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동화책에서 본 글이다. 옛날에 애꾸눈 왕이 있었는데, 나라 안의 유명한 화가들을 불러 초상화를 그리라고 했다. 모든 화가는 어떻게 왕의 모습을 잘 그릴까 고민을 했다. 애꾸눈을 그대로 그린 화가들, 애꾸눈이 아닌 것처럼 정상적으로 그린 화가들 제각기 다양하게 그렸다. 그런데 임금님은 화를 벌컥 내면서 거짓으로 그린 것도 안 되며 애꾸눈인 자기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 또한 몹시 불쾌하다며 다른 화가를 찾았다. 많은 화가 중에 마침내 임금님의 마음에 흡족한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나타났다. 그 화가는 임금의 미소 띤 옆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다.

 

“폐하,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폐하는 미소 짓는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왕의 신체적 단점을 극복하여 미적 완성도를 높인 초상화를 제작한 이 화가는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 대상을 진짜처럼 똑같이 그릴 줄 안다고 해서 다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대상도 아름답게 보고 묘사하는 능력이야말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사실 초상화의 등장은 원래 얼굴 정면이 아닌 측면을 그린 것으로 시작되었다. 인물 또는 사물을 대충 나타낸 그림을 실루엣이라고 한다. 원래 하나의 색조만을 사용해 만든 이미지나 도안, 또는 물체의 윤곽이나 윤곽이 뚜렷한 그림자를 의미했다. 실루엣은 종이를 오려서 그림자 초상을 만드는 것이 취미였던 18세기 중반의 프랑스 재무장관인 에티엔 드 실루에트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그는 흰 종이 위에 검은 종이를 옆모습처럼 잘라 붙여 만든 초상화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조지프 라이트  「코린토스의 소녀」  1782~1785년경

 

 

그렇다고, 실루엣을 만든 실루에트가 측면 초상화를 최초로 그린 사람은 아니다. 그 기원을 찾아보려면 미술의 역사를 더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벽에 비친 인물의 그림자 윤곽을 그린 코린토스 도공의 딸에서 측면 초상화가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도공의 딸은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터에 떠나보내야 하는 생이별의 슬픔을 견디는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훈련소로 떠나보낸 남자친구의 사진을 지갑 안에 소중히 간직하는 곰신의 처지가 되었으나 그땐 사진이 있을 리가 없다. 멀리 떠나 있어도 애인의 얼굴이 바라보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다. 그래서 도공의 딸은 애인의 얼굴에 불빛을 비추어 나타난 그림자의 외곽선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이렇듯 서양의 초상화는 정면을 그리던 동양의 초상화와 달리 측면을 중시했다. 측면의 윤곽을 뜻하는 프로파일(profile)은 오늘날 특정 인물에 대한 단평이라는 뜻으로 더 알려졌다. 정면이 아닌 측면이야말로 한 사람의 특징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인식했다. 

 

모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멋있지 않은 모델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 모델을 정확하게 그리기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앞에서 언급한 동화 속 궁정화가는 화가 중에 극한직업일지도 모른다. 왕은 화가가 만나게 될 모델의 ‘끝판왕’이다. 권력자의 얼굴을 늘 바라보고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은 화가로서의 재능과 배짱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Mission impossible)이다. 왕이 초상화가 마음에 든다면 더 많은 명예와 부를 얻을 것이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화가의 입지는 곤란해진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 부부」  1472년경

 

 

과연 이 그림의 모델은 초상화 속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는지 무척 궁금하다.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프란체스카는 근엄하게 보여야 할 모델을 솔직하게 그리는 데 치중한 것 같다. 관객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의 매부리코와 검버섯에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약간 풀린 듯한 공작의 눈은 세상의 거센 풍파를 딛고 정상에 오른 권력자의 고된 여정을 말해준다. 화가가 공작을 무기력하게 그렸어도 한 지역을 다스리는 권력자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공작 부부의 배경으로 공작이 소유한 땅을 그려 넣어 권력자의 자부심을 한껏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프란체스카가 공작 부부를 서로 바라보는 설정으로 측면을 그린 것은 공작을 멋있게 그리고 싶은 화가의 배려이다. 공작은 마상시합 중에 오른쪽 눈을 다쳐 실명된 상태였다. 프란체스카는 공작의 오른쪽 눈이 드러나지 않도록 왼쪽 측면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공작의 부인은 자연스럽게 오른쪽 측면으로 그리게 됨으로써 부부는 죽어서도 그림에서나마 영원히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부부 초상화에 관련된 또 하나 슬픈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서로 마주 보는 공작 부부의 애틋한 사랑이 어렴풋이 재현된다. 부부 초상화가 제작되기 전에 공작부인은 아들을 출산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화가는 부부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부부가 서로를 마주보도록 그렸다.

 

프란체스카가 못생긴 공작을 있는 그대로 그렸던 것은 오른쪽 눈을 잃고, 거의 다 늙어간 정도로 남성미가 완전히 상실된 공작의 곁을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 공작부인과의 고결한 사랑을 충실하게 표현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듯이 찬바람같이 훨훨 들어오는 세월은 뜨거웠던 사랑 감정을 식게 한다. 이 공작 부부의 초상화는 단순히 권력과 부를 과시하려는 일종의 명예인증서라기보다는 고결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인증하는 멋진 그림으로 볼 수 있다.

 

 

 

 

 

 

 

 

 

 

 

 

 

 

 

 

 

눈, 코, 입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정면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는 사람의 옆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옆모습은 우리의 눈을 이쪽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도록 은근히 유혹한다. 그렇다고 해서 손을 벨 것처럼 날카로운 콧대와 조각 같은 옆모습이 사랑받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다. 가짜 콧대와 가짜 눈으로 겉모습이 화려한 얼굴을 자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내면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나무는 사랑하면 그냥,
옆모습만 보여준다

 

옆모습이란 말, 얼마나 좋아
옆모습, 옆모습, 자꾸 말하다보면
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

 

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 반반씩
들어앉아 있는 거 

 

 

(안도현, ‘옆모습’ 중에서)

 

 

어쩌면 삶의 동반자와 백년해로하는 과정에 정작 옆모습을 소홀히 여길 수도 있다. 진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도 늘 바라보아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단점도 예쁘게 보인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에서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매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옆모습에서 진솔한 매력을 발견하는 것은 정겹다. 옆모습, 옆모습, 자꾸 바라보면 시큰거린 옆구리에 사랑하는 사람의 옆구리가 있음을 가까이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바라볼 수 있어서 행복한, 꾸밈없고 진실한 그 옆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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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1-0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정겨운 얼굴이 좋아. 아주 미남이거나 아주 미녀보다는. 그나저나 우리 사이러스 얼른 연애를 해야 할 터인데_

cyrus 2015-01-03 20:30   좋아요 0 | URL
연애세포가 완전히 죽기 않기 위해 오늘도 글로 사랑을 논합니다. ㅋㅋㅋㅋ

댄스는 맨홀 2015-02-04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주는게 사랑인 것 같아요.
 

 

 

 

 

 

 

 

 

 

 

 

 

 

 

 

 

 

을미년이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는 책으로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오른쪽 주머니에 나온 이야기』(모비딕, 2014년)를 펼쳤다. 새해 첫날이라서 그런지 책에 수록된 단편소설 중에 '점쟁이'라는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경찰서장이 마이어스 부인이라는 사람의 정체를 의심한다. 마이어스 부인은 점쟁이다. 그녀의 집에 매일 십여 명의 방문객이 점을 받으러 온다. 경찰서장은 마이어스 부인이 점쟁이로 위장하는 간첩이라고 추정한다. 점쟁이의 정체가 궁금한 경찰서장을 위해서 그의 부인이 직접 점쟁이를 만나기로 한다. 경찰서장의 부인은 점쟁이에게 점을 받는 척하면서 그녀의 말과 행동을 관찰한다. 점쟁이는 카드 점으로 경찰서장의 부인의 미래를 알려준다. 올해 내로 부유한 젊은 사업가와 결혼할 수 있는데, 나이 많은 남자가 이 결혼을 방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경찰서장의 부인이 점쟁이에게 얘기하는 내용은 다 거짓말이다. 부인은 점쟁이에게 자신을 미혼이라고 밝혔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형사과에 소속된 경찰이라고 속였다. 즉, 점쟁이의 점괘 결과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인 셈이다. 점쟁이의 엉터리 점괘는 그녀에 대한 간첩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점쟁이는 간첩 혐의에서 벗어나지만, 고용 허가를 받지 않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한다. 일 년 후, 점쟁이의 엉터리 점괘 내용대로 경찰서장의 부인은 남편을 버리고 젊은 백만장자와 결혼한다.

 

절대로 그럴 일이 없을 거로 생각하면서 코웃음 치던 엉터리 점괘 결과가 종종 진짜로 이루는 경험이 있다. 점쟁이의 실력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점쟁이의 신기가 뛰어난 것일까. 절대로 그렇다고 볼 수 없다. 황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이다. 이 소설에서 점쟁이는 카드 그림을 제멋대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경찰서장의 부인에게 알려준 점괘 내용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밝혀지자 점쟁이는 아무렇지 않은 일인 듯이 변명한다. 점이 궁금한 사람들이 듣고 싶은 내용만 알려 주기 때문에 제 일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점쟁이는 특별한 신기로 점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속내가 드러나는 말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가 듣고 싶은 좋은 내용만 알려주는 것뿐이다.

 

'점쟁이' 다음에 나오는 단편의 제목은 '신통력의 소유자'다. 이 소설에는 친필 글씨가 적힌 종이가 든 봉투 안에 손만 넣어도 친필 주인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맞추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 나온다. 그의 신통력을 소문으로 알게 된 검사는 사기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의심이 가득한 검사는 자신이 직접 누군가의 친필 글씨를 준비해서 신통력이 사기임을 밝히고자 한다. 초능력자는 검사가 가져온 친필 글씨의 주인이 절대로 상대하기 껄끄러운 위선자, 기회주의자,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검사는 초능력자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초능력의 실체를 부인한다. 검사는 원래 범죄자의 친필 글씨를 준비하려다가 그만 실수로 자신의 친필 글씨가 있는 종이를 봉투에 넣고 말았다. 초능력자가 했던 말이 껄끄럽게 생각하지만, 그가 말한 얘기는 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면서 애써 잊어버린다. 그런데 검사는 초능력자가 말한 내용을 재판 변론에 써먹는다. 검사의 화려한 수사 덕분에 범죄자가 유죄 판결을 받는 데 성공한다. 

 

차페크가 쓴 두 이야기는 신통력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속이는 자와 그 속임수에 믿는 자의 심리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부조리한 결말로 독자에게 웃음을 준다.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만 듣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간파하여 점을 치는 엉터리 점쟁이, 초능력자의 엉터리 예측을 무시하면서도 그 내용을 자신의 변론으로 사용하는 검사. 가짜 신통력으로 사람을 속이는 자나 그 속임수를 진짜 신통력이라고 받아들이는 자를 통해 인간 심리의 약점을 희화화한다.

 

이성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인간도 오늘의 운세, 신년 사주를 좋아한다. 삶의 앞날을 정확하게 내다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냥 재미로 운세나 점괘를 본다지만, 내심 앞으로 일어나게 될 미래가 무척 궁금해한다. 점쟁이가 내 성격을 정확하게 맞추면, 그가 얘기하는 내용 하나하나 다 믿고 싶어진다. 반대로 좋지 않은 점괘를 들으면 걱정한다. 점쟁이의 부정적인 점괘가 엉터리라고 부정해보지만, 여전히 점쟁이의 말을 뇌리에 박혀서 잊히지 않는다.

 

 

 

 

 

 

 

 

 

 

 

 

 

 

 

 

 

 

사주와 운세가 꼭 내 이야기처럼 들리는 심리 효과를 ‘바넘 효과(Banum Effect)’라고 한다. 19세기 말 곡예단에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을 알아내는 일을 하던 바넘이라는 사람에게서 유래되었다. 심리학자인 포러라는 사람이 성격 진단을 통해 처음으로 증명한 까닭에 ‘포러 효과’라고도 한다. 포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격 검사를 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신문에 난 점성술 내용의 일부만을 고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신들의 성격과 맞는지를 평가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학생들 대부분이 자신의 성격과 일치하다고 답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점괘는 매우 일반적이다. 그래서 점쟁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다 맞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점괘가 마치 자신을 잘 나타내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런 점괘가 정확하다고 착각한다. 사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오늘의 운세가 들어맞을 개연성은 그리 높지 않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 하루 똑같은 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궤변에 불과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간혹 점괘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고작 하나 맞췄다고 해서 무조건 신통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재미삼아 시간 떼우기용으로 점을 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바넘 효과를 이용해 사이비 점성술 등으로 사람들을 현혹해 상술에 이용하는 경우는 부정적인 효과다. 돈 낭비, 시간 낭비다. 점이나 별자리, 성격테스트 등을 무조건 맹신하지 말고 바넘 효과가 아닌지 생각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인생을 사는 것이 벌써 피곤해진다. 새해 토정비결에 나온 내용이 안 좋다고 해서 새해 첫날부터 우울하면 곤란하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많고, 피하고 싶어도 안 좋은 일은 우리 곁으로 따라온다. 운세는 운세일 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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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1-0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2학년때 여러 띠의 사람들이 모여 여행을 가던날, 부산역에 앉아 띠별 오늘의 운세를 보았는데 그날 그 내용대로 모든 일이 일어나는 희안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이후 운세를 안봅니다. 무서워서^^

cyrus 2015-01-01 23:22   좋아요 0 | URL
세상에! 운세 내용이 모두 일어나는 상황도 있군요. 저도 사실 운세 내용에 호기심은 있지만, 되도록 잘 안 믿으려고 해요. 생각해보면 운세 내용 절반이라도 제대로 맞은 적이 없었거든요. ㅎㅎㅎ

해피북 2015-01-02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이야기네요ㅎ 예전에 제가 알던 동생이 어떤 아주머니에게 붙잡혀 점을보더라구요 아주머니왈 위가 안좋고 변비가 있지 뭐이런식으로 이야기하니 엄청난 점괘인듯 빠져드는 동생을보며 후에 현대인들은 다 그병이있다고 이야기해줬더니 머쩍어 하더라구요ㅋ

cyrus 2015-01-02 22:02   좋아요 0 | URL
점을 지나치게 믿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정신적으로 피곤해요. 오히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마음의 병이 생길 것 같아요. ^^;;

수이 2015-01-0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도 사실 별자리 믿는 마음이 큰데_ 쿨럭_ 찔린다.

cyrus 2015-01-03 20:30   좋아요 0 | URL
너무 믿지 않으면 되요. ^^

 
희망의 씨앗 - 제인 구달의 꽃과 나무, 지구 식물 이야기
제인 구달 외 지음, 홍승효 외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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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가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 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천상병  「나무」)

 

 

소녀는 나무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나무를 소중하게 여기는 소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썩은 나무라서 더는 자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소녀는 어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 나무는 썩지 않았으며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었다. 썩은 나무를 사랑한 소녀는 자라서 자연을 사랑하는 멋진 어른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는 썩은 나무 한 그루에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람. 어린 시절부터 자연의 위대함을 보면서 자란 제인 구달 박사라면 썩은 나무가 하늘 위로 솟아 자라나는 꿈을 꿨을 것이다.

 

썩은 나무가 자라나는 것은 단지 꿈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연의 섭리는 소녀의 순수한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 소녀는 기적 같은 자연의 섭리를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나무는 줄기가 죽어도 뿌리가 살아있다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나무에 새로운 줄기가 자랄 수 있도록 복제하는 기능이 있다. 죽은 줄기가 있던 자리에 어린줄기가 자라게 하면서 생명을 연장한다. 이런 나무를 복제 나무라고 한다. 놀랍게도 복제 나무는 인간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다. 복제 기능으로 살아남은 나무뿌리의 나이가 8만~100만 년에 이르기도 한다.

 

제인 구달 박사는 침팬지의 대모(代母)를 넘어서 자연 사랑을 전파하는 생명의 대모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연의 대모’, ‘생명의 대모’라는 호칭을 듣게 된다면 무척 불편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인간이 자연을 자식처럼 소중하게 키운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자연은 인간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박사에게 열악한 상황 속에서 싹을 틔우고 적응하는 지구 식물은 위대한 ‘어머니 대자연’(Mother Nature)이다. 식물 앞에서 박사는 겸손하다. 인간이 어머니 대자연이 선사하는 신비로운 은혜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태초에 인간은 식물과 함께 숨 쉬면서 살아왔다. 직접 눈으로 보고, 코로 맡아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자연이 내뿜은 신선한 기운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 늘 함께했던 자연의 자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는 지구의 은혜를 많이 받은 동물이다. 멋모르고 자란 인간은 자연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자연을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봤다. 자연의 이익을 마음껏 누렸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는 아이도 어느 날 방 안에 아버지의 지갑을 보는 순간, 욕심이 생긴다. 저 지갑 안에 돈이 있을 텐데. 당장 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지폐 몇 장이 필요하다. 결국,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저지른다. 아이의 손은 지갑 안을 뒤지고 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철없이 구는 아이에 불과하다. 지구의 은혜를 누리면서도 자꾸 더 달라고 투정부린다. 이젠 대놓고 자연을 훔친다. 나무를 마구 베고, 식물의 집이나 다름없는 산을 갈아엎는다. 지구 곳곳에 인간이 만들어 낸 생채기가 남는다. 구달 박사는 자연을 훔치는 고약한 버릇을 가진 어른 아이인 우리 인간을 향해 경고한다. 자연을 훔친다는 것은 미래를 훔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에 자연을 마음껏 사용한다면, 후손의 미래가 위태로울 수 있다. 지구 식물이 무한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크나큰 착각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또 다른 착각이라면 식물은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생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꽃과 나무도 인간과 똑같이 숨을 쉬며 성장하고,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 곤충이나 인간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어떤 나무는 특수 물질로 다른 나무에 위협 신호를 알린다. 처음에 허무맹랑한 가설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여러 가지 실험으로 증명되고 있다. 나무가 고통에 무감각하다면 절대로 이런 경고 신호를 낼 수 없다. 나무도 아픔을 느낀다.

 

인간은 자연을 위한, 더 나아가 지구의 미래 또는 후손의 미래를 위해 희망의 씨앗을 심을 줄 모른다. 심지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멋대로 재단하다. 농작물의 유전자를 조종하여 GMO(유전자변형 식물체)를 만들어낸다. 욕심에 눈먼 거대 기업과 과학자들이 합작하여 탄생한 GMO는 소비자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자연 생태계를 교란한다. 후손과 지구의 미래와 직결된 자연의 씨앗은 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씨앗의 소중함을 모른다. 조그만 씨앗은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자연이 숨을 쉴 수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지구는 희망을 키우는 최적의 텃밭이다. 인간과 식물은 우주의 유일한 텃밭에서 사이좋게 공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제부터 신비스러운 자연의 영성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온전히 꽃과 나무가 되어보는 꿈을 꾸고 기적을 믿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무를 사랑했던 김형영 시인의 시로 글을 마무리한다. 

 

 

운명을 견뎌내느라
꿋꿋이 서 있는 너를 볼 때마다
내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내 생각은 너무 가벼워
몸 둘 바를 모르겠기에
나는 때때로 네 앞에서 서성거린다.
너를 끌어안고서
네 안으로 들어가려고,
너를 통해서
온전히 네가 되어보려고.

 

(김형영 「나무를 위한 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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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4-12-31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나는 기적 믿는다카이~~~ ❤️ 구달 언니의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_^^;;

cyrus 2014-12-31 21:31   좋아요 0 | URL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보면서 한없이 부끄러워져요. 구달 누님의 반을 닮으려면 이 책을 읽어보면 됩니다.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달 누님의 매력이 멋져요. ^^

[그장소] 2014-12-3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모자로 남은 당신! 정체가 뭡니까?
분명..남자사람..이다..싶었는데 또 한순간. ..응..?여자사람..?? ㅡㅡ이제는
다시 남자사람 ! ㅎㅎㅎ 뭐 아무래도 저는 좋은사람. 그러겠지만요..^^ 책가까이 두고 악한이는 없는 거라고..믿고 사니까.
저는 침엽수림에 가면 정신을 못차려요..
이상하게..활엽수가 주는 뭔가와 달라요..ㅎ
나무

진짜 좋아요!!♥

cyrus 2015-01-01 19:14   좋아요 0 | URL
저는 대나무숲을 좋아해요. 바람 불 때 대나무가 흔들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과 귀가 시원해지거든요. ^^

바람돌이 2015-01-01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구달 하면 침팬지만 생각났는데 이런 이야기도 있군요. cyrus님 덕분에 좋은 책도 담아가고 제인구달에 대한 새로운 얘기도 알고 갑니다.
새해에는 좋은 책 많이 소개해주시고 복도 듬뿍 받으세요. ^^

cyrus 2015-01-01 19: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바람돌이님도 좋은 책 많이 알려주세요. ^^

해피북 2015-01-01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환경에 관한 이야기 였군요 지구는 희망을 키우는 최적의 텃밭이다라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예요 최적의 텃밭에서 무얼하고 있는지 반성이 되는 글이네요^^

cyrus 2015-01-01 19:18   좋아요 0 | URL
<희망의 밥상>이라는 책의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원래 <희망의 밥상>에서 식물 이야기도 다루려고 했는데 분량이 많아져서 따로 책을 펴낸 것이 바로 <희망의 씨앗>입니다. ^^
 
뉴턴의 무정한 세계 - 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
정인경 지음 / 돌베개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들의 죄악은 나날이 커지리라.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어리석게 살도록 그들을 내버려두자꾸나. 내가 주인임을 그들이 모르게 하라.”
 “주인님의 계획은 감미롭습니다.”

 

(허버트 조지 웰스 『모로 박사의 섬』에서, 문예출판사)

 

 

모로 박사는 자신이 만든 이상한 피조물을 지배하는 신이 되고 싶어 한다. 동물 인간들의 야생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법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은밀히 피 맛을 느껴버린 동물 인간들은 신이라고 여긴 모로 박사를 습격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 지옥 같은 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는 에드워드 프렌틱. 그 곁에는 자신을 따르는 개 인간만 있을 뿐이다. 개 인간은 프렌틱을 주인이라 믿고 따른다. 프렌틱을 돕는 개 인간도 언젠가는 동물 인간들에게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 동물 인간들의 공격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프렌틱은 자신을 믿는 개 인간만 남겨두고 모조리 죽이겠다고 약속한다. 그가 동물 인간들을 향한 반격에 성공하면 모로 박사처럼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피조물의 신이 된 모로 박사를 비난했던 프렌틱도 개 인간 앞에서 신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수적 열세에 처한 프렌틱은 자신의 약속을 지켜내지 못했다. 아니, 절대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프렌틱은 이 섬에서 신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섬에서 탈출하는 것이 목표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동물 인간과의 교섭이 가능한 개 인간을 이용했을 뿐이다. 개 인간은 인간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여전히 자신 같은 피조물을 만든 인간을 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프렌틱은 비정하다. 개 인간을 방패막이로 하여 동물 인간의 공격을 막고자 했다. 동물 인간들에게 외면 받았고,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개 인간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에게 이 섬은 무정한 세계다.

 

웰스『모로 박사의 섬』을 집필하고 있을 당시 유럽은 눈부실 정도로 서양 근대 과학이 발전하고 있었다.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새로운 이론들을 발견해내는 데 성공하는 유럽인들은 승승장구했다. 진보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과학의 진보에 한껏 고무되어 자연을 지배하고 싶었다. 여기서 그들이 지배하고 싶었던 자연이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식민지를 말한다. 과학기술은 식민지를 무력화시켜 지배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로 변질한다. 유럽 열강은 자신들이 만든 증기선, 소총, 대포 등을 총동원하여 힘없는 식민지를 공격하고 교역을 맺도록 강요한다. 열강 유럽의 습격으로 식민지에 서양문화가 유입되었고, 강제적으로 이식되었다. 유럽인들은 어리석은 식민지를 지배하는 것이 자신들이 이룩한 진보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해 ‘야만인’, ‘비문명인’으로 규정된 피식민지인은 과학기술을 두려워했다. 두려움에 떠는 피식민지인들 앞에서 유럽인들은 전지전능한 신처럼 행동했다. 무기로 내세운 과학기술 앞에 처참히 짓밟힌 고국의 현실을 눈앞에서 지켜본 식민지 지식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일이야말로 침체한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선결적 과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은 서양 과학을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다. 우리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강제적으로 서양 과학을 받아들였다. 과학만 확실하게 안다면 유럽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문명에 대한 열등감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는 감미로운 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약을 무조건 건강에 좋다고 믿고 한꺼번에 들이 삼키면 부작용이 생긴다. 체질에 맞지 않은 서양 과학을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잘못된 과학 지식을 터득하게 되었고, 지금도 과학을 어려운 학문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과학 공부를 어렵게 생각하는 원인을 일제 강점기의 역사에서 찾는다. 근대 과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이 시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과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 나오는 형식처럼  “과학! 과학!”하고 외쳐보지만, 정작 자신들이 알아야 할 과학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이 알고 있던 과학은 그저 자신들의 정신적 고통을 달래주는 아편에 불과했다.

 

심지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의도적으로 과학을 편집, 왜곡했다. 국력이 강한 나라가 되어야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는다. 식민지 지식인들은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은 다윈 진화론과 전혀 다른 사상이다. 순수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다윈 진화론을 알지 못한 채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지식인들은 진화론에 ‘적자생존’, ‘약육강식’ 개념을 결부했다. 과학적 다윈 이론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조선 지식인들의 오류는 지금도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 다윈과 진화론, 둘 중 하나라도 언급하면 벌써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다. 강자의 힘을 정당화하는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을 전파한 조선 지식인들은 강자의 힘에 매료되어 강자 앞에서 굴복하는 의식에 젖어든다. 이는 곧 인종적 열악함을 자인하고, 패배감을 표출하는 것이다. 과학의 진보를 믿었던 이광수는 『무정』을 발표한 지 5년 뒤에 ‘민족개조론’이라는 논설을 써서 일본에게 지배당하는 조선의 민족성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에 과학을 폭력적이고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데 성공했다. 과학에 무지한 피식민지인들은 서양을 ‘주인'처럼 우러러 보게 된다.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진보의 힘을 믿고 식민지에서 똑똑한 주인으로 행세하며 자부심을 확인했다. 과학 중심의 왜곡된 계몽주의를 내세운 조선 지식인들은 미몽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서양 근대과학은 전 세계 누구나 보편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진리로 굳어졌다. 이 진리를 터득하려면 그 속에 내포된 서양인의 사고방식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과학이라 할 수 없다. 과학이 세상을 계몽하는 데 유용하다고 믿는 것은 과학주의다. 여기에 진보와 야만, 문명인과 비문명인으로 규정하는 제국주의적 시선이 작용한다. 안타깝지만,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는 미몽에 가까운 애국적 계몽사상이 빚어낸 비극을 여전히 상연하고 있다.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별하지 못한 상황에서 서양인들의 입맛에만 맞는 과학 아닌 과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과학을 제대로 알지 못한 우리는 아이들에게 진짜 과학을 돌려주도록 도와줄 수 있는 자격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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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3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과학 현실이 서양 근대화에 불과하다는 부분이 참 인상적이였네요. 저는 과학을 잘 아는 편도 아니고, 또 역사적인 부분도 부족하지만, 이 책안에는 역사와 정치 과학을 다루는것 같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정말 글도 잘 쓰시고 독서량이 상당하시네요^^ 놀랍고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cyrus 2014-12-31 18:55   좋아요 0 | URL
이 책 추천하고 싶어요. `과학 상식(특히 뉴턴 물리학과 진화론) 한국문학(이광수, 염상섭, 이상) 한국근대사`가 적절히 조합된 책입니다. 저자가 글을 어렵지 않게 풀어썼어요.

읽고 쓰는 일이 그냥 좋아서 일기처럼 쓰는 편입니다. 놀라는 일이 아니에요. 저보다 많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분들이 알라딘에 많으니까요. ^^

바람돌이 2015-01-01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국주의의 침략이 과학을 앞세워 식민지인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식민지에서 단순한 열등감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관철되는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항상 궁금했는데 이 책이 그 궁금증을 어느정도 해소해줄 수 있을 듯하네요. 덕분에 좋은 책 담아갑니다. 다음에 읽을 책 리스트에 살짝 꽂아갑니다.

cyrus 2015-01-01 19:20   좋아요 0 | URL
저자의 주장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근대 문학 작품을 인용해서 설명하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꼭 읽어보셔요. ^^

yamoo 2015-01-0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이 책이 땡기는군요~ㅎ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사이러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좋은 책 소개도 많이 많이 해 주시길~!

cyrus 2015-01-01 22:51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야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야무님께서 직접 추천하는 책 소개 페이지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모로 박사의 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7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한동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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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 속의 침팬지에게 인간의 줄기세포를 주입한다. 그 침팬지는 인간의 뇌를 가지면서 태어난다.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침팬지는 사람인가, 동물인가.

 

동물의 생체실험은 대체로 소량의 유전자를 동물에게 주입하거나, 인간의 세포나 조직을 동물에게 이식한다. 인간의 유전자나 체세포를 갖도록 조작된 동물들은 인간의 질병 치료에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동물에게 인간의 특질을 부여하는 생체실험은 얘기가 달라진다. 한때 영국에서 동물의 생체실험 규제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의 세포나 유전자를 소량 이용하는 실험은 유지하되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에 대해서는 완전 금지를 주장했다. 인간 유전자를 섞은 동물의 배아를 14일 이상 배양하거나, 인간의 정자나 난자를 동물의 것과 섞어 교배하는 실험을 할 수 없다. 동물 생체실험을 반대하는 과학자들은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 영장류에 실험을 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이 우려하는 생체실험의 위험성은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 나오는 침팬지를 연상시킨다. 영화에서 과학자 윌 로드만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서 손상된 인간의 뇌를 회복시켜주는 큐러라는 약을 개발한다. 이 약의 임상실험 대상은 침팬지. 윌의 보호 아래 자란 침팬지 시저는 인간의 지능을 가지게 된다. 시저는 자신이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다른 유인원들과 함께 인간들을 역습하기로 한다.

 

인류는 생명공학을 통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데 성공했다. 신의 영역을 넘어선 인간은 자신들의 영생을 위해 우성 유전자를 지닌 복제인간을 만든다. 이미 멸종된 동물을 복제하는 시도도 한다. 그러나 상자 안에는 우리가 원하던 미래의 희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 해악도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영화 '혹성탈출'에서처럼 인간의 지능을 가진 동물이 우리를 공격하거나 우성 유전자만 선호하고 높은 가격으로 거래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생체 실험 문제에 늘 윤리적 논란이 따라다닌다.

 

유전자 조합과 생체실험의 윤리적 담론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는 인간이 파멸을 몰고 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특히 여러 차례 영화로 리메이크된 허버트 조지 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은 과학적 생체실험을 다룬 문학적 효시라 할 수 있다.  

 

모로 박사는 인간과 동물을 결합하는 실험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로 인류를 재창조하려는 야욕을 품는다. 그러나 그의 생체실험은 너무나도 잔인하다. 한번은 그가 실험하려고 했던 개가 가죽이 심하게 벗겨지고 사진가 훼손된 채 발견되어 잔인무도한 생체실험의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이로 인해 모로 박사는 과학계 동료들로부터 멸시를 받지만, 생체실험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국을 떠나 야생동물들이 사는 남태평양의 무인도에 정착한다. 이곳은 모로 박사의 거대한 생체실험 연구실이 되고, 그 결과 태어난 것은 사람도 짐승도 아닌 괴상한 반인반수였다.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외모의 피조물들이 섬 여기저기에 나타난다. 우연히 이 섬에 정착하게 된 에드워드 프렌틱은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는 모로 박사에게 실험의 위험성을 경고했으나 박사는 귀담아 듣지 않는다. 박사는 미쳐버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실험에 대한 생각뿐이다.

 

"연구자가 지적 열정을 쏟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을 모를 거요! 그 지적 열망이 가져다주는 기묘하고 무색투명한 기쁨을 당신을 모를 거요! 당신 눈앞에 있는 것들은 더는 동물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오. 하지만 골칫덩이지! 내가 바란 게 하나 있다면 한 생명체가 어디까지 적응할 수 있는지 그 한계치를 알아내는 일이었소." (108쪽) 

 

인간으로 개조하는 동물들은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모로 박사를 위대한 조물주라고 생각한다. 박사는 이 섬에서 신처럼 군림한다. 하지만 다시 동물로 퇴화하는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살해당한다.   

 

소설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인간에게 '파멸'을 벌한다. 지적 목표를 위해서 윤리를 무시한 과학의 위험성은 인류의 미래를 파괴한다. 신의 영역을 넘어선 인류의 갈망은 인간성 상실의 또 다른 모습이다. 모로 박사는 20세기에 현실로 되살아났다. 아니 그보다 더 극악하다. 모로 박사는 동물을 대상으로 했지만, 독일 나치와 일본 731부대의 생체실험은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마취하지 않고 신체를 절단하는가 하면 독극물과 세균을 강제로 주입하는 등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이들은 과학의 발전과 진보라는 핑계로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실험대상의 고통을 외면했다. 모로 박사도 생체실험을 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을 사소한 것이라고 일축한다. 이 지구상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생물이 많다고 말하면서 생체실험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반인반수들은 단지 야생 본능이 살아나서 박사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잔인한 인간성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었다. 과학만능주의와 인간지상주의로 만들어진 족쇄는 피조물들을 괴롭혔다, 박사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주입하기를 원했던 인간성이 파멸의 씨앗으로 될 줄 몰랐다.  

 

인류는 지금처럼 알게 모르게 찔끔찔끔 진화에 개입하는 식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모로 박사처럼 외딴 섬에 숨어서 실험할 필요도 없어졌다. 나날이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합성 생물이 등장할 것이다. 그런 식의 과학 발전은 과연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인간은 한계가 설정되어 있으면 그것을 넘고 싶은 욕구가 끓어 넘치는 존재다. 과학이 지금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미래의 여러 대안을 접하면 왠지 움찔한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했던 웰스도 그랬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실험이 성공한다면 인간이라는 개념 차제가 모호해지지 않을까. 인류 비슷한 피조물이 왠지 음험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 다가올 때, 우리가 환영하는 표정을 지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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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31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개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영화 아일랜드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자신의 복제 인간을 만들어두고 필요시 장기 적출하는 내용의 영화도 공포스러웠는데, 인간과 동물의 복합 유전자로 탄생된다면 정말 만만찮은 문제들이 발생할꺼 같아요. 총균쇠라는 책에서 읽다가 들던 생각인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화중에 반신반인의 이야기가 왠지 허구적인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윤리적 개념이 없던 시대 이기도 했거니와, 원래 신화라는게 아주 허구적인 사상에서 출발하지는 않다는것도 책을 통해 알게 된터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cyrus 2014-12-31 11:50   좋아요 1 | URL
생각해보면 신기하죠. 신화에서 나올법한 상상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