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에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습성이 있다. 필요에 얽매이지 않은 경우에 그런데, 간혹 그런 필요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릴 때도 있다. 차가워진 날씨 때문에 외출을 자제한 어제오늘이 그렇다. 프로프의 <민담형태론>의 서문과 <라캉과 정치>의 서문, 그리고 <스피박 넘기>의 서두 등이 그렇게 읽은 대목들인데, 시간이 나는 대로 정리해두도록 한다. 이 페이퍼는 <라캉과 정치>의 서문에 대한 것이다.

 

 

 

 

원래 서문은 '라캉과 정치를 연관지을 수 있는 가능한 논의를 위한 몇몇 예비 질문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부제 자체는 라캉적인 것이다(<에크리>에서 정신병을 다루는 한 장의 제목이 비슷한 식이다). 그걸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을 순 없으므로 간단히 '라캉과 정치의 합류점'이라고 해둔다. 저자인 야니 스타브라카키스가 제기하고 있는 것은 '라캉과 정치적인 것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인바, 이 표제에 대한 해제가 서문의 내용을 이룬다.

저자는 먼저, '라캉과 정치'라는 타이틀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의심들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그 의심이란 사회/정치적 심급을 정신분석이라는 개인심리학적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언제나 사회적인 수준 즉 '객관적인' 수준을 개인의 수준, 즉 '주관적인 수준'에서의 분석으로 환원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은 정당한 것이기도 한데, 그간에 정신분석학적 환원주의, 곧 사회는 집합적 무의식 또는 초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며 그로 인해 사회를 정신병리적 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처럼 다루는 태도는 그간에 오명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인용하고 있는 뒤르켐의 발언은 그리하여 원칙적으로 옳다: "사회현상이 심리현상에 의해 직접적으로 설명될 때마다 우리는아마도 그 설명이 틀렸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14쪽) 국역본에는 이 발언의 출처가 누락됐는데,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한 회의론에 맞장구를 치는 이들이 또한 다름아닌 정신분석가들이다. 라캉의 사위이자 상속자 자크 알랭-밀러(*'밀레'나 '밀레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는 이렇게 묻는다: 정신분석가들은 자신들에게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정치를 말하는 것이 남용인지 아닌지를 자문해 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분석에 들어서는 것은 고도로 개인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15쪽)

하지만, "정신분석학은 초연한 이론도 고립된 개인에 관한 심리학도 아니며(라캉은 어떠한 형태의 원자론적인 심리학에도 반대하였다), 더더욱 분석주체는 '고독한 방랑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석주체는 다른 사람과, 즉 분석적 세팅 안에서 분석가와 연결됨으로써만 이 분석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분석주체'는 'analysand'의 번역어이며, '환자' 곧 '피분석자'를 가리킨다. 분석적 세팅 안에서 피분석자가 갖는 능동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는 '분석주체(analysand)'라고 부른다. '분석가'는 물론 'analyst'를 가리킨다. 그리고 밀러 자신이 분석에서 이 양자간의 관계를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적 결속'이라고 불렀다. 프로이트 자신이 정신분석학적인 사회-정치적 분석 작업을 다양하게 남겨놓기도 했고(<환영의 미래>나 <문명 속의 불만>, <왜 전쟁인가> 등은 대표적이다).

라캉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자신의 영감과 사유방식, 그리고 자신의 기술의 무기고를 이와 같은 연구들에서 찾아내었다. 그는 또한 이것들을 정신분석학 교육의 조건으로 만드는 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과잉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16쪽)

참고로,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But he also regarded it as a necessary condition in any teaching of psychoanalysis."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것을 모든 정신분석 교육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했다"라는 '평이한' 내용 같은데, "그는 또한 이것들을 정신분석학 교육의 조건으로 만드는 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과잉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라고 불필요할 정도로 복잡하게 옮겨진 이유는 모르겠다. 인용의 출처는 쉐리단의 <에크리> 영역본인데, 설마 이후에 나온 핑크의 완역본 <에크리>를 참조한 탓일까?(역자는 후기에서 핑크의 번역본도 참조했다고 적어놓았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발언을 직접 들어보는 게 유익하겠다: "사회학은 심리학이 사회속에서의 사람들의 행동을 다루는 것과 같이 (...) 사람들의 행동을 다루기 때문에, 사회학은 응용심리학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엄격히 말해서 두 개의 과학만이 있을 뿐이다. 심리학, 즉 순수심리학과 응용심리학 그리고 자연과학."(17-8쪽) 재인용의 출처는 <새로운 정신분석강의>이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라면 이 심리학마저 사회생물학에 '통섭'된다고 말할 법하다.

하지만 "라캉은 정신분석학적인 사회분석의 설득력과 정당성에 관해서는 프로이트와 의견을 같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강한 '환원주의적' 접근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18쪽) 대신에 라캉은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서 존재하는 쌍방향의 운동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가 제시하게 되는 것인 새로운 주체성의 개념이다.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정치적인 주체성 개념'.(이에 대한 설명이 책의 1장을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캉의 이론이 중요한 것은 정신분석학과 사회-정치 분석 간의 진정한 함축 또는 상호함축을 허용한다는 점이다."(20쪽) 그리고 이러한 주체성 개념으로부터 객관성(객관적인 수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제안된다(이에 대한 설명이 2장이다).

잠시 덧붙이자면, 책의 1장 '라캉의 주체'에 대해서는 저자도 참조하고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1995)가 필독서이다. 이 책의 국역본은 올 상반기에 나올 예정인 것으로 안다. 스타브라카키스의 보다 중요한 기여는 따라서 2장 '라캉의 객체'에서 찾아진다(물론 이 대목도 지젝의 저작들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간취할 수 있다. 스타브라카키스는 보다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의 문제제기에 이어지는 내용은 소위 '애로사항'이다. 라캉과 정치적인 것의 합류점을 사고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미리 짚어보고 있는데, 첫번째 문제는 "라캉의 담론의 복잡성과 그의 바로크적인 복잡한 문체와 관련이 있다."(22쪽) 사실 라캉에 대한 많은 비난이 바로 이러한 모호한 그의 문체적 스타일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며, 영화 <지젝!>에서 지젝은 이러한 수사적 제스처를 과감하게 배제하고 라캉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라캉은 "청중들 속에서 새로운 독해 문화를 배양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이 보인다 - 그의 텍스트는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쓰여지는텍스트이지, 읽혀지는 텍스트가 아니다."(23쪽). 여기서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은 역자가 삽입한 것이다. 그것은 '쓰여지는 텍스트(writerly text)'와 '읽혀지는 텍스트(readerly text)'란 말의 출처가 롤랑 바르트라는 것을 친절하게 보충해준다(나의 친절은 22쪽에서 'Lacan in Samuels'의 's'가 탈자되었다고 보고하는 정도이다). <문제적 텍스트 롤랑/바르트>(앨피, 2006)에서 이 두 용어는 각각 '작가적 텍스트'와 '독자적 텍스트'로 옮겨졌는데, '작가적 텍스트'란 텍스트의 의미지평이 열려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뭔가를 계속 끄적거리고 싶도록 만드는 텍스트이다.

여하튼 이러한 어려움을 낳는 라캉의 스타일을 저자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라캉의 담론이 지닌 모호함은 사실상 모든 독자에 대한 도전이며,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도전이고, 떠맡아야만 하는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그의 담론의 비환원적인 모호함과 비결정성을 인정할 때에만 우리는 라캉의 담론을 가지고 작업할 욕망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우리에게 건네는 도전이다."(24쪽)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인문 번역서를 읽을 때 '비환원적인 모호함' 같은 표현에 주눅들면 안된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비환원적'이란 말은 'irreducible'의 번역이고 이 단어는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더 이상 약분할 수 없는'[수학] 등의 뜻을 갖는다. 수학에서의 의미가 여기서는 이해에 더 용이하겠다. 라캉의 담론이 (보기엔 굉장히 크고 복잡한데) 더이상 약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 즉 그 모호함이 더 이상 축소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실이 거꾸로 우리에게 라캉을 읽고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설명하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긴다는 얘기이다.

모호함을 의도적/적극적으로 창출해내는 라캉의 수사적 전략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라캉주의 문헌 속에는 라캉 담론의 복잡함을 모방함으로써 재생산되는 몽매주의자들의 비체계주의적인 전통이 존재하며, 다른 수준에서는 라캉이 비판했던 자아-심리학의 문제가 존재한다"(25쪽)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만약 라캉의 전략이 전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입증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 마지막 인용문도 모호한데, 우리말로는 전체부정으로 읽히지만 의미는 부분부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라캉의 전략이 전적으로 성공하못한 것으로 입증된다면" 정도가 적합하지 않나 싶다(그러니까 그것이 절반의 성공에 머문 이유는 이런 때문이다, 란 뜻이다).  

"라캉의 담론 상태와 관련된 두번째 어려움은 라캉의 개인적인 문체에서 비롯될 뿐만 아니라, 시간에 따른 라캉 담론의 급진적인 발전에서도 비롯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라캉의 저작에서는 '라캉에게 맞서는 라캉 Lacan contra Lacan'이라는 투쟁적 계기는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26쪽)

그러니까 라캉은 시작부터 체계적이고 완전무결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 게 아니었고, 조금씩 수정하고 대체하고 방점을 이동시키는 식으로 그의 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래서 우리가 접하게 되는 것은 다면적 얼굴의 라캉이며, 때로 이 라캉'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라캉 vs 라캉'이란 표어가 억지가 아닌 것이다(라캉에 대한 국내의 많은 비판은 대개 이런 점들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일반적으로 라캉 이론의 진화는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로 방점이 차츰 옮겨간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라캉 자신이 이 세 등록소(register) 혹은 초점이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병행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이론가'라면 다들 그렇게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른다면, 그가 (*1940년대에) 상상계에 두었던 이론적 무게만큼 다른 차원에 동일한 무게를 두지 않았던 이유는 그 당시 청중들이 상상계 차원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27쪽) 

인용문에서 '상상계 차원'은 원문에서 그냥 대명사 'it'이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역자가 '상상계 차원'이라고 바꿔놓았는데, 내 생각에 이 번역서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오역인 듯싶다. 전후맥락은 이렇다.

"Lacan argues, for instance, that references to the role of the signifier were present in his discourse and his papers from the 1940s - the same applies to the concept of the real which is already present in his first seminars. The reason he didn't invest these demensions with th same theoretical weight that he did with the imaginary is, according to his view, that his listeners were not yet ready to accept it at that time."(6-7쪽)

기표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다르게 말하면 '상징계'에 대한 강조이다. 내가 보기엔 이 두 문장엔 라캉과 스타브라카키스 두 사람의 주장이 겹쳐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나의 심증으로 "references to the role of the signifier were present in his discourse and his papers from the 1940s"라고 지적한 건 라캉이고,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the same applies to the concept of the real which is already present in his first seminars."라고 덧붙인 건 스타브라카키스이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라캉의 발언을 옮긴 "his listeners were not yet ready to accept it at that time"에서 'at that time'은 1940년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거울단계'를 핵심으로 한 '상상계'에 대한 이론정립에 골몰하던 1940년대에도 라캉은 '상징계'를 언급했지만, 더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청중들이 그것(상징계)을 수용할 준비가 안돼 있었다는 것.

스타브라카키스는 이러한 변호가 상징계-실재계에서도 반복된다고 덧붙인다. 즉, 1951년의 첫번째 세미나에서도 '실재계'란 말은 등장하지만 라캉은 더 발전시키지 않았다. 왜? 청중들이 아직 그걸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도 역자는 'it'가 단수이기 때문에 앞에 나오는 'the imaginary'를 받는 걸로 보았을 텐데, 내가 보기엔 의미상 'these demensions'를 받아야 한다. 라캉에게는 '상징계'만을 뜻했을 'it'이지만 두 가지 사례가 포개져서 'these demensions'(상징계와 실재계)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라캉을 읽는 어려움이야 다 말할 수도 없겠다. 그저 독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도리밖에: "라캉의 독자들 모두에게 제기되는 도전은 라캉의 사유의 복잡함을 특정한 층화작용으로 환원함 없이 그리고 재현 안에서의 실재의 흔적으로 보전되어 있는 비결정성을 봉합함 없이 자기 자신의 독해를 구성하는 것이다."(28쪽)

'특정한 층화작용'이라는 건 침전시켜서 걸러낸다는 것인데, 알맹이들만 골라낸다는/환원한다는 의미겠다. 비결정성을 봉합한다는 건 제거하거나 무시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쉽겠다. 요는 그 복잡함과 비결정성을 보존하면서 자신의 독해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모방이 아니라 최종적인 라캉을 추구하지 않는 실재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즉, 라캉적인 실재계의 구성력에 우리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원문 역시 간추리면, "Simply put, instead of imitation we need interpretation, an interpretation which is not searching for the real definitive Lacan... and chooses to concentrate on the constitutivity of the Lacanian real..."(7쪽) 

역자의 '해석'이 많이 반영된 대목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라캉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해석해야 한다. 그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해석은 라캉의 어떤 고정적인 실체를 찾는 작업이 아니라 (의미작용의 확실성을 교란시키는) 라캉적 실재(계)의 구성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어야 한다. 표상되지도 환원되지도 축소되지도 않는 '라카니언 리얼'에 언제나 유의해야 한다는 당부이겠다.

이 서문의 마지막 대목은 라캉에 관한 '전기적 스케치'이다. 그건 그냥 읽어보면 되겠다. 그 이전에 저자는 라캉 읽기의 어려움이 어떤 보상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 그게 또한 독자의 마지막 몫이어야 하겠다.

"최근의 유토피아 정치의 위기는 실망과 정치적 염세주의의 원인이 되는 대신에 조화와 환상의 윤리학이 부과한 구속으로부터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해방'시킬 기회를 창조하고 있다. 또한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 네오파시즘, 민족주의적 배타주의와 근본주의가 다시금 그들의 추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시대에 정치적인 상상력의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라캉의 이론은 이러한 정치적 '해방'의 촉매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정치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비-근거적인(*비정초적) 윤리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34-5쪽, 강조는 나의 것) 

07. 01. 07 -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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