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그로 - 아프리카와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
W. E. B. 듀보이스 지음, 황혜성 옮김 / 삼천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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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차별은 역사적으로 끊이지 않는 아주 해묵은 문제다. 그만큼 뿌리가 깊다. 그래서 근절도 쉽지 않다. 인종 차별의 근원에는 서구 사회의 백인 우월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인식은 고용, 교육 등 전반에 걸친 인종 갈등으로 이어진다. 서구 사회에는 사실 인종 차별이 일상화돼 있기도 하다. 특히 미국은 가장 극단적인 인종 차별이 벌어지는 사회다. 미국이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간단치 않다. 노예해방을 선언한 남북전쟁 이후로도 미국 남부에서 흑인 차별은 여전히 극심한 양상을 보인다.

 

인종, 피부색에 대한 차별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비극이다. 그러나 오해와 광기로 인한 비극은 늘 되풀이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노예제도는 15세기 유럽인의 신대륙 발견 및 식민통치가 본격화하면서 시작됐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 제국은 19세기 초반까지 노예무역으로 떼돈을 벌었다. 목화 농장의 부족한 노동력을 메꾸기 위해 쇠사슬에 묶여 미국 남부로 끌려온 흑인들은 백인 농장주에 의해 착취당했다. ‘백인이 지배하는 미국’을 외치는 미국인들은 KKK(Ku Klux Klan)라는 비밀 폭력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만약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본 시청자라면 흑인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일 것이다. ‘갱(gang)’, ‘폭력’, ‘마약’은 흑인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흑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다. 흑인 차별이 극심했던 20세기 초에 이미 흑인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한 백인의 무지와 편견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흑인 최초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윌리엄 에드워드 B. 듀보이스(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다. 1905년에 그는 나이아가라 운동을 통해 즉각적인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1915년에 듀보이스가 쓴 《니그로》(삼천리, 2013)는 흑인과 아프리카에 대한 상식화된 편견을 대담하게 뛰어넘는 책이다. 듀보이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흑인과 아프리카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을 전복한다.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특히 만연하고 심각한 이유는 피부색 또는 외모 때문이다. 듀보이스는 ‘인류의 동일성’을 근거로 인종을 정형화하거나 인종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실과 역사적 용례에 따르면, ‘니그로’는 아프리카의 더 검은 피부색 사람들, 즉 갈색 피부, 곱슬곱슬하거나 ‘짧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두텁고 때로는 뒤집힌 입술, 얼굴에서 턱 부분이 발달된 경향, 길쭉한 두상이 특징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그렇지만 이런 유형의 니그로도 고정불변이거나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피부색도 무척 다양하여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주 새까맣거나 남빛이 아니다. 머리카락도 곱슬머리에서 풍성한 복슬 머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얼굴 각도와 두개골 모양도 무척 다양하다. (14~15쪽)

 

 

우리가 타자를 지각할 때 거의 자동으로 고려하는 요인이 성별, 나이와 함께 인종이다. 이처럼 인종에 대한 정보는 상대방을 지각하고 평가하는 데 최우선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암암리에라도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서로 다른 피부색과 문화를 지닌 타자에 대하여 동일성을 강제하는 폭력은 지금까지도 횡행하고 있다.

 

오늘날의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잦은 내전과 질병, 기아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15세기 이전의 아프리카는 그렇지 않았다. 인류 4대 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 문명의 발원지 아프리카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대륙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광활한 대자연과 풍부한 광물 자원을 토대로 무역도 발달했었다. 《니그로》는 아프리카 문명의 찬란한 문화와 업적만을 상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식민지시대 이전부터 행해지던 서아프리카 내에서의 노예무역에 대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통념과는 달리 대다수의 흑인 노예들은 백인 사냥꾼에 잡혀 온 것이 아니었다.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베냉, 다호메이, 아샨티 왕국은 약소 아프리카 부족 마을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팔았다. 서아프리카의 아프리카 왕국들은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 노예 상인들의 높아진 수요에 맞춰 노예무역을 확대했다. 아프리카에서 구하기 힘든 총과 화약, 술 등을 얻기 위해서다. 듀보이스는 노예무역이 성행했던 역사에서 흑인 편견과 탄압의 원인을 찾는다. 그는 오랜 내전과 노예무역 그리고 식민지국 수탈로 인해 뛰어난 문화유산과 풍부한 자원을 가진 아프리카가 ‘거대한 노예 시장’으로 전락했다고 분석한다.

 

100여 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듀보이스가 지적한 대로 흑인에 대한 사회문화적 차별과 분리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이 책의 머리말 서두에서 “완벽한 흑인 역사를 말하기에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라고 썼다. 이제는 아프리카의 역사, 다양한 아프리카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언어 형성 배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사라진 평등을 말하기에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 100년 전 듀보이스가 바라본 인종차별과 오늘날 인종차별은 다르다. 오늘날 인종차별은 단순히 편견과 인식의 잔존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 종교 등이 조장하는 체계적인 ‘투명한 사회제도’로 작동된다. 흑인에 대한 차별 극복과 자유에의 여정은 아직 미완의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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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8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9 20:37   좋아요 0 | URL
‘백인 남성/백인 여자‘를 구분하는 젠더 이분법이 있듯이 ‘흑인 남성/흑인 여성‘을 구분하는 젠더 이분법도 있어요. 그런데 백인을 선호하고, 흑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견과 차별로 인해 흑인 남성/여성은 억압을 받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라는 책에 흑인을 통제하는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사례들이 나옵니다. 사례들이 남의 나라 일이 아니에요. 우리나라에 사는 이민자 중에 유색인들이 있어요. 중동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이들을 통제하는 편견과 차별이 형성될 것입니다.

AgalmA 2018-05-23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부터 진출해 지금의 인류 기원의 씨가 된 걸 생각하면 인종주의는 진짜 웃긴 구분 아닙니까. 뿌리와 근원 그렇게나 좋아하는 서양이 이건 왜 간과한단 말입니까~ 하여간 인간은 참 자기 믿고 싶은대로 주장 개진하면서 객관 운운하는 거 맘에 안 들어요!
이런 논의에는 항상 울분이 터져서(아, 필립 로스...노벨상 못 타고 가셨네요ㅜㅜ)...좀 격노 어투인데 cyrus님께 불쾌감을 드리지 않았으면 싶네요^^;;

cyrus 2018-05-24 14:28   좋아요 1 | URL
요즘 중세철학, 중세 역사를 다룬 책을 보고 있어요. 시대를 불문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수도사들이 논쟁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 장면에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옵니다... ㅎㅎㅎ 제가 저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답답해서 못 살았을 거예요.

필립 로스. 제가 유일하게 읽은 그의 작품이 <울분>입니다.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자 중 최고령 작가가 밀란 쿤데라 아닌가요? 쿤데라 올해 나이가 아흔일걸요? ^^;;
 

 

 

 

 

 

 

지금 30대 이상 연령층은 <톰과 제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추억의 만화죠. <톰과 제리>는 잘 알려진 대로 쥐 제리를 잡아 먹어치우려는 고양이 톰의 실패담으로 구성됩니다. 제리는 먹이사슬 관계상 언제나 약자였고 그에 따라 꼬꼬마 시청자들은 늘 쫓기는 신세인 제리를 응원했죠. 어린 시절 저도 제리를 좋아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톰과 제리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제리에게 당하기만 하는 톰이 불쌍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톰, 고길동, 로켓단 3인방은 ‘지금 보면 가장 불쌍한 3대 만화영화 빌런(나쁜 역할을 맡은 캐릭터)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과거에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접하면 부작용이 있었을 만화영화들이 많이 방영되곤 했습니다. <톰과 제리>도 어린이에게 권장할 만한 만화영화가 아니에요. <톰과 제리>는 1940년 미국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 사회는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흑인을 대놓고 멸시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톰과 제리>에 흑인을 비하하는 묘사의 장면들은 그대로 텔레비전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혹시 <톰과 제리>에 팔과 다리만 나오던 흑인 하녀를 기억하시나요?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흑인 하녀는 톰에게 제리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톰이 제리를 못 잡거나 톰이 제리를 잡는 과정에서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으면 하녀는 톰을 집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런데 하녀의 얼굴을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만화를 보는 시청자는 까만 피부의 팔과 다리, 그리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몸만 볼 수 있습니다.

 

 

 

 

 

 

 

 

 

 

 

 

 

 

 

 

 

*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대니얼 사이먼스 《보이지 않는 고릴라》 (김영사, 2011)

 

 

 

어렸을 때 <톰과 제리>를 많이 봤는데, 흑인 하녀가 나온 장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요? 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흑인 하녀는 출연 분량이 적은 ‘단역’입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해요.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 착각’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실험이 ‘보이지 않는 고릴라(Invisible Gorilla)’ 실험입니다. 흰 셔츠 입은 학생들이 공을 패스한 횟수를 세어보는 이 실험에서 참가자 절반은 고릴라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학생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봤던 것이죠. <톰과 제리> 시청자들은 톰과 제리가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보느라 흑인 하녀가 잠깐 나오는 장면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흑인 하녀의 얼굴이 잠깐 나오는 <톰과 제리> 에피소드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에피소드를 봤는데 기억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결과가 보여준 ‘주의력 착각’이죠. 아주 잠깐이지만 하녀의 얼굴이 나오는 <톰과 제리>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톰과 제리>의 흑인 하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씁쓸하게도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 사회에 살았던 흑인들은 백인의 차별과 멸시 속에 삭제되어 ‘투명한 존재’로 남았습니다.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정체성을 부여받는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톰과 제리>의 흑인 하녀의 이름이 뭔지 궁금하지 않나요? ‘매미 투슈(Mammy Two-shoes)’라고 하네요. 그런데 ‘매미 투슈’는 하녀가 태어났을 때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흑인 하녀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는 별칭입니다. ‘mammy’는 유모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흑인 차별이 심했던 미국 남부 지역에 가면 ‘mammy’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백인 가정에서 일하는 흑인 하녀를 비하하는 속어가 됩니다. 하녀의 성(姓)인 ‘shoes(구두)’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구두를 신은 다리만 나오는 하녀의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매미 투슈’는 함부로 호명해선 안 되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이름이 아니라 흑인 여성을 경멸하는 백인이 만든 ‘혐오 단어’입니다.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첫 장에 보면 ‘무쇠솥과 주전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흑인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마리아 스튜어트는 백인 가정의 하녀로 일한 흑인 노예였습니다. 그녀는 어느 연설에서 ‘무쇠솥과 주전자’에 억눌린 채 살아야 하는 흑인 여성의 실태를 알렸습니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우리 흑인 딸들의 마음과 재능이 무쇠솥과 주전자 아래에 억눌려야 합니까?” (마사 스튜어트, 《흑인 페미니즘 사상》 21쪽)

 

 

‘무쇠솥과 주전자’는 ‘매미 투슈’만큼 비하적인 의미의 단어는 아니지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흑인 여성의 노동 착취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지난 월요일(5월 14일)에 《흑인 페미니즘 사상》 첫 번째 독서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날, ‘소울트리’라는 분이 ‘무쇠솥과 주전자’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여 제시했습니다. 무쇠솥과 주전자를 화로에 오랫동안 올려놓으면 밑 부분이 새까맣게 그을립니다. 하녀는 부엌에 가면 무쇠솥과 주전자를 화로에 올려놓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소울트리 님은 ‘(검게 그을린) 무쇠솥과 주전자’가 흑인 하녀의 모습을 비유한 단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흑인 여성은 다중(多重)으로 억압받는 존재입니다. 흑인 여성을 억압하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본다면 ‘백인 남성’, ‘흑인 남성’ 그리고 ‘백인 여성’입니다. 그리고 이 성별 및 인종적 구분은 이성애라는 섹슈얼리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가 재생산과 생산의 기초 단위로 이성애에 기반을 둔 가족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성애 이외의 섹슈얼리티는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젠더, 인종, 계급뿐만 아니라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해체하는 사상입니다.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상세하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불과 오십 년 전만 해도 흑인은 백인 화장실을 쓸 수 없고, 버스에서 흑인은 맨 뒷좌석에만 앉아야 했고, 백인식당은 흑인에게 음식 서빙을 거부했고, 흑인은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흑인해방운동이 전개되자 진보를 ‘남성성’과 동일하게 인식하는 일부 흑인 남성 지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 지식인 중심의 미국 흑인 사상은 흑인 여성해방 문제를 소홀히 다뤘습니다. 서구 중산층 출신의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여성을 여성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동료로 보지 않았습니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문제를 구성하는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백인 여성(페미니스트)의 흑인 여성 차별 문제는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과 ‘흑인 남성의 흑인 여성 차별’ 문제만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집안의 노동자》 (갈무리, 2017)

* 하워드 진 《역사의 정치학》 (마인드큐브, 2018)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집안의 노동자》 (갈무리, 2017)여성을 ‘가사 노동자’로 기획한 미국 뉴딜 정책의 한계를 되짚은 책입니다.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의 긴 터널 속에 헤매는 ‘잊힌 사람들(The Forgotten Man)’을 위한 뉴딜 정책을 내세웁니다. 뉴딜 정책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긴 기존의 자유방임주의에서 벗어나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통제하여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는 복지 정책입니다. 그러나 뉴딜 정책은 경제 피라미드 구조에서 밑바닥에 위치했던 흑인들을 구제하지 못했습니다. 대다수 여성은 국가가 주도한 일자리 정책의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흑인은 더 심각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특히 남부에 사는 흑인들은 제대로 된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했으며 남부 백인들이 복지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분배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루스벨트 정부는 흑인차별 문제에서도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자신의 글에서 폭력과 살인을 부르는 흑인차별 문제를 방관한 루스벨트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따라서 뉴딜 시대는 백인들이 살만한 시절이었을 뿐입니다. ‘백인들에 의해 잊힌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과 차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20세기 초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식했지만, 그들은 가사노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여성을 ‘집안의 노동자’로 정의하기 시작한 시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뉴딜 정책이 도입되기 이전의 시기입니다. 미국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위한 ‘가정학 운동’을 진행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정학’은 집안에서만 할 수 있는 기술, 즉 재봉과 바느질을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가정학을 배운 미국 주부들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여 가족의 기능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국가는 중산층 여성들에게 ‘무급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선전합니다. 그 시절에 주부가 가사노동을 하지 않으면 ‘나쁜 엄마’, ‘나쁜 아내’라는 부정적인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 [개정판] 베티 프리단 《여성성의 신화》 (갈라파고스, 2018)

* [구판 절판]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 (이매진, 2005)

 

 

 

국가는 여성을 가정(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로 ‘기획’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베티 프리단은 가사노동에 지친 백인 중산층 주부를 괴롭혔던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에 주목합니다. 그 ‘문제’는 여성에게 주부로 살아가길 강요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입니다. 하지만 프리단도 ‘가정학 운동’을 주도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한계를 답습했습니다. 그녀 역시 여성의 삶에 주입된 가사노동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또 흑인 여성 문제를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보고 싶은 문제(백인 중산층 여성의 차별과 불평등)’만 봤고, 흑인 여성은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받아 (중산층 백인 중심의) 여성 정책으로부터 소외받습니다. 이처럼 흑인 여성 문제에 소극적으로 반응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은 흑인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흑인 페미니즘은 억압에 저항하는 것뿐만 아니라 억압을 정당화하는 관념에 도전하는 ‘비판 사회이론’입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포괄적인 목적억압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억압을 정당화하는 실천과 관념에 저항하는 것이다. 비판사회이론인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서로 교차하는 억압에 의해 지속되는 사회 부정의 상황에서 흑인여성의 힘 기르기를 그 목적으로 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 55~56쪽)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교차하는 여성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여성 장애인,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등은 복잡한 차별 피해를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도 고려해야 합니다. 여성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마치 여러 개의 실이 복잡하게 꼬인 상태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여성의 삶을 속박하는―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계급 등이 얽힌―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어나가기 위해선 ‘교차성’에 주목한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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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7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8 11:50   좋아요 0 | URL
‘강간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라는 책에 보면 흑인 여성의 강간 피해 사례들이 나옵니다. 차마 눈으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콩고 민주 공화국은 정말 강간이 많이 일어나고, 강간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가 낮은 국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5-1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허투루 읽다가 나중에는 정색을 하고 읽게 하는 힘이 있는 글입니다. 이달의 추천작으로 추천합니다아..

cyrus 2018-05-18 11:51   좋아요 0 | URL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하라 2018-05-17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유없이 그런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랬던거라는 이유가 생겨버렸네요^^;

cyrus 2018-05-18 11:52   좋아요 0 | URL
사실 <톰과 제리>에 아이들이 해선 안 될 잔인한 행동들이 나오죠. 그리고 가학적인 묘사도 많이 나와요.. ^^;;

transient-guest 2018-05-18 04: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인종증오와 차별의 망령을 끄집어 낸 것이 지금의 미국입니다. 과거 법적으로 차별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 흑인여성이었죠. 영화, The Shape of Water에서 보면 잠깐 이런 모습이 나오죠. 저도 톰과 제리에서 가끔 등장하던 흑인여성의 얼굴이 나온 에피소드는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사실 톰과 제리의 톰보다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씨가 더 짠하게 기억됩니다. 장남으로 없는 집에 태어나 온 가족을 부양했다던 당시 아버지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모두 거둬먹이는 걸 보면 박애주의자 같습니다.ㅎㅎ 그 둘리가 좀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건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보고나서입니다....

cyrus 2018-05-18 11:54   좋아요 1 | URL
어떤 유머게시판에 오른 글에서 본건데, 둘리보다 고길동이 더 불쌍하게 느껴지면 어른이 된 거래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8-05-18 12:43   좋아요 0 | URL
이미 늙갱이랍니다 ㅎㅎ

stella.K 2018-05-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흥미롭고 진지한 시간이었겠구나.
톰과 제리는 나도 초등학교 때 봤는데
그때는 뭐 워낙 어리기도 하고, 흑인 여성 문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이기도 했으니.
근데 문제가 참 많아.
그래도 요즘 흑인 영화들엔 흑인 여성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시도들이 있어보이는데.
<히든 피겨스>도 그렇고, <헬프>도 그렇고.
그런데 그건 또 제3자가 봤을 때 불온한 구석이 있더라고.

cyrus 2018-05-19 20:53   좋아요 0 | URL
이제 서구 백인 작가가 쓴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흑인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유심히 보려고 해요. ^^

페크pek0501 2018-05-20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두 권짜리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두껍진 않았어요.

독자를 어느 위치에 놓고 쓰느냐의 문제, 무엇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쓰느냐의 문제.
필자는 의식하지 못했으되 독자가 느껴지는 게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글쓰기가 결코 쉽지 않은 작업 같습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걸 느껴질 때가 많아요. 특히 자기가 베푼 것만 생각하고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건 모르기 일쑤이고요.

cyrus 2018-05-23 15:39   좋아요 1 | URL
문제를 다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글 한 편으로 정리하는 일이 쉬운 작업이 아니죠. 그래서 저도 페크님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쉬운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글로 표현해야 합니다. 전문 작가이든 글 쓰는 사람이든 글 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쓰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글 잘 쓰는 사람도 완벽할 수 없어요. 자신의 무지와 실수를 인정하고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쓴 글이야말로 훌륭하고 진실한 글입니다. ^^
 
노예선 - 인간의 역사 아우또노미아총서 60
마커스 레디커 지음, 박지순 옮김 / 갈무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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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명의 인류가 어머니 대지의 검은 아름다움을 떠나 새로 발견된 서부의 엘도라도로 옮겨지는 것.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져 버렸다.”[1] 폭력과 학대 속에서 상처받으며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았던 흑인에게 이 세상 자체는 지옥이었다. 1700년~1808년은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황금의 시대’였다. 이 무렵 유럽의 백인들은 노예무역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의 노예사냥으로 끌려가 아메리카에 매매된 흑인의 수는 수천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에서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는 노예선. 차곡차곡 관처럼 포개진 흑인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까지 흑인 노예들을 배로 운송하는 과정을 ‘중간항해’라 한다. 노예선의 선원들은 중간항해 도중에 사망한(병사, 자살) 흑인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오른 흑인들의 시신 주변에 상어 떼가 몰려들었다.

 

《노예선 : 인간의 역사》(갈무리, 2018)충격적이고 참담한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 책이다. 정사에는 철저히 무시됐던 노예 상인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이 책은 ‘노예’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흑인해방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아메리카로 끌려와 눈물과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온 자신들의 역사를 ‘가장 장엄한 연극’이라고 비유했다.[2] 역사학자 마커스 레디커는 인류사의 ‘연극’이 펼쳐진 중심 무대인 노예선을 주목한다. 그는 잊힌 노예무역과 노예선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 역사의 지평을 확대한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노예 상인들의 주도로 15~18세기 상업자본주의 확장과 더불어 나타났다. 17~18세기에는 아프리카 연안 지역에서 노예가 많이 잡혀 왔으나 19세기에는 아프리카 내륙 지역에서까지 많은 노예가 잡혀 왔다. 노예무역에 노예 상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사냥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다호메이 왕국, 아샨티 왕국 등 오랜 옛날부터 번성했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다른 아프리카 내 부족과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세력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 상인들과의 거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프리카 왕국들은 전쟁 포로를 노예 상인들에게 주는 대가로 무기를 사들일 수 있었다.

 

노예선은 ‘떠다니는 지하 감옥’이었다. 이 거대한 지하 감옥이 망망대해로 나가면 ‘나무로 만든 세계’가 된다. ‘나무로 만든 세계’의 권력자는 선장이다. 배의 하갑판 속에서만 지내는 흑인 노예들은 ‘상품’으로 취급받았다. 이윤에 눈이 먼 노예 상인과 선원 들은 한 명이라도 더 채워 넣기 위해 좁은 하갑판에 인간 ‘상품’을 꽉꽉 채워 넣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식음 전폐를 하거나 반란을 도모하는 노예들에게 온갖 종류의 고문과 신체 절단을 서슴지 않았다. 선장이 선호하는 고문 방식은 구교모 채찍이다. 끝에 매듭이 달린 아홉 개의 끈이 있는 구교모 채찍은 노예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이보다 더 끔찍한 고문은 상어가 돌아다니는 바닷가에 빠뜨리는 벌이다. 선장은 노예 한 명을 골라 상어에 잡아먹히는 대상으로 삼았고, 노예들은 자신의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이러한 형벌은 노예들의 저항 의지를 꺾이게 하는 동시에 ‘권력자’로서의 선장의 영향력을 확립한다. 노예들은 알몸으로 채찍을 맞고, 끔찍하게 고문당하고, ‘떠다니는 지하 감옥’ 속에서 잠들었다. 마커스 레디커는 ‘권력자’이자 ‘지배자’인 선장 앞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던 흑인 노예의 역사를 복원시킨다. 노예선 안에 감금된 흑인 노예의 저항 문화도 해방한다. 이로써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의미 있는 역사’로 되살아난다.

 

가령 노예선 안에서 형성된 흑인 노예 공동체와 정서적 유대감을 새롭게 해석한다. 노예선에 갇힌 노예들이 ‘흑인’이라고 해서 출신지, 언어, 문화, 관습 등이 다 똑같은 건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 ‘두려움’, 그리고 ‘살아갈 희망과 꿈’이라는 공통된 감정들이 친밀감을 높여주었고,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는 ‘뱃동지(shipmate) 생겼다. 노래집단 정체성을 하나로 묶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진 지식이 될 수 있다. 노예들은 뼛속까지 스며있는 슬픔을 노래로 만들었다. 저자는 노예들이 부른 노래는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창조성’을 동시에 가진 문화로 본다.

 

《노예선》은 미국 사회조차 망각해버린 흑인 노예제도 역사와 그에 대한 흑인들의 저항을 재현한다. 이 책에 정리된 ‘인간의 역사’는 단순한 흥밋거리나 학문적인 논쟁의 주제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이 교차했던 현장을 보여주는 진실한 기록이다. 책 안에 어른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잔인하게 느낄 수 있는 기록들이 몇 개 있다. 그렇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노예들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맴도는 듯한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맹아가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황금의 시대 이면에는 무참히 파괴된 수많은 운명의 아픔이 있다.

 

 

 

 

* Trivia

 

선장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게도 했다. (239쪽)

→ 발생하기도 했다

 

 

 

[1]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 《노예선》 21쪽

[2] 같은 책,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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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6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7 16:07   좋아요 0 | URL
네, 논란이 있긴 하지만 흑인도 노예제에 일조한 사실이 있습니다. 중잉집권제 아프리카 왕국은 포로로 잡힌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무역 상인에게 판 대가로 무기를 받았습니다. 그 무기로 다른 아프리카 종족이 사는 곳을 약탈했죠. 노예제의 역사를 바라볼 때 ‘가해자(백인)-피해자(흑인)’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설정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stella.K 2018-05-16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니까 예전에 <뿌리>란 영화가 있었어.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을 영화화한.
초등학교 때 봤는데 정말 빨려들듯 봤지.
이게 또 세월이 흘러 다시 만들어졌는데
볼만도 한데 이상하게 보고 싶지가 않더군.
군함도도 보다 말았는데 잔인한 게 보기가 싫더라구.ㅠ

cyrus 2018-05-17 16:11   좋아요 0 | URL
읽을 때마다 가슴 먹먹하게 했던 역사 주제가 ‘흑인 노예’와 ‘일본 위안부’입니다. 보면 볼수록 도저히 인간의 행동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내용이 나와요.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쳐 연구하는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2018-05-16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7 16:12   좋아요 1 | URL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기 시작한 이후부터 흑인 문화와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어요.. ^^;;

esmeral 2018-05-21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갈무리 출판사입니다.
『노예선』을 읽어주시고 서평과 오류 지적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려주신 1쇄의 오류를 갈무리 홈페이지 고칩니다 게시판에 공지하였습니다.
2쇄에서 수정하겠습니다.
http://galmuri.elogin.co.kr/index.php?mid=correct&document_srl=576070
감사합니다!
 

 

 

대구역 건너편에 대구콘서트하우스가 있습니다. 대구 시민회관을 리모델링해서 2016년부터 음악, 연극 등 각종 예술 공연을 펼치는 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은 대구콘서트하우스 1층에 있습니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은 여성, 가족을 위한 각종 교육 및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입니다. 뒤늦게 확인한 사실인데 대구여성가족재단이 2012년에 출범했을 때 당시 사무실은 서구 평리동 종합복지회관 별관에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종합복지회관 별관까지 걸어가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4월부터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회의실에서 대구 남성을 위한 여성학 교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 김홍미리, 나영, 박이은실, 손희정 외 그럼에도, 페미니즘(은행나무, 2017)

* 오찬호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동양북스, 2016)

 

 

 

412일은 오찬호 작가, 426일은 서민 교수, 510일은 여성주의 활동가 김홍미리 님이 강연을 해주셨고, 524일은 손아람 작가가 강연합니다. 무료 강연이라서 24일 당일에 강연 접수를 해도 대회의실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오찬호 작가와 서민 교수의 강연에 관심 있었지만, 두 날 모두 개인 스케줄이 겹쳐서 강연 신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김홍미리 님의 강연은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김홍미리 님의 강연 주제는 성평등한 사회는 가능한가?’입니다.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은 성차별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성차별은 나빠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홍미리 님은 성차별은 나빠요라는 말 한 마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친한 친구가 여성을 차별하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놈은 아닙니다. 저는 친구에게 여성을 차별한 발언의 문제점을 낱낱이 알려줬습니다. 친구는 기혼자입니다. 저는 친구에게 아내와 언젠가 태어날 자식들 앞에서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친구 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반응했습니다. 내가 했던 말도 여성을 차별하는 의미였어?”

 

 

 

 

 

 

 

 

 

 

 

 

 

 

 

 

 

 

* 수잔 팔루디 백래시 :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arte, 2017)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성주의 운동 및 연구에 종사한 여성들은 성차별 ·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렸고,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억압을 지적했습니다. 그녀들은 남성 중심주의가 반영된 제도나 문화를 무조건 받아들이기보다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를 둘러싼 사회에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그녀들의 질문을 거부했습니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들의 도발적인 질문에 무관심했습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여성들이 광장에 나서게 되자 남성 중심 사회는 슬슬 여성들의 반응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여성보다 남성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페미니스트에게 인신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개인의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성이 여성을 차별하는 상황을 언급하면, 사회는 그 발언을 개인의 특수한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다른 여자들은 불만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왜 너희(페미니스트)만 예민하게 구느냐?” 여성 문제를 거부하고 외면하는 사회일수록 페미니즘과 여성 정책에 대한 백래시(backlash)가 일어나게 됩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왜 이제야 말하나?”

 

여자를 위한 정책이 생기면 남자는 힘들어진다

 

한국 페미니스트는 일베충나 다름없는 메갈충이다.

사회악의 근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별, 여성혐오 등 여성을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사회 현상이나 문화를 계속 지적했지만, 사회는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김홍미리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수신 거부인 거죠. 오히려 페미니스트의 발언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좌파 남성 정치인들마저 여성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사회가 어떤 현상을 문제라고 인식하는 순간, 사회 구성원 일부는 그 문제를 근절하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변함없이 유지됐던 일상을 확 뒤엎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안정적인 체제를 선호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요. 시행착오와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죠.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사회의 수신 거부, 즉 백래시는 페미니즘이 있는 곳에 어디에나 있어왔던 현상입니다. 페미니스트는 백래시에 쉽게 두려워하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페미니즘과 백래시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세력은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늘어놓는 사람들입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은 여성들이 완전한 평등을 달성했을 때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커졌을 때 터져 나왔다. 이는 여성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여성들을 멈춰 세우는 선제공격이다.”

 

(백래시의 저자 수잔 팔루디, 김홍미리 인용)

 

 

그런 의미에서 백래시는 페미니즘의 패배주의적 행보를 증명한다기보다는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백래시에 직면한 지금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드높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입니다. 그래서 김홍미리 님은 "성평등한 사회는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미투 운동 분위기가 가라앉을까 봐 걱정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김홍미리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 걱정은 비현실적인 기우(奇遇)’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이 좀 더 전진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그 날 강연을 통해서 저는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협소하게 바라봤던 제 자신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성은 여성 운동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김홍미리 님은 여성혐오, 성폭력, 성차별 등 여성을 억압하는 문제에 접근할 때 관찰하지 말고, 문제를 경험하는 여성의 입장과 같은 방향에 서 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남성도 여성의 질문에 수신할 수 있으며 차별을 근절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타자와 같은 위치에서 서 보는 것. 책만 읽고 공부한다고 해서 향상되는 능력은 아닙니다.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지배적 남성성이 남아있고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지배적 남성성으로 물든 실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상력을 키우는 일은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책의 위치가 아닌 여성의 위치에서 고민하고,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행동에 동참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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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05-14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엄지 척!

cyrus 2018-05-15 16:01   좋아요 0 | URL
오랫동안 여성 운동에 참여했던 페미니스트들, 어디선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고민하는 여성들이 대단하고 존경받아야 합니다. 저는 그분들이 생각하고 기록한 것을 받아적고 있을 뿐입니다.

stella.K 2018-05-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좋겠다. 이런 강의 가까이서 들을 수도 있고.
마태님 강의 못 들어서 좀 아쉬웠겠는걸?
손아람 작가 들어보고 싶은데 난 아무래도...ㅠ

cyrus 2018-05-15 16:05   좋아요 0 | URL
서울은 대구보다 전문가 강연이 많아요. 요즘은 SNS로 강연 홍보를 많이 해요. 제가 인스타나 페이스북을 하지 않아요. SNS 계정이 있는 분들 덕분에 대구에 하는 강연 정보를 접해요. ^^;;

꼬마요정 2018-05-14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엄지 척! 대단하신 CYRUS님. 존경의 의미로 대문자로..^^;;
(혹시 대문자로는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겠죠? 검색해봐도 걸리는 게 없긴 하지만요^^:)

cyrus 2018-05-15 16:06   좋아요 0 | URL
소문자로 써도 대문자로도 써도 돼요.. ㅎㅎㅎ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

마태우스 2018-05-15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제 강의는 부끄럽고요, 손아람 선생님 강의가 젤 좋을 걸요. 근데 김홍미리 선생님이 백래시 번역하신 분이군요 흠...그 책 진짜 어마어마하던데, 전 읽다가 잠시 포기상태에요.

cyrus 2018-05-15 16:17   좋아요 0 | URL
《백래시》 번역한 분은 김홍미리 님이 아니라 다른 분입니다.. ^^;;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장소가 있어요. 카페 ‘스몰토크‘인데요, 거기 가면 페미니즘 관련 도서들로 채워진 책장이 있어요. 거기에 《백래시》가 꽃혀 있어요. 독서모임할 때마다 틈틈히 읽었어요. 혹시 다음에도 대구에 오셔서 커피를 마시게 된다면 경상감영공원 근처에 있는 ‘스몰토크‘에 가면 됩니다. 대구역과 카페의 거리가 멀지 않아요. ^^

페크pek0501 2018-05-15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발로 뛰며 열심히 배울 거 하나 갖게 되었어요. 파이팅!!!

cyrus 2018-05-16 08:26   좋아요 0 | URL
페크님이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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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회다. 무엇을 위해 쓰는가? 나는 왜 이 글을 써야 하는가? 그러한 일련의 문맥을 눈으로 추적하다 보면 인간이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의 세계관, 가치관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어있다. “나는 글을 쓴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은 글을 써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렇게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성찰의 과정인 동시에 자기표현의 산물이다. 타인의 자기표현을 읽는 행위는 자기 성찰을 위해 생각을 수렴하는 것이라면 타인에게 제 생각을 글로 전하는 행위는 자기 정체성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욕구다. 거기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며 글쓴이와 독자는 더 성숙하고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저런 ‘글을 잘 쓰기 위한 고민’을 하면서도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단지 ‘날(=글), 보러 와요’라고 강요하는 그런 모습이 있다. 아무리 문장이 좋고, 논리적으로 잘 써도 강파르게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 글을 읽는 독자는 소외되기 십상이다. 자기 정체성과 생각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데 급급한 자화자찬 글쓰기는 볼거리가 많지만, 독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자화자찬 글쓰기를 위해 사용된 언어는 결국 ‘보여주는 언어’가 된다.

 

‘보여주는 언어’로 글을 써왔던 사람들이 우치다 다쓰루의 글쓰기 강의를 듣게 된다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강연장을 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자화자찬 글쓰기를 선호하는 ‘잘난 놈’의 특권의식을 까발리기 때문이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원더박스, 2018)총 14강으로 진행된 ‘창조적 글쓰기’ 강의를 정리한 책이다. 가벼운 호기심에 이 책을 읽다 보면 심기가 여간 불편해지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글쓴이가 가져야 할 책임성을 되묻게 하기도 한다.

 

 

 ‘독자를 깔보는’ 시선으로 글을 쓰는 능력 따위를 아무리 익히고 배운들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힘주어 말합니다만, 그런 능력은 아/무/런/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27쪽)

 

 

‘보여주는 언어’로 채워진 글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나”, 바로 글쓴이 자신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책의 첫머리에 간곡히 당부했다. “제발 제1강까지는 읽어주기 바랍니다. 제1강을 읽었는데도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책꽂이에 다시 꽂으셔도 좋습니다.” 저자는 1강에서 ‘독자를 깔보고 사랑하지 않는 글’을 혹평한다. 단지 ‘글을 정확하게 쓰는 비결’을 알고 싶거나 자화자찬 글쓰기를 고집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덮어도 좋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이 책을 덮을 뻔했다. 그동안 나는 ‘보여주는 언어’로 글을 써왔고, 독자를 배려하지 못한 채 ‘재미없는 글’을 양산했다. 책 뒤표지에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는 백전백패!’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나의 글쓰기는 백전백패가 아니라 ‘천전천패(千戰千敗)’이다. 저자의 글쓰기론에 동의하지 않아서 책을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책에 나온 ‘내 이야기’, 즉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가 부끄러워서 책을 끝까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독자를 사랑하는 글’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메타 메시지’다. ‘메타 메시지’는 진정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중요한 내용을 의미한다. 저자는 ‘메타 메시지’를 ‘사활이 걸린 중요한 정보’라고 말한다. 독자가 읽기 쉬운 글은 글쓴이의 메타 메시지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글쓴이는 경의(敬意)의 자세로 독자에게 글을 썼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말하는 경의의 자세는 이렇다. “부탁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꼭 들어주세요.” 독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글쓴이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쉽게 쓴다. 앞서 나는 자화자찬 글쓰기에서 드러나는 ‘보여주는 언어’의 특징을 언급했다. 저자는 마지막 강의(제14강)에서 발언자, 즉 글쓴이의 절박함이 묻어있는 ‘바깥을 향하는 언어’야말로 ‘메타 메시지’이며 수신자(독자)에게 ‘전해지는 언어’라고 말한다. ‘바깥을 향하는 언어/전해지는 언어’의 반대말이 ‘내향적 언어/전해지지 않는 언어’이고, 내가 설명한 ‘보여주는 언어’와 비슷하다. 따라서 ‘내향적 언어/전해지지 않는 언어/보여주는 언어’는 독자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며 글쓴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돋보이게 하는 독단적인 글이다. 이런 재미없는 글은 독자들이 외면하는 ‘죽은 글’이다. 이 글에는 글쓴이의 진정한 혼이 실려 있지 않다.

 

글 자체로는 완성도가 떨어져도 글에서 독자에게 나누고자 하는 느낌이 잘 살아있다면 그거야말로 ‘독자에게 사랑받는 좋은 글’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다작(多作)해도 단 한 명의 독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글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독자가 외면한 글은 글쓴이와 독자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지 못한다. 글쓴이와 독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다리가 부실하거나 부재(不在)한 글은 읽을 만할 가치가 없다. 앞으로도 독자를 존경하는 글로써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다. ‘좋은 글(나)을 쓰기 위한 고민’이 아닌 ‘독자를 사랑하는 글을 쓰기 위한 고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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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4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4 16:45   좋아요 0 | URL
요즘 손이 가는대로 책을 읽다보니 시집을 읽을 기회가 없었어요. 번역서를 많이 읽고 있는 중인데요, 수식어가 긴 문장을 읽는 일이 고역입니다.. ㅎㅎㅎ

2018-05-14 14: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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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14 16:51   좋아요 0 | URL
책의 제1강과 제14강만 보면 저자의 글쓴기론을 파악할 수 있어요. 나머지는 롤랑 바르트의 에크리튀르 개념,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 개념 같은 서구 사상을 설명하는 내용이에요.

글에 ‘좋아요’ 수가 많다고 해서 그 글이 잘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독자가 사랑하는 글’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워요. 글의 내용보다는 글쓴이의 성품이 마음에 들어서 그 사람이 쓴 글에만 ‘좋아요’를 누를 수 있잖아요. ^^

레삭매냐 2018-05-14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끊임 없이 독자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는
정말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런데 한 번 저자에게 빠지면 쉬이 헤어나기도
쉽지 않을 듯 하네요.

물론 한 저자에게 몰입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요.

cyrus 2018-05-14 16:52   좋아요 0 | URL
작가 한 사람만 지나치게 사랑하면 그 사람의 단점이 보이지 않게 돼요. 그래서 여러 작가들을 사랑하면서 책을 읽으려고 해요.. ^^;;

2018-05-14 16: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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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14 16:54   좋아요 1 | URL
우주지감 독서모임 도서 중에 ‘사진 책’이 있으면 그 날 모임에 초청하고 싶어요. ^^

2018-05-14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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