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은 끊임없는 연속입니다
쉴 새 없이 뛰는 심장
숨 쉬는 허파
가슴 속에 품은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요
산책을 하다가 피곤하면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듯이
우리의 삶도 사랑도 그렇게
가끔 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루 또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항상 이렇게 살아왔었지만 지금이야말로 제일 바쁜거 같다.
정말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뭐... 지금 남은 생애동안 수많은 경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우리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바지런하게 박차를 가하는 것도 좋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삶에 지쳐버린 정신의 영혼을 위해서 한번쯤은 쉬는 것도 중요하다.





사족) 요즘 카카오스토리에 푹 빠져서 그런지 짧은 글쓰기에 재미 들렸다.

가끔씩은 이렇게 짧은 글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은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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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03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토리에 올리신 글에는 친구분과 이야기중이신듯 하여 선뜻 댓글을 옷 달았는데 여긴 달겁니다. 그때 올린 비를 좋아하는 사람...도 좋았고 이 시도 좋아요. 기분좋은 심장박동의 떨림과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설레네요..루스님이 뽑아주시는 시들도 좋아요.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있고 그리 어렵지 않지만 아름다운, 예쁜 시들. 어린 제 연령에 딱 맞아요.

cyrus 2012-05-03 22:25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막상 이진님에게 안부인사라도 남기고싶었는데 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참에 이진님이 댓글 달 수 있게 좋은 시나 책 인증샷 올려야겠군요 ^^

카스피 2012-05-0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카카오 톡이라 아직도 2G를 쓰는 저에게는 마치 딴나라 이야기 같네요^^

cyrus 2012-05-03 23:06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도 얼른 3G로 갈아타시는게 좋을듯해요 ^^
 
꿀잠 삶의 시선 17
송경동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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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하기 참 힘들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일상을...

 

 어제 서울 역삼동에서 건물붕괴 현장에서 매몰됐던 인부 한 명이 끝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건물 바닥을 철거하는 리모델링 공사를 하다가 건물이 무너져버리는 바람에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박웅현<책은 도끼다>라는 책에서 본 내용이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는 신문 읽기를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라고 말함으르써 혐오했다고 한다. 24시간 동안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 등과 같은 불행한 일들을 신문 독자들로 하여금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오락거리'로 변형시키고 있다고 봤다. 

 무엇보다도 프루스트가 신문기사를 싫어했던 것은 특정 사건에 대해서 '모든 문맥을 빼버리고 말하는' 방식의 문제점에 있다. 사건이 발생하는 발단, 과정 그리고 결과를 단 몇 줄로 압축시켜버리는 신문 기사의 내용이 독자들을 무감정적으로 변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모닝커피를 음미하면서 소파에 앉아 읽으면서 몇 만 명이 죽은 테러 사건을 보면서 희희낙락하거나 둔감한 반응을 보이는 우리 '위선적인' 독자를 프루스트는 싫어했다.

 

 일반 독자들보다 문학적인 감수성이 깊었고 압축적인 내용의 신문기사를 싫어했다던 프루스트라면 송경동 시인의 '설명하기 참 힘들다' 라는 시를 읽고 찬사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설명하기 참 힘들다 - 어느 지하생활자의 보고

 

 

 지하 토목공사 때 파 들어갈 땅 주변 붕괴를 막기 위해 수직 H형 철골빔들을 박는다. 이것을 파일이라 한다. 땅을 파 들어가며 이 파일들이 주변의 지압을 견디게 하기 위해 다시 철골빔을 마주본 파일 사이사이에 수평으로 대준다. 이것을 버팀목이라고 한다. 20~30m짜리 버팀목은 없어 두 토막 내지 세 토막을 이어야 하는데, 이 연결 마디의 꺾임을 막기 위해 두 버팀목이 맞닿는 부위에 패드처럼 쇠판을 얹는다. 이것을 연결판이라고 한다. 연결판은 서른 두개의 볼트로 두 토막을 이어 휨을 방지해 준다. 이때 볼트 구멍을 꼭 드릴를 사용해 뚫어야 한다. 산소절단기를 댈 경우 열변형으로 버팀 강도 저하가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꼭 산소절단기를 이요해 그 구멍을 뚫었다. 붙잡을 것 하나 없는 허공에서 폭 30cm짜리 빔을 딛고 30kg이 넘는 핸드드릴을 사용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버팀부 주위에 전등을 많이 달지 않는 것도 이곳이 안전계단으로 다니는 감리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오늘 유씨가 떨어져 죽었다. 재수가 없거나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 (pp 19)

 

 

  

 

 건축 공사 현장에서 노동 경험이 많은 시인답게 그의 시에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공사 관련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수직 H형 철골빔', '연결판', '산소절단기' 등 건축 및 토목공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단어들이다. 시의 중반부까지는 토목공사의 전체적인 장면이 설명되다가 마지막에서야 단 두 문장으로 토목공사에 참여한 인부의 이야기가 언급된다. 

 하지만 인부는 공사 현장에서 실족사하고 만다. 그리고 '재수가 없거나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라고 서술하면서 시가 마무리되고 있다. 토목공사 노동자가 아니라면 직접 목격할 수 없는 불행한 사고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기에 독자들은 토목공사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실상을 시를 통해서 생생하게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시의 부제는 '어느 지하생활자의 보고' 이다. '설명하기 참 힘들다'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의 입장에서는 토목공사 노동 경험에 전무한 독자들에게 지하생활자들의 일상을 보고한다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들은 '노동'은 신체를 고되게 하고 힘든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삶과 관련이 없는 '노동자'의 고통스러운 일상과 슬픈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연애, 폭력, 부정부패. 가십거리 등과 같은 자극적이면서도 감각적인 기사만 제공하는 TV와 언론은 노동자의 추락사만 짤막하게 압축, 언급할 뿐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작업환경을 나열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지상의 공간 속에 살면서도 경제적인 능력이 상실되었고 심지어 지상의 인간들에게 눈에 띄지 못하는 '지하생활자'인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노동자'는 죽어서 보험금을 남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지하생활자'들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게 되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죽고 난 이후부터이다. 안타까운 것은 짧으면서도 한 번뿐인 인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노동현장에서 불귀객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문 지면을 통해서 노동현장에서 불귀객이 된 사연을 알게 된다. 그것도 하루 아침에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이승에서 잠시나마.

 

 

 뒷빽

 

 

 김씨가 H빔에서 떨어져 죽고 나서야
 나는 깜짝 놀랐다
 고작 시급 3천 원에 목메던 그의 몸값이
 1억이 넘는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 됐다

 

 그 후 나 역시 자본주의를 우습게 아는
 든든한 빽을 가졌다
 김씨가 산 것은 50년이지만
 죽은 순간은 5초도 안 된다

 

 여차하면 죽어버리자
 내 삶의 짧은 5초도
 최소한 1억쯤은 된다는 것을 알려주자
 그간 내가 몇백 번의 죽음을 경혐했는지도
 말해주자

 

 (pp 90)

 

 

 

 노동자들은 죽어서 신문 지면상에 이름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매겨진 보험금도 남겨진다. 살아 생전 쥐꼬리만한 시급을 받으면서도 일상을 연명해오던 그들이 죽고 나서야 평생 모으기도 힘든 1억의 보험금을 받는 인생의 한 장면. 수십 년동안 돈을 벌어도 1억을 만들기 어려운 시대에 단 5초라는 죽음의 과정만 거치면 손에 쥐어보지 못한 채 얻는 보험금. 시인은 노동자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조롱하고 있다.

 

 

 

 

 처절한 노동작업 속에 발견한 희망과 연대

 

 송경동 시인의 시 속에는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핍박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참한 일상과 남몰래 삼켜야만했던 사회에 대한 울분이 담긴 목소리가 담겨져 있다. 시라는 것은 프루스트가 혐오했던 압축적인 내용의 신문기사보다 시인이 바라보는 장면을 단 몇 줄로 표현해야 하며 이에 대한 감정도 절제하듯이 문장 속에 숨길 수 있는 특수한 글이다.

 하지만 송경동 시인의 시는 내용이 길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의 고통스로운 감정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이 경험할 수 없는 처절한 노동작업이 이루어지는 '지하생활자'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백무산 시인이 말처럼 그의 시는 '바보스러우면서도 정직하다'

 

  하지만 시인은 노동자들의 고된 일상만 바라본 것은 아니다. 힘들고 처절한 노동현장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공동체적 연대감을 정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쇠밥

 

 

 흙먼지에 섞어 먹는 밥 
 싱거우면 녹가루에 비벼 먹고 
 석면가루도 흩뿌려 먹는 밥

 

 체인블록으로 땡겨야 제 맛인 밥
 찰진 맛 좋으면 오함마로 떡쳐 먹고
 일 없으면 고층 빔 위에 혼자라도 서서 먹는 밥

 

 시큼한 게 좋으면 오수관 때우면 먹고 
 새콤한 게 좋으면 가스관 때우면 먹고 
 연장이 모자라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먹어야하는 밥


 무엇보다 나눠 먹는 밥


 1톤짜리 앵글 져다 공평하게 나눠 먹고 
 크레인 포클레인 지게차 기사도 불러 
 함께 비지땀 흘리며 먹는 밥

 

 석양에 노을이 질 때면
 아내와 아이도 모두 사이좋게 앉아 먹는
 그 쇠밥

 

  (pp 26~27) 

  

 

 

 흙먼지, 녹가루, 석면가루 등 몸에 좋지 않은 유해한 먼지가 묻은 밥이라도 노동자들에게는 힘든 노동 뒤에 먹는 밥은 꿀맛이다. 특히 3연 중에 '연장이 모자라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먹어야하는 밥'이라는 구절에서는 고된 작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노동자 특유의 굳센 근성을 볼 수 있다.

 

 

 꿀잠

 


 전남 여천군 쌍봉면 주삼리 끝자락
 남해화학 보수공사현장 가면 지금도
 식판 가득 고봉으로 머슴밥 먹고 
 유류탱크 및 그늘에 누워 선잠 든 사람 있으리

 

 이삼십 분 눈 붙임이지만 그 맛
 간밤 갈대밭 우그러뜨리던 그 짓보다 찰져
 신문쪼가리 석면쪼가리 
 깔기도 전에 몰려들던 몽환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꿈자락 붙들고 늘어지다가도 
 소혀처럼 따가운 햇볕이 날름 이마를 훑으면
 비실비실 눈감은 채로 
 남은 그늘 찾아 옮기던 순한 행렬  

 

 (pp 54)

 

 

 힘든 노동작업을 하고 난 뒤에 먹는 쇠밥이 '꿀맛'이라면 이삼십 분 새우잠은 '꿀잠'이다. 독자들에게는 지나치기 쉽고 외면해버리는 시간들이지만 이들에게는 고된 노동을 잠시나마 잊혀지게 만드는 달콤한 시간이다. 노동을 해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노동자들에게 '꿀잠'은 신체적, 정신적인 휴식의 과정이 아니라 가난한 일상 속에서도 그들이 소망하는 희망의 삶을 꿈꾸게 만드는 행복한 망중한이다. '꿀밥'과 '꿀잠'이 있기에 노동자들은 남들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 남들보다 더 힘든 일을,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윤과 생산을 더 많이 창출하도록 더욱 박차를 가하는 바쁜 자본주의의 일상이 노동자들에게는 삶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긍정적 자기위안의 기회마저 사라지게끔 만들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추운 날씨 속에서도 투쟁을 하는 것은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만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꿀밥'을 먹을 수 있으며 '꿀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일만 하는 노동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원한다.

 

 

싸우려면 끝까지 싸워야지
도중에 그만두면 영원히 찌그러진다는 것

 

 - 송경동「마음의 창살」중에서, pp 55 -

 

 

 

 시인이 쓴 저 구절처럼 노동자들은 잃어버린 생존권을 찾기 위해서 오늘도 자본가에 맞서 싸우고 있다. 경제적 자립성과 생존권은 이미 자본가들과 전경의 구둣발에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졌지만 남은 인생동안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희망의 기대감만큼은 그들에 의해 찌그러지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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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1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가 정말 말은 잘했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람을 편협하게 만들고 오만하게 만들지.
신문나 뉴스 한번 본 걸 가지고 전체를 본듯 착각하게 만드는 거.
책은 도끼다. 제목이 특이한데 왜 그런 제목을 썼을지 궁금하긴 하다.
시집에 대해 얘기 안하고 엄한 책이 꽂히다니 나도 참...ㅠ

cyrus 2012-01-12 23:10   좋아요 0 | URL
한 번 읽어보세요, 책에 소개된 박웅현씨의 독서법도 좋고요..
책 속에 좋은 구절도 많이 볼 수 있답니다. 덕분에 이 책을 통해서
김훈과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어보려고 해요. ^^

차트랑 2012-01-1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적 가치의 최고봉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노동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적 가치를 창출해내는 노동자들은 정작 그에 알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아니, 대우해주지 않는 사회입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했다는데....
정녕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란 말인가요...
가치관과 행동관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에게 우리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요...

글을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몹시 무겁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글을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고맙습니다..

cyrus 2012-01-12 23:14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저도 아무 것도 몰랐던 어렸을 때에는 노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무척 강했어요. 요즘 저 같은 젊은 세대들도
막노동을 힘들고 더럽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는 식으로 인식하듯이 말이죠.
하지만 송경동 시인의 시를 읽고나니 노동이라는 것도 무조건 힘든 일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상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찾고 비록 짧지만 휴식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 모습들이
노동을 접하지 못한 저로써는 무척 새로웠습니다.
요즘 이 분의 산문집이 많이 읽혀지고 있는데 독자들이 시집들도
많이 읽혀졌으면 좋겠어요. 송경동 시인의 시 속에서는 정말
우리가 몰랐던 노동자들의 삶을 볼 수 있거든요 ^^

잘잘라 2012-01-13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과 1년도 안 된 얼마 전까지 건축 공사 현장 감리를 했고 또 봄이면 그 일을 시작할 예정이라 이건 꼭 얘기를 하고 싶어요.

'재수가 없거나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라는 말을 공사 관리 감독관 처럼 얘기했다고 하셨는데, 그건 그렇지 않거든요. 감리자가 제일 신경쓰는게 안전 관리예요. 안전모, 안전띠 착용, 안전판 설치.. 물론 공사 규모에 따라 감리자가 상주하는 현장도 있고 그렇지 않은 현장도 있지만 아무튼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조사 대상이 되는 사람이 바로 감리자거든요. 물론 감리자가 할 일 중에 부실공사를 막는 것도 큰 일이지만 그보다는 안전 공사를 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해야 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공사현장은 항상 공기(공사기간)에 쫓기기 때문에 시공사는 안전에 소흘하기 쉬워요. 그러나 감리자는 감리자의 업무 중에 안전관리가 들어있기때문에 공사현장에서 그나마 공기보다 안전을 우선 순위에 둘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감리자예요. 감리자와 별도로 감독관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하는 분도 있어요. 제 느낌에는 cyrus님이 얘기하신 '공사 관리 감독관'이란 아마도 '현장 소장'을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감리자든 감독관이든 현장소장이든 아무튼 현장에서 사망 사고가 났는데 저렇게 태평스런 얘기를 하는 경우는 없어요. 소속은 달라도 모두가 피고용인이라는 입장은 같은 것이고 맡은 업무에 따라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인데 저렇게 간단히 남 일 처럼 얘기할 수는 없지요.

저도 송경동 시인의 책 읽고 있는데 많은 부분 공감하는 부분도 있는 반면 너무 노동자를 별개로 격리된 존재로 부각시키는 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댓글이 너무 길어지네요. 리뷰 쓰면서 제 생각을 더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cyrus 2012-01-13 10:47   좋아요 0 | URL
제가 노동 경험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어요. 공사 관리 감독관이라는 것도
있고 현장 소장이라는 직책도 있었군요. 포핀스님의 지적이 아니었다면
제 글 때문에 공사 관리 감독관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비춰질 우려가 있었어요. 문제가 되는 내용을 수정해야겠어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

그런데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신다니 다치지 않도록
몸 조심하셨으면 해요 ^^

차트랑 2012-01-13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포핀스님은 모르시는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매우 해박하시다보니 감탄스러워서 건방지게 리플을 달았습니다 ㅠ.ㅠ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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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앞에서 불안에 떨어야만했던 절망적 자아, 기형도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 '식목제' 중에서 -

   

고등학생 때, 국어 수업을 통해서 처음으로 기형도라는 시인을 알게 된 시가 바로 '식목제'였다. '식목제'는 전문으로 보게 된다면 비교적 긴 내용에 속하는 편이다. 이 시를 알게 된 덕분에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시인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도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럽고도 불행한 죽음이라는 이미지로 결부되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인식 탓인지 당시 고등학생인 나로써는 기형도의 시가 너무 어둡고 절망적인 내용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느꼈다. 비록 시인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않겠지만, 내용만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엄마 걱정' 같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유년 시절 속 어머니에 대한 강렬했던 기억'을 묘사하는 시로만 생각하겠지만 실상 이 시에서도 시인 특유의 어두운 심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식목제'라는 시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과거의 삶을 회상함으로써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화자(시인)은 살아가면서 늘 마주하게 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극복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래, 즉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다.  

기형도의 시에는 미래에 대한 전망, 즉 '희망'이라는 것이 배제되어 있다. '기형도'라는 이름의 육신은 썩어 사라졌지만 우울하고 절망적인 세상 앞에서 불안에 떨며 방황하는 내면적 자아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어버린 <잎 속의 검은 입>이라는 세련되면서도, 그의 불행했던 생애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죽음' 그리고 '가난의 고통'으로 기억된 시인의 유년 시절 

기형도의 시가 어둡고, 절망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인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그의 시 중에서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 많은데 어린 기형도는 이른 나이에 '죽음'이라는 현상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가난의 고통을 체험해야만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그 때부터 시인의 모친이 가장 역할을 했다.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 '위험한 家係. 1969' 1연 중에서 -

  

시인의 모친은 어린 자식들을 거두기 위해 시장통으로 돈벌이를 하러 나갔다. 장터에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인은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걱정하다가 빈방에서 혼자 엎드려 훌쩍거렸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유년 시절을 쓴 시 중에 유독 추운 겨울로 배경을 한 내용이 많다. 어린 시절부터 불안한 심성을 지니기 시작했던 어린 기형도에게는 '문풍지를 더듬던' 겨울 찬 바람은 자신의 연약한 심성을 언제 해칠지 모르는  '죽음' 못지 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마음이 약한 어린 기형도를 보호하기에는 어머니의 존재로도 부족했다.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 중에서 -

 

유년기를 지나서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게 되는 사춘기 시절마저도 불행하게도 죽음의 신은 시인의 생애 주변을 자주 두리번거렸다. 중학교 3학년이던 기형도는 누이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맛보았으며,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의 내면적인 고민은 '시'로써 본격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모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중략)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20대는 기형도를 읽어야한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시인이 되고서 4년 남짓 발표한 작품이라곤 많지 않았다. 발표하는 작품들마다 주목은 받았지만 20대 중반인 시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기엔 살아온 세월이 너무 짧았다. 그의 유고 시집이 된 <입 속의 검은 잎>은 시인의 작품세계가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불안과 죽음이다. 주식처럼 가지고 있는 안개로 인한 그의 불안은 개인적 불안을 넘어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상까지 가감없이 그려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승에 남기고 간 문학의 결과물보다는 죽음으로서 사랑받는 시인은 이상, 윤동주 그리고 기형도 밖에 없다. 세 명의 시인 다 요절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하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시인. 시를 쓰던 날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그토록 자신의 삶 주변을 배회하면서 호시탐탐 노렸던 죽음의 신과 대면했던 그 순간, 시인이 세상을 향해 '안녕'을 고하는 그 날. 그 후로 가엾은 시인의 사랑은 영원히 빈 집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기형도 시인은 참으로 아픔이 많았던 시인이었다. 스스로 지닌 아픔은 견디다 못해 단 한 권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남은 아픔들은 어찌할 것인가. 세상을 떠난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인의 지인들과 독자들은 기형도를 기억하고 있지만 강산이 변할수록 시간 앞에서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시인의 불안하고도 슬픈 생애를 공감할 수 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그가 이승을 떠나고 난 뒤에 태어난 나 같은 20대의 세대들은 기형도라는 이름의 석 자가 남기고 간 가슴 아픈 '검은' 시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시를 읽기에는 우리 세대들이 겪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너무나 어둡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은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혹은 어둡고 우울한 시인의 시구가 불편하더라도 20대는 기형도를 읽어줘야 한다. 삶에 있어 빛과 그림자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시인은 '거리의 상상력'이 주는 고통을 사랑함으로써 짧은 생애동안 수십 편의 시를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시라는 '가장 위대한 잠언은 자연 속에 있음'을 믿었다. ('詩作 메모' 중에서)  

그는 고통스러운 창작 고통 속에서도 희망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88만원 세대'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형도의 절망을 통해 희망을 향한 안간힘의 줄기를 찾아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를 부른다면 언제든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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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25
T.S.엘리어트 지음, 황동규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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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무녀는 아폴로 신으로부터 자신의 손 안에 든 먼지만큼 헤아릴 수 없는 영생을 얻지만 영원한 청춘을 달라고 하는 것을 잊었다.  죽음 상태라고 할 수 없는 늙어 꼬부라진 무녀는 조롱(鳥籠)에 담겨 만인들로부터 영원한 조롱(嘲弄)의 대상이 되었다.   "죽고 싶어" ,  염세적인 느낌을 주는 이 문구는 T.S. 엘리엇의 유명한 <황무지>의 프롤로그다. 

엘리엇의 시 <황무지>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라는 시구일 것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 <황무지> 제1부 '죽은 자의 매장' 중에서 (pp 46) - 

 

생명의 부활을 약속받은 이 찬란한 봄의 계절에, 현대인들은 죽은 목숨만을 이어 가고 있으니 그것은 잔인한 운명일 수 밖에 없다는 역설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사월이 되어 봄비로 잠든 생명의 뿌리가 뒤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좀 더 행복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하지만 시인의 행복한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이 움켜잡은 뿌리는 무엇이며, /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 <황무지> 제1부 '죽은 자의 매장' 중에서 (pp 48) -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시인의 의식은 다시 황무지로 이어지고 황무지의 구체적 이미지가 제시된다.  바그너의 가곡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3막 24절을 인용한 시구는 황무지의 황량한 모습을 통해 잠시나마 느꼈던 행복과 사랑의 기억들이 허무하게 만들게 되는 절망적인 느낌을 준다.

  

 

 막스 에른스트  <비온 뒤의 유럽>  1940~1942 

 

황무지는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지만, 이 시에서 황무지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문명을 뜻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은  현대 문명에 갇혀 생명의 기운을 잃은 상태였다.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맞닥뜨린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엘리엇은 서구인의 삶에 서린 ‘무한한 늙음’과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깊은 절망을 보았다. 그러나 그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그 절망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함이었다.
 

 

 

 

티에폴로  <히아킨토스의 죽음>

 

일 년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를 줬지요.  

다들 저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어요. 

- 하지만 히아신스 정원에서 밤늦게 

한아름 꽃을 안고 머리칼 젖은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 <황무지> 제1부 '죽은 자의 매장' 중에서 (pp 50) -

 

무녀의 절망에는 아직 희망은 있다. 그녀는 죽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재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무리 신적 능력을 지닌 초월적 존재라도 죽음의 영역을 거스를 수가 없다.    

무녀에게 영생을 부여한 아폴론마저도 자신이 사랑했던 히아킨토스(Hyakintos)를 다시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아킨토스의 선혈로 물든 땅에 히아신스 꽃이 피어지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히아신스는 부활한 신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아폴론의 입장에서는 히아신스의 존재만으로도 죽은 히아킨토스의 부재를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일까?  아폴론은 히아신스의 꽃잎에 탄식의 소리 ‘아, 슬프다!’를 나타내는 ‘AIAI’ 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결국 아폴론에게 히아신스는 히아킨토스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했다.  

이렇듯, 현대인들의 절망에는 희망이 없다. 그 황폐한 정신을 가지고 죽음을 피해 다닐 뿐, 재생의 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황무지에 등장하는 겨울에 따스함을 쫓아 남쪽으로 가는 유한계급의 사람, 종교적 신념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문명의 값진 유산을 허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류계층 속물,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성(性)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 방탕한 여인, 상업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장사꾼, 구원의 기사를 유혹해 위험에 빠뜨리는 거리의 여인 등 수많은 인물은 모두 황폐한 정신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으로 절망하지 않는, 정신적으로 죽은 자들.   즉 어떤 소생의 믿음도 인간의 생활에 중요함과 가치를 제공해 주지 못하며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비극적 상태이다.  

전쟁이 남기고 간 황폐함과 유혈의 황무지보다 더한 현대인의 정신적 불모 상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앞뒤 좌우를 아무리 살펴봐도 넓디 넓은 황무지 속에서 우리 현대인들은 행복의 도피처를 통해서 저주스러운 문명 속에서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시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은 "샨티 샨티 샨티(Shantih shantih shantih)"로 끝난다.  샨티는 산스크리트어로 평화를 기원하는 단어를 의미하는 말이다.    하지만 신은 사라지고 종교라는 허울만 남은 세상, 종교가 권력이 되고 기득권이 된 오늘날 종교의 얼굴은 황무지에 사는 불쌍한 현대인들의 구원이 되어주기는 커녕 인간의 정신을 더욱 황폐화된 현실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희망의 시대를 간절히 바라는 엘리엇의 종교적, 소망적 메시지가 더욱 절망적으로 들려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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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6 15: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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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7 09: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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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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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의 사회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김수철이 잡힌 지 한 달도 안 되어 같은 지역에서 7살 여자 아이가
성폭행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후 피해 여자 아이의 진술을 통해 성폭행범의
몽타주가 완성되어 지명수배중이다. 하지만 이 용의자가 또다시 제2의 범행을
저지를 수가 있다. 초등학생 자식을 둔 부모님들은 이들의 행각에 치를 떨면서도
자기 자식들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 
 

반면, 이런 흉악범들을 잡아야 할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들은
폭력 같지 않은 폭력(?)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경찰들이 피의자들에게 고문을 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가혹 행위라고 주장하지만
논란이 계속 커지자 관련 경찰 4명은 구속되고 경찰청장은 사퇴 요구에 압박당하고 있다.
20여 년 전, 독재 정권 시절의 저승사자였던 ‘고문경찰’이 사라졌건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두운 곳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폭행과 경찰 고문 사건의 소식이 알려짐과 동시에
또 다른 기사가 또 한 번 대중들을 분노케 했다.
이번에는 고양이가 무자비하게 학대를 당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고양이의 이름을 따서 일명 ‘고양이 은비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아침 시사 프로그램에서 가십거리의 하나로 소개되었지만
방송 이후 사건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 커져나갔으며  

결국 뉴스에서까지 비중이 있는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논란이 일어난 이유는 고양이를 잔인하게 학대한 점과 가해자의 변명이었다.
고양이를 무참하게 때리다가 고층 건물 밖으로 내던졌으나, 가해자는
자신이 그 때 술에 취해서 기억이 자세히 안 나며
왜 죄 없는 고양이를 죽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변명하고 있다.

요즘 사회는 폭력의 사회다. 정말 무시무시하다.  

같은 인간뿐만 아니라 이제는 동물까지도 거리낌없이 폭행을 가하고 있다.
동물도 인간과 같은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아무 죄 없는 고양이를
죽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런 잔인한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앞에서 소개된 사건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폭행 사건이 많다.
김길태와 조두순 같은 사람은 인간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성폭행과 살인을 저질렀으며,
괜히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청소부와 힘 없는 임산부에게  

폭행을 가한 사건들이 있다.
예전에는 폭력이란 조직 폭력배들과 같은 흉악범들의 전형적인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폭력배들의 생활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대중 매체 속의 폭력배들은 동료의 의리와 자신들만의 목표를 위해서
주먹질을 하는 왜곡된 이미지로 그려졌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폭력배의 모습을 보고 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조직 폭력배들의 전유물인줄만 알았던 폭력 행위는  

이제 일반인들도 폭력을 행사하여 종종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요즘은 폭력배들의 소식보다는 일반인들의 폭력 소식이 점점 눈에 띄고 있다. 
 

 

 

 죄와 벌

김수영의 모든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김수영 전집> 1권을 읽게 되면
지금 우리나라의 폭력의 사회를 그대로 표현하는듯한 시가 있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는 먼저
  아까운 것이
  지(紙)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김수영 전집 1>『죄와 벌』전문, p 296 - 
 

 

이 전집에는 김수영의 시 속의 단어들에 대한 각주만 있을 뿐 자세한 문학적 해설이 없다.
그래서 시의 내용에 대해 독자는 다양한 해석들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제목부터 보자마자 떠오르는 것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이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약육강식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시의 1연도 이와 비슷하다. 시 속의 화자가 살인을 하려는 행위를 암시를 주고 있다.
그리고 살인이란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오히려 화자는 살인 행위 후의 비난을 ‘희생’이라고 고상하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우산대로 폭행을 가한다.
그러자 그들의 주위에는 40명 정도의 취객들이 모인다.
하지만 시의 내용에는 취객들이 화자의 폭행을 말리는 장면이 없는 걸로 보아서는
폭행 행위를 그냥 묵묵히 지켜봤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시인은 폭행 및 살인 행위를 지켜보기만 하는 목격자들을  

‘취객’ 이라고 비유함으로써 이들의 안일한 태도들을 은근히 조롱하고 있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게 되면 인간의 뇌는 알코올로 인해서 취하게 되어
기억력과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시 속에 등장하는 40명의 취객들도 술에 취한 나머지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행위를 막지 못하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게 된다.
하지만 한 두 명이 아닌 40명이라는 적지 않은 취객들 중에서도
단 한 명이라도 살인 행위를 말리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40명이든 100명이 모여 있든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자신의 일이 아닌 살인 행위 앞에서는 평소답지 않게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방관자 효과’ 라고 한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것이다.
목격자들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는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나 성격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도움을 주겠지’하는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
즉,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취객이 알코올로 인해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것처럼
사건의 목격자들도 사건 현장 앞에만 서면 취객처럼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는 뜻으로
사건의 목격자들을 ‘40명 가량의 취객’과 동일시하고 있다.

결말에는 살인 행위를 저지르고 난 뒤의 화자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범행 현장을 지켜보던 취객 중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의 죄가 알려짐으로써 생기는 불안감보다는
범행 도구인 ‘지우산’을 현장에 놔두고 왔다는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화자의 인면수심적인 심리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화자가 지우산을 현장에 놔두고 왔다는 점을 통해서
사건 증거물인 지우산으로 인해 그의 범행이 밝혀질 것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시인은 인간으로서의 용서할 수 없는 를 저지른 자는 언젠가는 죄가 밝혀지며
죄의 대가로 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시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40명의 취객’들도 살인 행위들을 방관한 것도  

도덕상으로 보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말할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이들도 죄를 저지른 것이며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
시의 제목 ‘죄와 벌’이 살인자인 화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살인 행위를 그냥 지켜보는 취객들도 포함하게 된다.
시는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할 대상의 고정 관념을 무너뜨리고 있다.
결국 누가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할 지 알 수 없는 왜곡된 현실의 상황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죄와 벌’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폭력의 역사

김수영의 시를 폭력이라는 행위가 비일비재한 우리 사회를 투영해서  

독자적인 해석을 했지만
당시 시를 쓴 배경을 생각하면 시 속의 화자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들을 억압하고 비밀리에 고문을 가하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책감도 없으며
정당화하려는 독재 정권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리고 ‘지우산’을 통해 그들의 추악한 행위들이  

언젠가는 밝혀지고 무너지기를 암시하고 있다.
참된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시에서 내포되어 있다.
김수영의 시는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했으며 민주주의와 자유를 갈망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김수영이 살던 사회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독재 정권이 남긴 어두운 면이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다.
이번 경찰 고문 사건은 예전 독재 정권의 시대에 있을법한 일들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고 있는 폭력의 모습들도 모두 다
일제 강점기부터 비롯된 독재 정권 하의 사회와 교육이라는  

기이한 사회 구조가 낳은 악영향이다.
그 때 학교와 군대, 사회단체에서는 지도자가 모든 집단 인원들을 통솔하기 위한 방법에는
무조건적인 복종 강요와 이에 불응 시에 따르는 폭력뿐이었다.
복종과 폭력에 길들어진 대중들은 억압된 과거로 인한  

정서적 불안을 해소하고자 폭력이라는 행위를 하게 된다.
잘못된 사회 구조가 ‘남보다 자신’ 이라는 지나친 이기주의로 자리 잡게 되고,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다거나 마음에 안 들면 무조건 폭력으로 응징하려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이런 폭행 사건들이 또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대중들은 폭행을 일으킨 범죄자를 겨냥하여
‘패륜녀’, ‘패륜남’ 이나 일명 ‘발길질녀’ 처럼 별명을 갖다 붙이며  

마녀사냥식으로 욕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도 잠시 이성을 잃으면 마음속에 숨어있던 폭력의 본능이 나올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우리도 ‘패륜아’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이 김수영이 말하고자 했던 우리 사회의 ‘죄와 벌’의 양면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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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수영 전집 시집1

소장하고 있어요.

근데 옛날 판 이라서 한문 이 섞여 있는데 한자 까막눈 이라서

일일이 옥편 찾는게 귀찮아서 마음 가는데로 읽어요 ㅋ