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하디보다 한 세대 앞서지만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작가로 같이 묶일 수 있는 러시아 작가는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다. 이번 봄에도 투르게네프의 <루진>과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강의가 있었는데, 그의 문학사적 의의는 여러 가지로 짚어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섯 편의 ‘사회소설‘의 저자로서의 투르게네프다(그에 견줄 만한 것은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의 저자 투르게네프).

하디의 웨섹스 소설 여섯 편을 거명한 김에 투르게네프의 사회소설에 대해서도 다시 정리해놓는다.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다시 나오지 않아서 갖는 불만도 토로할 겸. 내가 염두에 두는 건 러시아의 첫 사실주의 소설로 간주되는 <루진>부터 마지막 장편 <처녀지>까지의 여정이다.

<루진>(1856)
<귀족의 보금자리>(1859)
<전날밤>(1860)
<아버지와 아들>(1862)
<연기>(1867)
<처녀지>(1877)

대략 20년간의 여정인데, 장편에 한하여 투르게네프 전작 읽기를 아직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탄생 200주년을 맞아 새 번역본에 나오길 기대했지만 불발로 그쳤기 때문이다. 현재 공백인 작품은 <전날밤>과 <연기>, 그리고 <처녀지> 세 편이다.

러시아문학 강의시에는 투르게네프에 할애된 시간이 많지 않기에 통상 <아버지와 아들>이나 중편 <첫사랑>을 읽곤 한다. 톨스토이의 3대 장편소설이나 도스토옙스키의 5대 장편소설(<미성년>을 빠뜨리면 4대 장편소설) 읽기도 분량이 만만하지 않아서 쉽게 엄두를 내기 어럽지만 번역본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투르게네프의 경우에는 번역본이 문제가 된다.

이번 겨울에 한 강의에서 투르게네프 읽기를 기획하고 있는데 4주간 네 작품을 읽는 일정이고 그 가운데는 <루진>과 <귀족의 보금자리>(민음사판 <첫사랑>에 들어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포함돼 있다. 나머지 세 작품은 언제 다룰 수 있을지 미지수다(<연기>와 <처녀지>는 범우사판으로만 나와 있다). 개인적으로 <연기>는 과거에 대학강의에서 한 차례 읽었고 <처녀지>는 아직 한번도 강의한 적이 없다. 내게 <처녀지>는 말 그대로 ‘처녀지‘다.

투르게네프의 사회소설에 대해서는 국내 전공자의 책으로 이항재 교수의 <소설의 정치학>이 있다(어빙 하우의 책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투르게네프의 정치학‘을 음미해보기 위해서라도 <전날밤>과 <연기>, <처녀지>, 세 작품의 새 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나도 투르게네프 강의를 완성하여 한권의 책으로 묶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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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문학 강의는 바야흐로 20세기(조이스)로 넘어갈 참인데 제인 오스틴부터 다룬 19세기문학 강의의 마지막 작가는 토머스 하디(1840~1928)다. 시인으로도 걸출한 업적을 남겼지만 영문학사에서 소설가 하디의 자리는 그의 ‘웨섹스 소설‘ 덕분에 마련된다. 자신의 고향 농촌마을을 그는 작품에서 ‘웨섹스‘라고 부르기에 일련의 소설들을 ‘웨섹스 소설‘이라 부른다. 단편집을 제외하면 여섯 편의 장편소설이 그에 속한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1874)
<귀향>(1878)
<캐스터브리지의 시장>(1886)
<숲사람들>(1887)
<더버빌가의 테스>(1891)
<이름 없는 주드>(1895)

몇년 전 강의에서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와 <이름 없는 주드>를 읽었고 이번 강의에서 <캐스터브리지의 시장>과 <더버빌가의 테스>를 다루었다. <귀향>과 <숲사람들>을 제쳐놓은 건 번역본이 절판되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다시 나온다면 이번에 읽은 <캐스터브리지의 시장>과 마찬가지로 언제든 다룰 생각이다.

이전 강의에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캐스터브리지의 시장>과 <테스>를 읽으면서는 하디식 소설의 특징으로 ‘비극적 소설‘에 주의하게 되었다. 강의도 비극과 소설이란 두 장르가 그의 작품들에서 어떻게 혼합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같은 자연주의 작가로 분류되지만 에밀 졸라와 하디 소설의 차이점도 이번에 식별할 수 있었다.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은 그런 비극적 소설의 모델인데 아직 읽지 않은 <귀향>과 <숲사람들>에는 어떻게 제시되는지 궁금하다. 아울러 마지막 작품 <이름 없는 주드>(학계에서 통용되는 제목은 <무명의 주드>)도 언젠가 다시 다루게 되면 비극적 소설이란 관점에서 재독해해볼 생각이다. 하디 소설에 대한 나의 관심은 거기까지다(로렌스의 하디 연구서까지 읽는다면 최대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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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강의를 마치고 상경중이다. 한주 더 남아있지만 이번주가 봄학기 강의의 마지막 고비였다. 빡빡한 일정을 겨우 소화해서 ‘생환‘했다는 감회마저 든다. 내일 하루는 휴식을 취하면서 바야흐로 여름 일정에 대비해야겠다. 올여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조이스 읽기인데, 거기에 헤세 강의와 미국 현대작가 읽기 등이 더해진다.

이런 개인적인 일정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맞춤하게도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창비)과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열린책들) 새 번역본이 나왔다. 강의에서는 각각 문학동네판으로 읽을 예정이지만 겸사겸사 참고해보려 한다.

더불어서 <데미안>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내 삶에 스며든 헤세>(라운더바우트)도 이번에 나왔다. 58명의 명사들이 헤세와의 인연을 고백했는데 한국의 헤세 수용사를 엿보게 해주는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나도 필진으로 참여해 헤세의 고향 칼브 방문기를 <수레바퀴 아래서> 독서 경험을 되살리며 적었다. 주말이나 다음주 초에 책을 받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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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2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이언 매큐언의 <넛셸>(문학동네)에 대해 강의하기 전에 간단히 작성한 리뷰다. 소설에서 더 흥미로운 부분은 따로 있지만 스포일러에 해당하기에 리뷰에서는 <햄릿>의 패러디만 주로 언급했다...














 


주간경향(17. 05. 27) 태어나느냐 마느냐, 햄릿적인 태아의 고민


영국 작가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오마주 작품을 쓰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대표작 <햄릿>을 다시 쓴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언 매큐언의 <넛셸>은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므로 특이하지도, 놀랄 것도 없는 소설이지만 그것은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까지만이다. “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 있다”고 말하는 화자가 태아여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자궁 속 태아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이 없지는 않다고 한다. 다만 햄릿을 태아로 설정한 전례는 없었다.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하는 햄릿이 <넛셸>에서는 태어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는 태아로 바뀌었다.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자궁 속에 있으니 ‘나’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태명도 없고 특별한 태교도 받지 않는다. 그의 탄생에 관한 준비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젊은 어머니 트루디가 아이보다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다. 이미 의식을 갖고 있는 ‘나’는 자궁 속에서 전해듣는 정보만으로 사태를 파악하는데, 트루디는 남편 존의 동생 클로드와 불륜에 빠졌다. 존은 가난한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이고, 클로드는 옷과 자동차밖에 모르는 부동산 개발업자다. 형제라고는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그것은 마치 “내가 베르길리우스나 몽테뉴를 닮지 않은 것”과 같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숙부인 클로디어스가 부왕 햄릿을 닮지 않은 것은 마치 자신이 헤라클레스를 닮지 않은 것과 같다고 말하는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 형제가 삼각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넛셸>은 <햄릿>을 패러디하고 있지만, 트루디와 클로드가 공모하여 존을 독살한다는 전개는 <맥베스>를 비튼 것이다. 태아인 ‘나’는 두 사람의 음모를 저지하고자 하지만 자궁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두 사람의 음모가 성공한다면 ‘나’는 그들 관계의 걸림돌로 버려질지도 모른다. 반대로 만약 실패한다면 ‘나’는 어머니와 감방에서 인생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더해 탯줄을 목에 감고 자살할 궁리까지 한다. 하지만 자살은 숙부에 대한 결정적인 복수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책 <나의 21세기 역사>를 끝까지 읽고 싶어한다. 자살 대신에 삶을 선택하는 이유다.

<햄릿>에서 아들 햄릿은 부왕의 유령을 통해서 숙부의 암살행위를 알게 되지만 <넛셸>의 ‘나’는 이미 어머니와 숙부의 음모와 그 결과를 알기에 부왕의 유령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유령이 등장해 두 악인을 응징할 수도 없다. 과연 어머니와 숙부의 범죄는 아무런 응징을 받지 않는 완전범죄가 될 것인가. 사건의 해결은 조사차 이들을 찾아온 경찰의 몫이 된다. 그리하여 셰익스피어 비극을 따라가던 <넛셸>의 결말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바통을 넘겨준다.

햄릿적인 태아를 화자로 설정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넛셸>은 아무래도 태아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이언 매큐언의 이야기다. 작가 매큐언의 존재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성 정체성부터 기후변화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슈에 대해서 박학한 식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무리 허구적 설정이라 하더라도 공감을 떨어뜨린다. 매큐언의 햄릿도 너무 생각이 많다. 


19. 0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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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4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 소설이 한권 더 번역돼 나왔다. <검은 개>(문학동네). 올해 나온 새로운 장편을 포함해서 매큐언의 장편소설은 모두 열다섯 권인데 1992년작이 <검은 개>는8 다섯번째 소설이다. 바로 전작이 <이노센트>(1990)이고 후속작이 <이런 사랑>(1997)이다. 매큐언은 연이어 부커상 수상작 <암스테르담>(1998)과 대표작 <속죄>(2001)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전성기를 맞는다. <검은 개>는 이러한 여정 혹은 경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궁금한 독자도 있는 법.

열다섯 권 가운데 번역된 작품은 모두 열두 권이고, 이 가운데 네 권이 절판된 상태다. (소설집을 제외하고) 현재 읽을 수 있는 장편은 여덟 권이라는 얘기다. 이번 강의에서 세 권을 읽고 있는데 기회가 닿는다면 순서대로 더 읽어봐도 좋겠다. 현재로선 <이노센트>부터다(얼마전에 적었듯이 <암스테르담>은 절판되었다)...

<이노센트>(1990)
<검은 개>(1992)
<속죄>(2001)
<토요일>(2005)
<체실 비치에서>(2007)
<솔라>(2010)
<칠드런 액트>(2014)
<넛셸>(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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