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생각난 김에 숀 호머의 <라캉> 원서를 잠시 찾아보다가 손에 집어든 책은 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Deleuze and the political)>(2000)이다. 작년인가 ''들뢰즈와 정치'를 읽기 위한 메모'까지 페이퍼로 써둔 적이 있었는데, 아직까지 읽은 거라고는 그때 읽은 서론이 전부이다. 그 서론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한데, 나의 관심사인 '들뢰즈와 경험론'이란 주제를 이전에 두어 차례 다루면서 이 서론의 마지막 대목은 빠뜨렸던 듯하다(확인해보니까 적어놓지 않았다). 그걸 보충해서 채워넣는다. 그러니까 이 글은 '들뢰즈와 경험론'에 대한 간단한 보유이기도 하다.

 

 

 

 

따라 읽어야 하는 대목은 번역본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의 서론 36-7쪽이다. 들뢰즈의 다양성(multiplicity; 요즘은 '다양체'라고 더 많이 번역되는 듯하다) 철학이 정치철학과 어떻게 접속되는지를 이야기하는 대목이다('들뢰즈와 경험론'이나 '들뢰즈와 경험론의 비밀' 같은 페이퍼를 참조).

"들뢰즈가 자신의 다양성의 철학에 논증을 제공하려고 시도하는 방식들 중 하나는 동사 '이다(to be)'보다 접속사 '그리고(and)'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는 부분적으로는 철학적 전통을 전복시키려고 하고, 관계성의 연결적 역능을 그것의 속성화(attribution)에로의 종속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

여기서 '역능'은 물론 'power'의 번역어이며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유래인) 스피노자 전공자들이 새롭게 제안하는 건 '역량'이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는 '계사' 대신에 '접속사'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암묵적으로 '계사존재론'의 형식을 취해온 서구 형이상학에 딴지를 걸고 다른 한편으로 ('접속사'라는 언어적 표현형식에 의해 표시되는) 관계성의 역량을 속성/속사에 대한 종속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속성/속사는 'X is Y'라고 할 때 X를 기술하는 Y를 가리킨다. 이때 X와 Y를 연결시켜주는 것, 그럼으로써 X를 특정한 속성 Y에 귀속시켜주는 것이 계사 is이다. 들뢰즈는 이 사태에 대한 기술을 'X and Y'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내가 예전에 강조하면서 인용한 바 있는 <디알로그>의 문장이다. "'이다(IS)'를 사유하거나 '이다에 대해(for IS)' 사유하는 것 대신에 '그리고'와 함께(with 'AND') 사유하라. 경험론은 결코 또 다른 신비를 갖고 있지 않다."(*'신비'는 'secret'의 번역이다.)

이에 대한 패튼의 주석: "모든 관계들에 내재하는 비규정적인 접속사로서, '그리고'는 상호 관계하게 된 어떤 두 사물들 사이(in-between)에 있는 것을 상징하게 된다. 새로운 '생성들', 사건들 또는 존재들이 항상 이런 '사이(in-between)'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의 공리가 된다. 그들의 견해에서 '그리고'는 항상 두 요소들 간의 경계선이고, 그 자체로서 사물들이 발생하고 변화들이 발생하게 되는 잠재적인 탈주노선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이 책이 '들뢰즈와 정치'라고 불리는 것은 전적으로 온당한 것이다."

'비규정적인 접속사(indeterminate conjunction)'란 '부정 접속사'란 뜻도 되겠는데, 이것은 부정 대명사와 마친가지로 무엇을 특징하거나 한정하지 않는다(들리즈가 좋아하는 것은 품사들은 이러한 부정대명사나 비인칭대명사이다). A and B라고 할 때 'and' 가 A나 B에 대해서 보태거나 한정해주는 게 없다는 얘기이다. 'and'는 그것들 '사이'를 대신할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새로운 사건들이란 항상 그 '사이'에서 출현한다는 것. 마치 사이먼 앤 가펑클의 화음처럼.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AND이다(http://www.youtube.com/watch?v=XGbnOmOzW-o).

반복하자면,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의 공리이다. 거기엔 아무런 비밀도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이 '들뢰즈와 정치'라고 불리는 것은 전적으로 온당한 것이다"라고 할 때 '들뢰즈와 정치(Deleuze and the political)'에서 and가 강조되지 않은 것은 온당하지 않다. 패튼의 책은 '들뢰즈와 정치', 혹은 '들뢰즈 그리고 정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06.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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