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에서는 <황야의 이리>(1927)와 함께 헤세의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싯다르타>(1922)를 강의에서 읽었다(우리에게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의 헤세인 것과 비교된다). <데미안><황야의 이리>와 함께 헤세 강의에서 가장 많이 다룬 작품인데, 오늘은 이 작품의 부제가 ‘한 인도의 시‘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어떤 면에서 소설이 아니라 시에 가까운가를 해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사실 이 작품에 대한 나의 견해는 <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책세상)에서 자세히 밝혔기에 중복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1919년말에 집필에 들어가 한동안의 공백을 거쳐서 1922년에 완성한 <싯다르타>는 <데미안>(1919)의 주제를 이어받으면서 한 걸음 더 진전시킨 작품이다. 그 주제란 ‘삶이란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여정‘이라는 주제다. 문제는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동시대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데 있다. 그리고 소설이 아니라 ‘시‘를 쓴다는 데 있다. 덕분에 헤세는 <데미안>의 많은 약점과 결함을 피해갈 수 있었다. 시인으로서의 역량도 발휘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고타마 싯다르타의 경지에 도달하는 주인공이자 분신으로서 싯다르타를 그려냄으로써 가정생활과 창작의 위기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다(작품을 발표한 이듬해에 헤세는 첫번째 아내 베르누이와 이혼한다).

그렇지만 역시나 문제는 이 작품이 한갓 시에 불과하다는 것. 내가 헤세의 대표작으로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황야의 이리>를 꼽는 이유다. 내가 좋아하는 헤세는 싯다르타처럼 득도했다고 우쭐하는 헤세가 아니라 중년의 나이에도 시민사회와 불화하면서 배회하는 ‘황야의 이리‘로서의 헤세다. 헤세이면서 가장 헤세적이지 않은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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