고 했는데, 그때 행복은 가시적인 것인가, 비가시적인 것인가. 행복을 본다는 것은 볼 수 없는 것(보여질 수 없는 것)을 본다는 뜻인가.

˝이런 비유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행복을 소리라고 한다면, 이 소리를 만드는 악기는 인간의 뇌다.˝

나는 이런 비유(우회)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다. 행복은 뇌의 문제이고 뇌의 상태에 달려 있다고 바로 주장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사실 행복이라는 주관적 감정의 과학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뇌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뇌과학의 성과를 통해서 행복에 대해 재고해볼 수 있는 것. 그런데 저자가 분리시키려고 하는 사고(생각)도 뇌의 활동이다. 이성 역시 뇌와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행복을 ‘뇌=본능=동물‘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성을 그 대척점에 놓고 있는데 이는 무리한 단순화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술사의 춤만 보고 있어서 저자의 논의를 못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주장을 매끈하게 이해하는 독자들의 뇌가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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