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존 산본마쓰의 <탈근대 군주론>(갈무리, 2005)을 언급할 일이 있었는데, 내친김에 몇 페이지 읽어보았다. 책장을 들추니까 예전에 저자의 한국어 서문 정도를 읽었군. 나는 작년에 책이 출간되자 마자 서점에 가서 몇 페이지 읽어보고 막바로 도서관에 원서를 주문했었다. '옮긴이 후기'에서 "책을 번역해 내놓을 때마다 항상 변변치 못한 번역 실력을 절감하지만, 이번만큼 번역을 내어놓기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라고 겸양의 말을 적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의례적인 말이긴 하나 독자로선 한번쯤 주저하게 되지 않나?

여하튼 주문한 원서는 몇 달 후에 들어왔고, 나는 첫 대출자가 되었다. 그리고 복사한 책을 번역서와 나란히 책장에 꽂아두었다. 아마도 작년 겨울에 몇 권의 다른 책들과 함께 읽어볼 생각을 했을 듯한데 대개의 다른 계획들처럼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손에 든 것이다. 그리고 서문을 읽었다. 저자가 책의 윤곽에 대해서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어서 마치 조감도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덧붙이자면 번역은 역자의 엄살과는 달리 잘 읽히며 무난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서문을 정리해두려 했으나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견적을 필요로 한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범위가 매우 넓고 또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모든 종류의 전력작 정치사상을 폭넓게 비판한 이 포스트구조주의 비평가(=푸코)가 급진적 전통에 가장 큰 해악을 끼쳤다고 주장한다."(35쪽) 같은 핵심적인 전언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상단한 분량의 사전정지 작업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러한 악역(푸코)을 물리칠 우리의 영웅으로 저자가 추켜세우는 인물은 그람시이다(그람시란 이름은 책의 헌사에도 들어 있다). 말하자면 책은 '좌파정치학'을 놓고 '탈근대 목장'에서 벌어진 푸코와 그람시의 '결투'를 다룬다. 

하지만 이 페이퍼는 그 결투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역사를 많이 거슬러 올라가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다룬다. 저자가 보기에 오늘날의 '좌파'가 처해 있는 문제점은 분리되고 분열돼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바벨탑 이후'처럼. "전 지구적 '좌파'라는 걸 의미있는 범위에 국한해 말하자면, 게슈탈트로스 곧 '형태없는'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실체'가 없는 것으로 비치는 운동이라는 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이 땅을 떠돌 운명이다."(27쪽) 그렇다면, 이 '형태 없는' 좌파는 '형편 없는' 좌파이기도 할 것이다. 그걸 타개해보고자 하는 게 책이 기획이다.

"언제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난 한 세기 이상, 사회주의는 세계의 좌파 상당수에게 형태 또는 형식을 제공해왔다. 사회주의 힘은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있었다. 그건 바벨탑에서 잃어버린 인류의 단결을 되찾자는 고대 종교적 이상과 닿아있다."(강조는 나의 것) 그리고, 흥미롭게도 저자인 산본마쓰는 그러한 사회주의의 비전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대목에서 발견하고 인용한다. 사실 이것이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동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는 단지 노동 문제가 아니다."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화자는 말한다. "그건 무엇보다 미학 문제이고 오늘날 무신론이 취한 형식의 문제이고, 또 신 없이 건설한 바벨탑의 문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이 땅에 하늘을 건설하는 문제이다."(28쪽)

참고로, 산본마쓰가 인용하고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1949년 Modern Library판의 영역본인데, 짐작엔 저명한 러시아문학 번역자 콘스탄스 가넷 여사의 번역이다. 그 원문은 이렇다: "Socialism is not merely the labour question, it is above all things the atheistic question, the question of the form taken by atheism today, the question of the tower of Babel built without God, not to mount to Heaven from earth but to set up Heaven on earth."

이 대목은 제1부 1편의 5장 '장로들'에 나오는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막내 알료샤의 성장사와 조시마 장로에 대한 소개로 돼 있다. 역자는 한국어판으로 이훈섭 역의 '정음사판(1959) 등 다수'라고 원주에다 병기해놓았지만, 실제로 정음사판을 참조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정음사판은 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던 대중적인 판본이긴 하나 최초의 번역본도 아니며 한편으론 중역본이기 때문이다. 번역에 민감한 역자가 굳이 오래전에 절판된 중역본을 표나게 내세운 이유를 나로선 알기 어렵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it is above all things the atheistic question'을 "그건 무엇보다 미학 문제이고"라고 옮긴 건 착오이다.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무신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이 읽히는 무난한 번역이지만 가넷 여사 등의 번역은 원문을 100% 번역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가독성은 높지만 충실한 번역은 아니다. 이그나트 압세이가 옮긴 1998년판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번역본에서 문제의 대목은 이렇게 번역됐다.

"[F]or socialism is not only a conditions of labor or of the so-called fourth estate, but rather, for the most part, a question of atheism, a question of today's particular form of atheism; it is a Tower of Babel built specifically without God, not in order to ascend to heaven from earth but in order to bring Heaven down to earth."(33쪽)

단어 선택에 있어서의 차이가 작지 않은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나 가넷판에서 누락된 'of the so-called fourth estate'를 되살려놓고 있는 점이다. 김학수 선생의 국역본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라는 것은 단순한 노동 문제라든지, 이른바 제4계급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로 무신론의 문제이고, 무신론의 현대적인 구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지상에서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 하느님 없이 쌓고 있는 바벨 탑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제4계급이란 건 프롤레타리아, 곧 노동자계급을 말한다. 중세의 신분적 위계질서 속에서 제1계급은 왕이나 영주를 가리켰고 제2계급은 귀족, 그리고 제3계급은 평민(부르주아)을 뜻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한 제4계급이 노동자였던 것. 김학수 선생의 번역에서도 '제4계급'에 대해 주석을 달아주거나(옥스포드판에는 미주가 달려 있다) '노동자계급의 문제' 정도로 옮겨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정리하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사회주의란 '신 없이 건설하는 바벨탑', 곧 무신론의 현대판이다(도스토에프스키는 이 무신론을 '니힐리즘'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이 '새로운 무신론'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와 알료샤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산본마쓰의 인용은 본래 작품에서 괄호안에 들어가 있는데 그것이 부연하고 있는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알료샤도 자기 진리의 조속한 성취를 갈망하는 점에서는 다른 청년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나 다만 그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정반대 되는 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는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신과 영생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자마자 곧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영생을 위해 살고 싶다. 어중간한 타협 같은 건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그가 신과 영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렸다면 그는 곧 무신론자나 사회주의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알료샤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던 것. (1)신과 영생 (2)무신론 혹은 사회주의. 그걸 바벨탑(유토피아) 버전으로 말하자면, '신과의 영생(Immortality with God)' vs '신 없는 바벨탑(Babel without God)' 산본마쓰는 도스토에프스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기서 두번째 입장을 사회주의의 잃어버린 비전으로 제시한다.

"바벨탑 이야기의 교훈은 이 땅에서 인간의 노력을 통한 단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창조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할 수 있다고 꿈꾸면, 우리의 교만이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한마디로 전지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지역적으로(또는 부족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는 거다."(28-9쪽) 하지만 그렇게 주저앉는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계속 반역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이 땅에서 보편적인 화합을 이룬다는 유토피아적 표상을 후대가 계속 보존해왔다.(...) 기독교 그리고 후에 이슬람교가, 하나가 된 세상이라는 오랜 꿈을 보편적인 정의라는 자신들의 꿈의 밑바탕으로 삼았다. 한참 뒤 계몽사상은 바벨탑의 복원에대한 아브라함의 열망을 세속화했다. 근대 이성의 꿈속에서, 18세기 백과전서파와 자코뱅파로부터 19, 20세기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바벨탑을 재건하고 전체를 복원하려 했다."(29-30, 강조는 나의 것)

이어서 등장한 맑스. "맑스의 생각은 흩어진 노동계급을 단결시키고 역사적 건설 또는 포에이시스라는 공통의 기획의 바탕을 창조할 수 있는 공통의 정치 언어를 향한 탐구를 대표했다." 원문에서 포에이시스(poeisis는 이탤릭체로 돼 있다. 보통은 포이에시스(poiesis)라고 더 많이 음역되는 그리스어인데, 제작/창조(making/creating)란 뜻이고 하이데거는 'bringing forth'란 뜻으로 새겼다. 여기서는 '새로운 역사의 건설과 창조'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한 건설/창조에 바탕이 될 '공통의 정치언어'를 맑스는 찾으려고 했다는 것.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주의는, 옛날엔 표면상으로만 달랐지 본질적으론 그렇지 않던 노동게급의 많은 '나라들'을 단결시키는 공통의 언어, 일종의 에스페란토어였을 것이다."(31쪽) 곧, 만국의 노동자를 단결시켜줄 수 있는 공통어(에스페란토어), 그게 사회주의이다. 사진은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광장에 있는 맑스의 동상. 비대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러시아어로 새겨져 있다.

산본마쓰의 불만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이러한 사회주의의 꿈(=바벨탑)이 거의 포기됐다는 것. 남은 건 '바벨탑 이후'의 분열적인 분파들이다. 평화운동, 동성애운동, 여성주의, 환경운동, 유색인종 운동 다 제각각의 진보를 주창하지만 이게 콩가루다. 게다가 이론과 실천의 새로운 종합에 대해서는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는 이론들만 대학가에서 득세한다. '연대'가 아니라 '차이'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저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현상이며, 그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 뒤이어 그람시적 제스처를 따르는 새로운 에스페란토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차이의 정치학'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그런 것이 내가 서문에서 읽은 밑그림이다. 책의 나머지 부분들도 흥미를 끌지만 언제 마저 읽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한편 산본마쓰가 서문에서 줄곧 참조하고 있는 책은 조지 스타이너의 <바벨 이후>(1977)이다(리쾨르의 <번역론>에서도 참조된 책이다). 나는 책의 2판인지를 갖고 있는데(젠장, 박스보관도서이다) 찾아보니 지난 1998년에 제3판이 출간됐다. 스타이너의 주저 중 하나인 이 책이 언제쯤 번역돼 나올 수 있을까, 기다리느니 원서를 읽는 게 더 빠를까? 아무튼 '바벨 이후'에 막바로 소통이 안되는 언어들 때문에, 차이들 때문에 고생 만땅이다...

06. 12. 07.

 

 

 

 

P.S. 하니, 영어 공용어론자들이야말로 좌파 사회주의자들 아닌가?(복거일은 가면을 쓴 사회주의자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자는 어떻게 자신의 포지션을 유지할 수 있는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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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shin 2006-12-0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판 번역과 관련된 언급만이 제 몫일 겁니다. '미학'은 착오에 의한 오역이군요. 바로 뒤에 무신론이 나오는데, 꼼꼼히 챙기지 못했군요.

이훈섭 역을 언급한 이유는 엉뚱한 데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검색 결과를 참조했고, 저 책이 첫 번역일 거라고 그냥 짐작했기 때문이지만 더 큰 이유는 절판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번역이 있고 어떤 번역이 신뢰할만한지 모르니 안전하게 아무도 볼 수 없을 옛날 책을 거론한거죠. 독자들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번역자로는 그냥 '다수의 번역'이라고 주석에 달 수는 없기에 쓴 겁니다.

sommer 2006-12-08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와 바벨탑, 현대한국 사회와 소비에트 시절...이미 엉뚱한 곳에서 바벨탑은 '재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6-12-0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ishin님/ '아무도 볼 수 없을 옛날 책', 이라도 왜 굳이 집어넣으신 건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정황은 짐작해볼 수 있겠네요. 아무도 볼 수 없을!..
suture님/ 표지의 뉘앙스를 알아보시니까 반갑습니다.^^ 곧 짓게 된다는 제2 롯데월드 같은 것도 바벨탑의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