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면서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난다)을 읽었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몇 개 장을 읽고 이제 다시 손에 든 것인데, 그 사이에 선생은 유명을 달리했다. 선생을 수년 전에 어느 학회 자리에선가 마지막으로 뵌 나조차도 이 산문집이 선생의 마지막 책이라는 걸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선생이 우리말로 옮긴 <어린왕자>에 대한 강의도 그래서 일정에 포함했었다.

선생의 육성을 들어본 독자라면 이 산문집이 음성지원이 된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경우라서 조리 있으면서 말의 기품이 살아있는 글들을 선생의 육성을 직접 듣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다. 육신과 이렇듯 분리돼 있으면서도 실재하는 이 음성의 주인은 누구인가? 손택이 인용한 롤랑 바르트의 말이 떠오른다. ˝말하는 사람은 쓰는 사람과 다르고,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와 다르다.˝ 바르트의 원의와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다름을 ‘같지만 다름‘으로 이해한다.

황현산 산문집에서 우리가 듣는 목소리의 주인은 황현산 선생이면서 또한 그렇지 않다. 만약 같다면 그건 우리가 환청이라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쓰는 사람의 목소리, 곧 저자의 목소리이고 이는 ˝그 사람의 존재˝와 다르며 다른 운명의 삶을 산다. 우리 곁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라고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바로 그 존재다. 선생은 떠났지만 또한 그대로 남아있다.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익숙한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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