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다사다난한 사건이 많았다. 출판계도 마찬가지다. 도서정가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독자와 출판인들을 분노하게 한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다. 쌤앤파커스는 가족 같은 조직문화를 연출하려다가 족 같은 상황을 자초하고 말았다. 회사원을 서로 아낀다는 의미로 프리허그를 한다면서 정작 정신적․육체적으로 상처를 받은 수습사원을 보듬어주지 못했다. 결국,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회사 대표이사는 스스로 물러나고 회사가 매각되었다. 또 혜민 스님은 차기작 선계약을 철회했다.

 

최근에 미야베 미유키 작품 판권을 가로챈 김영사의 자회사 비채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전집처럼 펴냈고 판권 교섭을 진행했던 북스피어는 허탈하게 느껴질 수밖에. (관련기사: 미야베 미유키 판권 두고, 김영사의 두 얼굴? / 한겨레, 2014년 12월 17일)

 

 

 

 

 

 

 

출판 도의에 어긋나는 일은 이 사건뿐만이 아니다. 올해 개정된 도서정가제는 모든 책의 최대 할인 폭을 줄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출판사는 독점적으로 할인가를 적용해서 책을 팔면 안 되는 자율 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처음으로 자율 협약을 어겨 법적 제재를 받은 출판사가 나왔다. 다산북스 계열사인 다산스튜디오가 ‘WHO’ 시리즈를 편법 할인으로 홈쇼핑에 판매한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도서정가제 자율협약 규정을 위반한 혐의로 관련 계열사를 포함한 다산북스의 모든 책은 이번 달 28일부터 내달 11일까지 온라인․오프라인 서점에 판매할 수 없다. (관련기사: '개정 도서정가제' 협약 위반 출판사에 첫 제재 / 머니투데이, 2014년 12월 21일)

 

그러나 지금 알라딘에 접속하여 ‘다산북스’에서 나온 책을 검색하면 ‘일시품절’ 상태가 뜨지 않는다. 지금 다산북스 책 아무거나 주문하면 내일 배송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출판유통심의위원회가 다산북스 재제를 다시 논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첫 재제가 결정되자마자 다산북스는 지난 23일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 소송을 냈다. 다산북스측은 홈쇼핑 판매를 홍보한 모 일간지의 실수 때문에 독점적 판매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또 자신들의 계열사인 다산스튜디오는 다산북스와 지분 연계가 없는 별도 법인이기 때문에 다산북스 도서 전체를 판매하지 못하는 제재가 부당하다고 반박했다.

 

법원은 다산북스의 가처분 소송을 받아들였고 판매중지 기간이 보류되었다. 내달 8일에 심의위원회의 재심으로 판매중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여기서 판매중지 조치가 확정되면 15일부터 적용된다. (관련기사: 도서정가제 자율협약 위반 첫 제재, 일단 내달 8일로 연기 / 경향신문, 2014년 12월 28일)

 

심의위원회의 재심의 결정과 판매중지 제재를 피하려는 다산북스의 태도가 유감스럽다. 첫 제재인 만큼 심의위원회는 강하게 나갔어야 했다. 아무리 좋은 책을 독자에게 팔기 위한 취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할인가를 적용해서 판다는 것은 단순히 협약을 지키지 않은 일이 아닌 출판계의 상도를 어기는 것이다. 이것 또한 출판 도의를 저버리는 일이다. 특히 다산북스는 제재 원인이 제공한 다산스튜디오가 자신들의 계열사임에도 불구하고 별도 법인이라고 해명하는 태도는 몸통을 남기고 꼬리를 자르는 격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지 이제 한 달 정도 지났다. 나는 지금도 출판시장을 살리는 회심의 카드라고 믿는 정부의 도서정가제에 반신반의한다. 일단 할인율 거품을 제거하는 의도는 좋지만, 이 법의 효과를 거의 호흡기가 떼버린 동네서점 시장이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전히 독자는 할인이 적용되지 않은 책을 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일단 도서정가제 이후 출판시장을 지켜본 뒤에 제도의 효과를 논의해도 늦지 않다.

 

 

 

 

 

(사진은 북스피어 출판사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북스피어 마포 김사장님은 출판사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도서정가제는 출판사들이 '제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죽자'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라고 밝혔다. 도서정가제 시행 효과에 의문을 느끼지만, 김사장님의 호소를 이해한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도서정가제 때문에 가격이 부담스러워 책을 마음껏 사지 못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겠지만, 출판사들은 암울한 출판시장에 살아남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리고 판매 수익이 줄어들 것을 각오하고 도서정가제 자율 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다산북스는 다 같이 죽는 것을 피하는 가이드라인을 무시하고 자신만 살아남으려고 제 배를 불리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출판사들 간의 약속을 어겼으면 그에 대한 제재를 받는 것이 온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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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30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정가제 시행하구나니 동네 서점에서 구입해도 큰 차이없겠다 싶어 구입하려고 갔는데 책이없더라구요 아무리 도서정가제 시행하고 동네서점 활성화가 슬로건이면 뭐하나 싶은게 구체적 계획을가지고 해야하는데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이렇게 씁슬한 소식도 들리구 참 착찹하네요

cyrus 2014-12-30 18:08   좋아요 0 | URL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로 독자나 출판사나 양쪽 모두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수이 2014-12-30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 같다. 벌어지고 있는 작태가 에휴_

cyrus 2014-12-30 18:10   좋아요 0 | URL
이 사건들 말고도 매스컴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을걸요.

sijifs 2014-12-30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정가제를 해도 책 사는 사람만 사고 안 사는 사람은 안 사더이다

cyrus 2014-12-30 18:11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도서정가제가 독서 인구 향상 장려에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겁니다.

2014-12-30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4-12-30 18:15   좋아요 0 | URL
페이스북을 접속하면 출판계 소식을 많이 접할 수 있어요. 물론 출판사 신간 소식도 알라딘 신간 알림보다 먼저 확인할 수 있고요.

도서정가제 때문에 내년 도서박람회에서 하던 할인판매 행사도 못할 수 있어요. 만약에 이게 가능하다면 도서박람회 때 책 사러 오는 사람들이 많이 몰릴거예요.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한번 정도 읽어봤을 작품들을 펴낸 동서미스터리문고를 읽은 지 얼마 안 됐다. 존 딕슨 카가 쓴 소설 위주로 이제 두 권만 읽었을 뿐이다. (『해골성』과 『모자수집광사건』) 그런데 책의 편집에 대해 아쉬움이 느껴진다. 특히 『모자수집광사건』도 『황제의 코담뱃갑』처럼 타 출판사에서 새롭게 번역됐으면 하는 작품이다. 최근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로 나온『황제의 코담뱃갑』도 이미 2003년에 동서미스터리문고에서 소개되었던 작품이다. 『화형 법정』도 엘릭시르에서 새로 번역되어 나온 카의 대표작이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동서미스터리문고의 단점은 역자의 주석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인명, 지명 또는 기타 용어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추리물을 읽는데 굳이 이런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복잡한 사건이 하나씩 해결되는 이야기의 진행 과정을 읽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작품 전체 혹은 작품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특정 용어를 독자가 그냥 지나쳐버려 놓칠 수 있다.

 

예를 들면, 『모자수집광사건』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해드리 경감이 펠 박사의 조수 랜폴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스태버스 사건’을 언급한다. 경감은 이 ‘스태버스 사건’ 덕분에 기드온 펠 박사의 추리 능력을 알게 됐고, 랜폴은 이 사건 덕분에 지금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역자는 스태버스 사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소개하는 주석을 달지 않았다.

 

 

 

 

 

 

 

 

 

 

 

 

 

 

 

 

 

 

 

스태버스 사건은 기드온 펠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카의 작품 속 사건이다. 국내에서는 『마녀가 사는 집』(해문출판사, 2003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Hag's nook이다. 이 작품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스태버스 가문의 사람들이 목이 부러져 죽은 사건을 펠 박사가 맡게 된다. 스태버스 가문의 조상인 앤터니는 자신의 저택 근처에 마녀를 처형하고 그 옆에 교도소를 지었다. 이때부터 스태버스 가문의 끔찍한 저주가 시작된다. 후손들은 목이 부러진 채 죽고 만 것이다. 랜폴은 기차 여행을 하는 길에서 우연히 도로시 스태버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를 계기로 팰 박사와 함께 스태버스 가문의 저주를 푼다.

 

『모자수집광사건』의 역자가 추리소설에 정통하고 관심이 많았더라면 작품 속 사소한 대화 내용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주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작품 해설에 언급됐어야 한다. 동서미스터리문고의 작품 해설 방식도 아쉽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너무 부족한 분량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마녀가 사는 집』과 『모자수집광사건』은 2003년에 1월에 동시에 국내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마녀가 사는 집』는 아동용 작품으로 소개되는 바람에 오히려 카 특유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죽이는 어설픈 삽화를 넣어버린  ‘악마의 편집(?)’을 저질렀고(이 책에 대한 카스피님의 서평을 참고했음), 『모자수집광사건』은 카의 작품을 좀 더 상세하게 알려줄 수 있는 내용을 간과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두 작품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새로 번역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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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3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양한 분야를 읽으셔서 덕분에 다양한 정보를 듣게되네요 ㅎ 좀 무시무시 할거 같지만 서점에서 보면 그냥 지나치진 않을거 같아요^^

cyrus 2014-12-30 18:17   좋아요 0 | URL
편식 독서를 하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하는 중입니다. 북플로 관계를 맺은 분들 덕분에 저도 몰랐던 정보를 많이 얻습니다. ^^

낭만인생 2014-12-30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묘한 재미를 알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카스피 2014-12-30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추리소설의 세계에 빠져드셨군요.축하드립니다^^
cyrus님이시라면 아마도 좋은 추리 리뷰를 많이 남기실것 같네요.
동서미스터리문고를 읽으시고 역자의 주석이 너무 없다고 지적하셨는데 그건 어쩔수 없을 것 같습니다.2003년도에 나온 동서미스터리문고를 처음 접하신 분들이라면 잘 알수 없지만 이 문고시리즈는 사실 1970년대 중반에 나왔던 동서추리문고를 그대로 복간한 책들이지요.아는 분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동서추리문고는 일본의 모 출판사에서 나온 추리문고를 그대로 일어번역한 책이라 현시점에서 보면 번역이 어색한 부분이 상당수 있습니다.
70년대의 동서추리문고른 추리 소설을 사랑한 분들이라면 헌책방을 뒤지면서 찾았던 일종의 성배같은 책들인데 비록 영어에서 일본어로 번역한것을 한국어로 재번역했지만 워낙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많았고 이후 전혀 재간이 안되었기에 어쩔수 없었지요.
이후 2003년에 동서미스터리문고로 재간되면서 많은 추리소설 애호가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1970년대의 동서추리문고를 토씨하나 안틀리고 그냥 복간해서 많은 비난을 받게되었지요.
이런 사정이기에 님이 아쉬워하는 부분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마녀가 사는 집은 현재 아동용 책으로만 간행되었는데 이 책 역시 1970년대 중반에 나온 삼중당 추리문고에서 성인용으로 나온 것으로 기억합니다.동서 미스터리문고에서 삼중당 추리문고의 책들을 다수 차용해 간행했기에 이 책도 재간될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다시 재간되지 않았네요.

cyrus 2014-12-30 23:11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반갑습니다. 진작 읽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재미에 푹 빠졌어요. 아직 입문자 수준이라서 카스피님이 예전에 블로그에 쓰신 추리물에 관한 글과 서평을 읽고 있습니다. 물만두님의 글도 읽고요. 저 같은 입문자가 추리소설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글입니다. 이런 가치가 있는 수많은 글이 잊혀지는 게 아쉽게 느껴집니다.

동서미스터리문고의 역사에 무척 궁금했는데 마침 카스피님의 댓글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내년에도 예전처럼 추리소설에 관한 페이퍼나 서평 업데이트를 많이 해주세요.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아트북스, 2014년)을 읽어보면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1805~1807년)의 제작 배경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 그림 속 인물의 손짓 하나에도 흥미로운 역사가 숨어 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 황후에게 왕관을 씌우기 위해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다. 자기 손을 왕관을 쓰는 파격적인 행동은 황제의 권력이 교황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전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황권의 독립성을 거듭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비드의 그림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나폴레옹도 이 그림에 무척 흡족했다고 한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그림으로 아부를 드러냈다. 그가 이렇게 대관식을 크게 그린 것은 나폴레옹의 주문에 따른 것으로 나폴레옹이 크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고 하여 다비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했다.

 

이 그림에는 70명 정도 되는 얼굴이 등장한다. 다비드는 웅장한 대관식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의 가족과 그를 따르는 고위직 관료들의 얼굴을 그려냈다. 이때 당시 나폴레옹은 자신과 다툰 형을 대관식에 초대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형제의 갈등 때문에 이 영광스런 장면을 가까이 지켜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형과 어머니를 대관식에 참석한 것처럼 그려 넣었다. 다비드나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황제의 가족이 빠진 대관식 장면이 황제의 권위를 돋보이는 데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 그림에서 얼굴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인물들은 누구인지 밝혀졌지만, 아직 이 사람만은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왕관을 든 나폴레옹의 뒤를 주목하시길. 황제와 앉아 있는 교황 비오 7세 사이에 대머리 사나이가 서 있다. 교황을 호위하는 이름 모를 성직자로 추정한다. 그런데 그림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직자의 얼굴 모습이 ‘누구’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로 로마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래서 그 성직자를 ‘카이사르의 유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것으로 봐서는 실제로 대머리였다는 카이사르와 닮긴 했다. 그렇다면 이 성직자는 카이사르가 맞는다면, 다비드는 왜 아주 옛날 사람의 유령을 대관식 장면에 그려 넣었을까? 유럽에서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고 절대 권력을 차지했던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았다. 영미권에서 카이사르를 부르는 ‘시저’(Caesar)는 아예 황제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고,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로 부르게 되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황제의 정통성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카이사르의 영혼을 대관식 그림에 소환했다. 이 거대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면 이름 모를 성직자 혹은 카이사르의 유령을 발견할 수 없다.

 

 

 

 

 

 

 

 

 

 

 

 

 

 

 

 

 

카이사르의 유령에 대한 설명은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뿐만 아니라 역시 이주헌이 쓴 『역사의 미술관』(문학동네, 2011년)에도 나온다. 『역사의 미술관』에서도 다비드의 황제 대관식 그림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책을 비교하면 카이사르의 유령을 가리키는 번호 표시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역사의 미술관』 90쪽에 나오는 작은 크기의 도해,

15번이 카이사르의 유령 (1번은 나폴레옹, 13번은 교황) 

 

 

 

 

 

『역사의 미술관』 91쪽,

왕관을 들고 있는 나폴레옹과 앉아 있는 교황 사이에 있는 인물이 카이사르의 유령 

 

 

 

먼저 『역사의 미술관』에 소개된 그림의 도해에서 카이사르의 유령은 15번이다. 번호가 적힌 도해 크기가 너무 작아서 다음 장에 확대한 도해가 나온다. 그러면 그림 15번의 위치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80쪽 도해,

1번은 나폴레옹, 3번은 교황

그리고 교황 바로 위에 있는 18번의 인물을 카이사르의 유령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다음 도해는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에 실린 것이다. 『역사의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그림에 등장한 인물들의 얼굴에 번호를 기입했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은 카이사르의 유령을 18번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유령을 가리키는 번호 위치가 앞에 소개한 『역사의 미술관』 도해와 다르다. 18번은 3번(교황 비오 7세) 바로 위에 있다. 

 

카이사르의 유령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나폴레옹과 교황 중간에 서 있다. 정면으로 향한 얼굴만 봐도 딱 카이사르와 닮았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의 편집 과정 중에 번호 위치를 실수로 잘못 써넣은 것으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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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28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대단하시네요 ㅎ 잘못된 부분도 찾아내시구ㅋ 덕분에 재밌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저는 그림아는만큼보인다에서 보긴했는데 이런 재밌는 설명 못들었는데 이책두 읽고 싶네요

cyrus 2014-12-28 23:02   좋아요 0 | URL
이주헌씨의 글쓰기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방식이라서 입문자가 읽기에 아주 좋아요. 그림 에세이도 잘 쓰시고요. ^^

12 2015-01-02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단지 사제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타일을 따라했을수도 있긴 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치가, 장군, 작가, 카사노바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로마의 최고 제사장으로 로마의 그 시대 종교계에서 교황 비슷한 직위를 가졌습니다.
그런만큼 과거부터 현대까지 많은 정치가나 독재자, 군인, 바람둥이들이 카이사르를 선망 하면서 빨아댔듯이 종교인들도 빨아댔을만 하죠.
게다가 나폴레옹이 종교인들의 정치를 아에 몰락시키기 전만 해도 고위 직위 종교인들은 정치가들보다 더 위에 속하는 정치가들이었으니까 그 당시 분위기를 보면 여러 의미로 빨아댈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알고보면 유럽 세계의 정통 황제 족보를 처음 만들었다고 할수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임페러(황제)의 어원인 임페라토르라는 명칭도 카이사르라는 가문 이름과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받은것입니다.

게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당시 종교인들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신탁이나 민중,카이사르파들의 지지 때문에 왕으로 추대할려는 여론이 있었지만 계속 부정하고 시민들에게 자신은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던만큼 왕이나 황제였던 인물은 아니지만,
사실상 현대까지 황제라고 여겨지고 있는만큼 유럽 황제 가문의 첫번째 황제로서 여겨지고 있죠.

그러므로 나폴레옹 시대의 유럽 왕조가 오로지 카이사르 가문의 핏줄만을 황제에 올라갈수 있다고 여겼던걸 생각하면 그림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넣음으로써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걸 ˝첫번째˝ 황제 가문 사람인 카이사르도 인정한다는 뜻으로 그림을 그렸을수도 있습니다.

까고 보면 그 당시 유럽 황제의 가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자 친척이었던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마저 자신의 아이들이 아이를 못낳거나 죽음으로써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핏줄은 몇천년전에 완전히 끊긴 상태로 양아들격인 사람들이 황제의 가문을 이어간만큼 나폴레옹도 핏줄과 상관없이 카이사르에게 인정만 되면 황제가 될수 있었으니까 말이 된달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교황이 황제직위를 내리는 전통이나 권한도 알고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종교계에서 최고 직위를 가지고 사실상 황제의 족보를 만들고 아우구스투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주었다고 여겨지고 신성시 되었던 모습들이 교황의 직위와 비슷한데요.... 단순한 우연일까요?
종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줘서 황제의 직위를 받을 사람을 정하는 교황까지 만들수 있게 한건 콘스탄틴 황제였다지만 흠....

저 그림에서 정말 여러의미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자취가 느껴지는군요...

cyrus 2015-01-02 22:1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이 견해도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카이사르의 유령`설은 전문가들의 추측에서 기인한 해석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정체불명의 사제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계획대로 전 연대가 전멸했다! 훌륭하군! 이제 아예 사신이 명령을 내리고 있어. 나도 거기 있었지. 시체가 즐비한 드넓은 전장을 보았다고! 짓이겨진 인간의 살점이 눈 속에 얼어붙어 있었어.” (카렐 차페크  『곤충 극장』 제3막에서, 76쪽)

 

 

카렐 차페크의 희곡 『곤충 극장』(열린책들, 2012년)은 한 편의 잔혹한 우화에 가깝다. 작품에 묘사된 곤충의 세계는 타락을 일삼던 소돔과 고모라가 연상된다. 인간인 여행자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곤충들의 생태를 바라본다. 여행자가 만난 곤충들은 한심하고, 사악하다. 여행자 앞에서 교태를 부리면서 유혹하려 드는 나비, 둥그런 똥 덩어리를 황금같이 여겨 누군가가 훔쳐갈까 봐 노심초사하는 쇠똥구리, 자식의 생존을 위해 다른 곤충들의 목숨을 빼앗는 맵시벌 그리고 과학의 진보를 믿고 영토 확장을 위한 야욕을 버리지 못하는 개미들. 이들은 탐욕 덩어리 인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다.

 

 

 

 

 

 

 

 

 

 

 

 

 

 

 

 

 

제3막은 격렬하면서도 끔찍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 상황을 개미 연대의 싸움으로 재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여행자는 개미들이 싸우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훌륭하다!’라고 비꼰다. 그리고 자신 또한 시체가 널브러진 전장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눈 속에 얼어붙은 짓이겨진 인간의 살점. 짤막한 여행자의 독백 대사는 살아남은 자가 없었던 당시 참호전의 풍경을 어렴풋이 떠오르게 한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연합군과 독일군 간의 서부 전선은 가장 많은 전사자가 속출할 정도로 치열했던 장기전이었다. 이적을 공격하기보다는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기나긴 참호는 스위스에서 영국해협까지 만들어졌고, 그 길이만 1000km에 달한 것도 있었다. 지루한 참호전이 이어질수록 연합국과 독일 간의 적대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영국의 애국주의자들은 독일산 개 닥스훈트를 죽여 적국을 향한 분노를 표출했고, 독일에서는 ‘영국 증오가’가 유행했다. 1914년 크리스마스 하루 동안 양측 군대가 자발적으로 전쟁을 멈추었던 기적의 날을 제외하면 서부 전선은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 낸 지옥과 같았다.

 

 

 

 

 

 

 

 

 

 

 

 

 

 

 

‘시체가 즐비한 드넓은 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은 『곤충 극장』에 나오는 여행자(또는 카렐 차페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자원입대하여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고, 비참함에 치를 떤다. 그는 끔찍한 참상의 증인이었고, 역겨운 장면 그대로 캔버스에 담아낸다. 

 

 

 

 

 

오토 딕스  「전쟁」  1929~1932년

 

 

 

1929~1932년에 그린 「전쟁」은 참혹한 죽음이 생생한 묘사한 거대한 그림이다. 턱밑이 날아가거나 총탄 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병사들의 시체가 참호 속에 널브러져 있다. 그야말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짓이겨진 인간의 살점이 눈 속에 얼어붙어 있었어”라는 절규에 가까운 대사를 내뱉는 여행자가 목격했던 그 장면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이 그림이 공개된 당시 사람들과 비평가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딕스가 묘사한 그림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의 그림은 전쟁을 옹호하는 애국 보수주의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림에 대한 비난이 커지자 딕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 딕스도 『곤충 극장』의 여행자처럼 전장 한가운데 거기 있었다.

 

 

 

 

 

 

 

 

 

 

 

 

 

“이 그림은 ‘그림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일반적인 통념을 철저하게 깨뜨린다. 인류사상 최초의 총력전인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에 ‘아름다운 그림’ 따위는 더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일까.”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 중에서)

 

 

「전쟁」을 본 서경식 선생의 감상처럼 무조건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세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아름다운 세상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화롭지 않은 지옥 같은 세상도 펼쳐져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모습이며 우리의 멈출 줄 모르는 탐욕과 증오가 만들어 낸 소돔과 고모라이기도 하다. 딕스의 「전쟁」을 본 어느 비평가는 “구역질이 난다”고 비난했다. 딕스는 이 그림을 통해 휴머니즘이라는 고귀한 영역마저도 짓밟는 전쟁, 아니 전장에 나서는 인간의 광기를 전달하려고 했다. 거대한 그림은 살육을 일삼는 괴물 같이 변해버린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비춘 불편한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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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수집광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60
존 딕슨 카 지음, 김우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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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수집광사건』(원제: The Mad Hatter Mystery)은 존 딕슨 카가 두 번째로 창조한 아마추어 탐정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사실 펠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은 『마녀가 사는 집』(해문출판사, 2003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Hag's Nook』이다. 이 작품과 『모자수집광사건』은 1933년 같은 해에 발표되었다.

 

펠 박사도 카가 맨 처음 창조한 탐정 앙리 방코랭처럼 사건 현장에 조수를 대동한다. 미국 출신의 랜폴이라는 인물이다. 『모자수집광사건』이 펠 박사가 나오는 두 번째 소설이라서 그의 특징을 소개하는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다. 기드온 펠 박사는 사전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콧수염을 가진 뚱뚱한 인물이다. 움직임이 둔한 편이라서 두 개의 지팡이를 짚고 이동한다. 복장은 주로 낡은 망토와 중절를 착용한다. 『모자수집광사건』이 시작되는 이야기 초반부에 해드리 경감 '스태버스 사건'을 잠깐 언급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대화가 나온다. 여기서 '스태버스 사건'이란 바로 『마녀가 사는 집』에서 펠 박사가 처음 맡은 사건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적 과정을 고려하면서 읽으려면 『마녀가 사는 집』, 『모자수집광사건』 순으로 읽어야 한다.

 

『모자수집광사건』은 이전에 발표한 카의 작품(『밤에 걷다』『해골성』)보다 사건이 복잡하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원제의 'The Mad Hatter'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는 특이한 '미친 모자 장수'를 말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실크 모자를 훔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를 가리킨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도난 사건을 펠 박사가 맡게 되는데 이것은 사건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어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슬프고 잔인한 역사가 남아있는 런던탑에서 필립 드리스콜이라는 젊은 기자가 중세 때 사용했던 무쇠 화살에 찔린 채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더 특이한 것은 죽은 드리스콜이 미친 모자 장수가 훔쳐서 사라진 실크 모자를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드리스콜을 죽인 범인은 모자를 훔치고 다닌 미친 모자 장수란 말인가. 사건 현장을 조사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미친 모자 장수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그러나 범인이 너무 뻔뻔하게 자신이 범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단서를 살해 현장에 그대로 남겨둔 이유는 무엇일까? 펠 박사는 처음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모자 도난 사건이 드리스콜의 죽음과 연관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일단 미친 모자 장수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한다. 그런데 펠 박사는 모자 도난 사건, 드리스콜 살해 사건에 관한 수사를 해드리 경감에게 맡긴 채 또 다른 사건에도 신경 쓰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져버린 에드거 앨런 포의 미발표 원고를 찾는 것.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희귀한 원고는 죽은 드리스콜의 삼촌 윌리엄 경이 소유하고 있었다. 결국, 펠 박사는 세 가지 사건을 동시에 맡은 셈이다.

 

미친 모자 장수의 모자 절도사건, 런던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그리고 포의 미발표 원고 도난사건. 카는 전혀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세 가지 사건을 절묘하게 얽혀 복잡한 트릭을 선보인다.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범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트릭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신선한 소재이지만, 이야기가 중반부로 진행할수록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흠이다. 아무래도 세 가지 사건의 연관성을 독자에게 잘 설명하기 위해서 카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새도록 커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크게 고심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해드리 경감이 여러 인물을 직접 만나면서 수사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길어져 버렸다. 책의 300쪽 정도 돼서야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버린 사건의 내막이 점점 밝혀지게 된다. 결말이 궁금하다면 꾹 참고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독자는 펠 박사만의 수사 방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펠 박사는 해드리 경감이 수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쭉 지켜보고 나서야 경감의 추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사건이 완벽한 해결에 도달할 때까지 펠 박사는 자신의 추리를 공개하지 않는다. 일단 상대방의 추리를 듣고 나서 자신이 지금까지 머릿속으로만 정리했던 추리를 덧붙여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이러한 펠 박사의 수사 방식은 겸손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질질 끌어 결말이 궁금한 독자의 마음을 애타게 한다. 사건 현장에 들어서마자 간단한 단서만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단번에 알아내고, 자신의 추리를 왓슨과 형사들에게 잘난 척하면서 설명하는 셜록 홈즈와 무척 비교된다.

 

이 소설에서 해드리 경감은 항상 사건 현장에서 침묵하는 펠 박사의 수사 방식에 불만을 표출한다. 펠 박사가 소설에 나오는 탐정처럼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신비스럽게 보이는 행동을 흉내 낸다고 비꼬는 것이다. 그러자 펠 박사는 자신은 소설 속에 나오는 탐정과 전혀 다르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소설 속 탐정은 현실적이지 못해 부정하고 나선다. 그는 자신이 추리에 뜸 들이는 이유를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신중하게 해결하는 자세라고 말한다.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조차 알지 못하면서 다 알고 있다는 듯 남들에게 뽐내고 싶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펠 박사는 단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검증하는 추리야말로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신중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펠 박사의 모습은 독자에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실 그는 프랑스 요리를 좋아하는 대식가인데 음식과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면 범죄 이야기를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성품은 놀 땐 잘 놀고, 공부할 땐 완벽하게 암기하면서 공부할 줄 아는 똑똑한 모범생 같다. 이런 친구들이 성적 잘 나오는 비결은 항상 똑같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교과서만 쭉 봤는지 알 수 없지만,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은 뚝심 있게 공부한다. 자신만의 공부 방식을 고수한다. 문제에 한 번 파고들면 풀 때까지 매달린다. 펠 박사는 인내심이 많고 뚝심이 센 탐정계의 모범생이다. 문제의 답을 완전히 찾을 때까지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신중하게 문제를 푸는, 공부와 문제 풀이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모범생. 이들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탓에 문제 하나라도 틀리는 실수를 두려워한다. 펠 박사 또한 섣부른 추리를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 잘못된 추리가 사건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는 치명적인 오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이런 모범생을 은근히 싫어하고 질투했다. 문제를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런 모범생 친구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이런 친구들을 보면 무언가 꽉 막히면서도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펠 박사의 추리가 익숙하지 않다. 국내에 그가 등장한 작품은 많이 소개되지 않은 편인데 앞으로 이 신중한 탐정과 친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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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4-12-2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추리소설과는 아직 친해지지가 않아. 읽어볼 생각도 안 들고. 이유가 뭘까 곰곰_

cyrus 2014-12-28 14:04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을 잘 읽지 않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문화적 차이감이 독서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아요.

qualia 2014-12-28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 뚱딴지 같은 질문인데요. 원제 『The Mad Hatter Mystery』를 『모자수집광사건』으로 번역한 까닭이 궁금합니다. cyrus 님 글을 읽어보면 “Mad Hatter”는 “미친 모자 장수” 혹은 괴짜 모자 장수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미친 모자 장수가 실제로도 모자 수집에 미친 “모자수집광”인가요? 원작 소설에 그렇게 그려지고 있는지 걍 궁금해서요.

구한말 혹은 개화기 초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어느 외국인 탐험가(?)가 그랬다고 합니다. 한국(조선)처럼 모자가 다양하고 수많은 나라는 첨 봤다고요. 만약 어떤 모자수집광이 당시 한국에 들어왔다면 대박을 쳤을 거란 생각이...^^ 가만 돌이켜보면 정말 우리 민족은 수많은 갖가지 모양의 모자를 만들어냈고, 또 일상에서도 많은 시간을 모자를 쓴 채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살펴봐도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지위고하, 사농공상을 가리지 않고 아주 다양한 모자들을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죠. 그중에서 ‘갓’의 실용성/예술성/독창성/문화적 상징성은 정말 압권이죠.

cyrus 2014-12-28 17:57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쓰다가 ‘미친 모자 장수’라는 말을 빠뜨리고 말았군요.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출판사가 이 작품을 ‘모자수집광사건’이라고 정했는데 사실 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목이 잘못 지은 듯한 느낌이 났어요. 왜냐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모자 도둑이 모자를 수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자를 훔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모자만 훔치는 절도범이라고 보면 됩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모자만 수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모자를 보유한 수집가의 반열에 올랐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