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쓰는 전략으로 할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전은 잠자는 데만 썼다. 아침을 먹고도 3시간 넘게 잤으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야 마땅하나 조금 덜 피곤한 세상이로군. 전치 일주일은 필요한가 보다.

점심을 먹기 전 막간에 이주에 나온 시집을 읽는다. 임경섭의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창비). 창비시선으로 나왔다는 사실이 특이하게 여겨져 확인해보니 첫 시집 <죄책감>은 문학동네에서 나왔다. 특이하다고 여긴 건 ‘슈레버 일기‘가 창비시선과 같이 연상되지 않기 때문인데 여하튼 버젓이 존재하는 시집이 되었다. 찾아보니 장바구니에만 넣어져 있던 <죄책감>도 주문했는데 당분간은 임경섭의 모든 시집에 주목할 참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임경섭의 리듬 감각과 슈레버적 상상력이다. 두 가지를 결합하고 있는 게 고유명사의 은유적 대체다. ˝나는 목욕할 때마다˝라고 쓸 대목에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라고 쓰고, ˝나는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헤르베르트 그라프는 그의 아내에게 오로라를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쓴다. 그에게 동물원은 ‘라이프치히 동물원‘이고 교회는 ‘성 토마스 교회‘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런 대체에 의해서 평범한 언술이 시적 언술이 된다. 이건 시에 대한 야콥슨의 고전적 정의(˝시는 등가성의 원칙을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다˝)가 얼마나 정확한 정의인가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슈레버적 상상력 속에서 임경석의 시는 내가 읽은 어떤 한국시보다 근사하게 카프카적 공간을 연출한다. ˝어머니가 죽으니 양복이 생겨서 그는 좋았다˝ 같은 감각의 세계다. 또 ˝눈이 내리고 있다고 쓰면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적는 세계다. 이런 세계가 지적 조작이 아닌 감각에 의해 무대화된다는 게 감탄할 만하다. 지지할 수 있는 시인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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