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기운을 차려 책을 읽기 시작한다. 강의를 위한 책(강의책)과 서평 원고를 위한 책(서평책), 순수하게 독서를 위한 책이 있다면(독서책), 독서책을 위한 시간을 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얼마나 내 맘대로 읽을 수 있는가가 삶의 질을 말해준다면 건강과 관련해서도 그렇고 삶의 질이 계속 떨어진다고 할까.

내 맘대로 읽는다면 다시 나온 미치오 가쿠의 <초공간>(김영사)과 함께 식탁에 두고 있는(식탁에는 200권이 넘는 책이 올려져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를 손에 들 것이다(<초공간>은 오래 전 대학원 시절에 단숨에 읽었던 책이다). 하지만 각각 과학과 역사 분야의 두 강력한 스토리텔러의 책들은 너무 재미있다는 이유로 계속 역차별을 받고 있다. 독서에 빠져 일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다.

해서 읽고 있는 건 서평을 염두에 둔 책 두어 권과 강의책들이다. 한숨 돌렸다고는 해도 다음주에 나는 <죄와 벌>과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모비딕>과 <여인의 초상> 같은 19세기 걸작에서부터 <토니오 크뢰거>, <마의 산>과 <양철북> 같은 20세기 걸작까지 강의해야 한다. 호프만의 <모래사나이>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나를 보내지마>도 덧붙여진다. 리스트는 막강하지만 모두 한 차례 이상 강의한 작품들이기에 상대적으로 수월하다고 느낄 따름이다. 그래도 분량으로는 3000쪽 이상이다(거기에 작품과 관련한 자료나 논문을 읽는다). 독서책을 읽을 여유가 거의 없을 수밖에.

그래서 독서책은 자주 그림의 책이 된다. 가까이 있어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초공간의 책에 대한 투정을 적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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